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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 산책22: 육신의 재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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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0-11 ㅣ No.728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22) 육신의 재계란?


믿음으로 행하는 재계, 하느님께 이르는 방법



필자는 그리스도인 수덕 생활이 나쁜 악습을 끊어 버리려는 방향과 좋은 덕행을 습득해 증진시키려는 방향에서 실천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수덕 생활을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덕의 본성이라는 범주에서 구분하는 경우와 다르게 실천 방법의 범주에서 또 다른 구분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인간 육신의 행위에 강조점을 두는 경우와 인간 정신의 행위에 강조점을 두는 경우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동안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육신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인간 육신의 행위를 통한 수덕 생활 실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재계, 부정함을 멀리 한다는 의미

오늘날 한국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사순 시기나 대림 시기가 되면 종종 ‘재계’(齋戒)를 지켜야 한다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말 사전은 이 단어의 의미를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해 ‘종교적 예식을 거행하기에 앞서’ 재계를 실천한다고 설명합니다. 가장 이해하기 좋은 예문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폭넓게 사용하는 ‘목욕재계’를 들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부정 타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려는 측면이 나타날 뿐이지 인간 육신에 해를 끼치는 듯한 부정적인 의미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준말인 ‘재’라는 말 하나만 사용하는 경우에는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 조금 다른 의미를 드러냅니다. 한국 가톨릭 신앙인은 교회에서 우리말 ‘금육재’, ‘단식재’라는 용어를 통해 이 단어를 접하게 되는데, 외형적으로는 ‘재’가 사용됐지만, 내용적으로는 규정을 지키라는 의미가 더욱 포함된 ‘계’라는 의미로 더 알아듣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교회 안에서는 비슷한 말로 금욕, 고행, 고신극기(苦身克己) 등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단어에는 인간 육신에 다소 불편함을 제공하는 부정적인 의미가 포함돼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통, 하느님께 다다르는 역설적 방법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사상을 살펴보면, 사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포함해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고 나서 보시니 좋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 1장 참조). 이러한 좋은 세상에 고통이 들어온 것은 인간이 죄를 지은 후였습니다(창세 3장 참조). 그러나 인간에게 벌로 주어진 고통은 인간이 회개를 통해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신 하느님의 마음이었고, 인간이 짊어질 수덕 생활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정착 이후에 유다인들은 인간이 수확한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다시 하느님을 저버리게 됐습니다. 이에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께 다시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잠시 인간에게서 지상의 재물을 빼앗을 뿐 아니라(호세 2,10-11 참조), 재물을 저주의 징표로 여겨야 한다(이사 5,8-24 참조)고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육신의 고통은 고통받는 욥(욥 42,1-6 참조)과 예언자 예레미야(예레 11,18-12,6; 15,10-21; 17,12-18; 18,18-23; 20,7-18 참조), 그리고 고난받는 하느님의 종(이사 52,13-53,12 참조)에 이르러서 하느님께 다다르는 역설적인 방법이 됐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수덕 생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 가르침에서도 어려운 여정이 요청됩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좁고, 그 길도 비좁습니다(마태 7,14).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있다면 비록 몸의 일부이더라도 모두 제거해야 합니다(마르 9,42-48). 나아가서 자신의 소유를 다 포기해야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루카 9,33).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탓할 것이 있어도 참아야 하며(1코린 6,1-7; 콜로 3,13; 에페 4,26) 남의 짐을 져 주고(갈라 6,2), 형제를 심판하지 말며(로마 4,4.10) 박해자들마저 축복해 주어야 한다(로마 12,14)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의 가르침은 자신을 해치는 고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 고통을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믿음에 일치시키는 것으로 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수덕 생활입니다.

 

[평화신문, 2015년 10월 11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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