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사순 2 주일-가해-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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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9-02-27 ㅣ No.34

사 순  제 2 주 일 ( 가 해 )

          창세 12,1-4a  2 디모테오 1,8b-10  마태 17,1-9

     1999.  2.  28.

주제 : 고통 안에 숨겨진 영광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이제는 봄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온도가 낮다고 해도 겨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 때가 되었습니다.  이런 때를 지내고 있는 오늘은 사순 2주일입니다.  날씨의 이런 변화를 보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의 하나는, 세상 모든 것은 사람이 받아들이기 나름이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이 있기는 하지만, 절망의 모습만을 보려고 한다면, 세상을 좋게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1999년 1월의 실업률이 사상 최고인 8.5%라고 해도, 실업의 고통을 겪는 사람이 176만 명이라는 슬픈 소식을 접해도, 우리의 생각과 자세부터 바꾸어야만 어려운 가운데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지금 지내고 있는 사순절 시기는 고통과 수난의 시기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고통과 수난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겪는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우리가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수 있는 곳을 찾아둘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오늘의 전례 말씀은 고통을 이겨냈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행복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하는 쉬운 말처럼 희망을 이야기하는 모습에 마취되어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기를 포기하지 말고 ’고통 안에 숨겨진 영광’을 바라봄으로써 고통을 이겨내겠다는 다짐과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선택된 제자 3명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활동하는 무대를 떠나 산으로 올라가고, 그곳에서 스승님이 보여주는 놀라운 모습에 매료되어,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는 욕심이 들어간 말을 하고 맙니다. 사람 누구에게나 욕심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욕심을 마음껏 드러내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은 그 욕심을 어떤 방법으로 표현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서 질타(叱咤)를 덜 받을까 미리 생각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욕심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생각나는 대로 입에서 준비되는 대로 말을 하고 맙니다. 그렇게 하고 난 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는지, 대답을 들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너무 어리석은 말에 응답할 말씀을 잊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뒤에 들려온 소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소리였습니다.  ’너희의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말씀을 올바로 알아들었으면 좋겠다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진 예수님의 응답은 ’함구령’이었습니다.  오늘 본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옮기지 말라는 소리였습니다.

 

우리는 두 눈으로 세상의 많은 것을 보고 삽니다.  그리고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사실 그대로인 것처럼 말을 옮깁니다.  그렇게 전하는 말이 사실일지는 몰라도, 전하는 말이 맺는 결과는 애초에 말을 시작한 사람이 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본래 그렇습니다.  우리가 두 귀를 가지고, 한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기는 합니다만 말하는 사람의 내용을 그대로 듣고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내가 필요한 것만을 골라서 듣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기는 삶의 어려움은 이 세상에 참으로 많습니다.

 

제자들은 무슨 모습을 보았을까요?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시게 변했다’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적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었고,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은 스승을 따라 나서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은 흐르지 않고, 장소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곳이 되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엉겁결에 그들의 생각을 말하지만, 마음에 드는 응답을 듣지도 못하는 것이고, 산에서 내려오면서 예수님에게서 함구의 명령마저도 받게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좋은 모습을 보려면, 우리의 마음이 순수해야 합니다.  순수해야 한다는 소리는 사람이 마음을 먼저 비워야한다는 소리도 될 것이고, 마음을 비운다는 소리는 욕심을 효과적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소리도 될 것입니다.  행복은 그렇게 다가옵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삶의 변화는 그렇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는 확실성이 있지만, 내가 영원히 머물 곳이라는 생각을 하고 싶은 곳이기는 하지만, 더 큰 소리, 희망에  가득찬 새로운 소리를 들을 때 재빨리 움직일 수 있는 빠른 판단력은 구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빠른 판단력을 구비했던 인물에 대한 소개가 오늘 첫 번째 독서에 나옵니다.  창세기 12장에 처음 등장하는 아브람이 어떻게 해서 처음으로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에 아무런 이의(異意)제기없이 따랐는지 우리는 알 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듯이 ’뭔가 미숙한 판단력을 갖고 있었기에 이리저리 쉽게 움직였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면, 엄청난 일이 다가와도 우리는 아무런 주저함 없이 움직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달릴 준비를 하고 있다가 신호에 따라 힘차게 출발한 경주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듯이, 준비하고 있던 자세 때문에 아브람은 축복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며,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이러한 아브람의 자세는 신앙인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행동과 믿음을 함께 갖춘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인지 압니다.  한 두 번 들은 것이 아니기에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일에 한가지 더 기억해야 했으면 싶은 것은 디모테오 주교에게 보낸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지금하고 있는 일, 지금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않는 생활,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그대로 주저앉지 말고 고난에 대항하여 일어설 수 있는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은 세상에서 보고 싶은 것만을 봅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우리가 눈을 감고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피하고 외면하는 일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눈으로 보지 못한 일에 대해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안타까운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현실, 우리가 선택하는 바로 이 순간을 성실하게 지내겠다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보여준 행복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는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그 행복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조건은 지난 주일에 보았던 유혹을 우리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이겨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행복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합니다. 사람이 행복해지려고 하는 일이 잘못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행복만 얻으면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올바른 방법, 우리가 찾아야 할 올바른 방법에 대한 지혜를 주시도록 오늘 미사중에 하느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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