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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 (7) 새로운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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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37

제7강의 : 새로운 계약(5월 11일 오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 오늘 저희에게 이 귀한 시간을 주심에 감사드리오며 이 시간을 통해서 주님께서 저희에게 쏟으시는 한없는 사랑을 깊이 묵상할 수 있게 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해 비나이다.

 

지금까지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특별히 구약 시대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에서 시작하여 출애굽 사건, 또 예언자와 바빌론 유배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은 계시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들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어제 인용한 이사야 54장 10절,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이 무너져도 나의 사랑은 결코 너를 떠나지 않는다"라는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구약성서 전체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미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새로운 계약을 맺고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시켜 나가셨습니다.

 

에제키엘서에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나 야훼가 분명히 일러둔다. 새 계약은 그 백성의 조상들의 손을 잡아 에집트에서 데려 내오던 때의 것과 같지 않다. 나는 그들을 내 것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나와 맺은 계약을 깨뜨리고 말았다. 귀담아 들어라. 그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은 그들의 가슴에 새겨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에제 31, 31-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구약은 끝나고 신약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런데 신약의 새 계약은 본래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당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사람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새로운 계약의 제물로 또 속죄의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맺어집니다. 다시 말해 우리들 사람을 위해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맺으신 계약인 것입니다. 옛 계약은 동물의 피로써 맺어졌습니다. 그러나 새 계약은 그냥 사람의 피가 아니고 하느님의 아들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맺어졌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참으로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사실을 공관복음과 고린토 전서 11장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예를 마태오 복음에서 든다면 "예수께서 수난 전날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라고 하시고 이어서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하려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26, 26-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루가 복음, 마르코 복음, 고린토 전서 11장의 말씀들은 모두 조금씩 표현은 달라도 본질적으로 같은 말씀이십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계약을 전표로 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계약을 우리 인간들과, 새로운 이스라엘과 맺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계약에 의해서 약속하신 축복을 훨씬 초월하는 그러한 축복을 베푸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 그리스도를 속죄의 제물로 삼으심으로써 우리 죄를 사해 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사성제의 의미가 얼마나 큰가를 깊이 생각해야 될 것 같습니다. 미사성제라는 것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느님, 그리고 같은 사람이 되어오시고 죽기까지 하심으로써 당신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시어 피흘리신 그리스도의 사랑, 그 사랑과 피를 흘리심으로써 맺은 계약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 계약은 참으로 죽기까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까지 사랑하시는가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 친히 하신 말씀으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에,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표현도 그렇고 또 '하느님께서 이 세상(여기서 세상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면 당신의 가장 아끼는 외아들을 보내셨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외아들을 바칠 것을 요구하셨지만, 그러나 그의 외아들을 실제로 봉헌케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실제로 제물로 바치실 것을 그 때 벌써 작정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외아들은 어떤 의미에서 아버지에게는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 남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보다 더 큰 자기 희생이 요구되는 그런 귀한 존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로마서 8장 32절에서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이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32절-35절)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보다 더 소중한 외아들까지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남겨두실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당신의 전부라도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요한 1서 4장 9절에서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 앞에 우리 인간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참으로 죄인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상상해보면 아담에서 시작해서 오늘의 우리 자신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을 거슬려서 지은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자신이 생각해도 깜짝깜짝 놀랄 그런 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를 들면, 2차 대전 중에 나치에 의해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되었고, 우리 나라에서는 해마다 어린 아기 150-200만 명을 낙태로 죽이고 있습니다. 매일 인간과 인간끼리 서로 다투고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는 죄, 서로 사랑할 줄도 모르는 그런 우리 인간! 그런데 이런 인간을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오셨을 뿐 아니라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로마서 5장 7-8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참으로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면 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십니까?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를 구원하시어 당신의 자녀로 만들고 그리고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만들어서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영원히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를 궁극적으로 하느님 당신과 같이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존엄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우리 나라 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문명국의 헌법에는 이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닌다.' 우리 나라 헌법에서도 제9조에 이 말이 있고, 이어 제10조에서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이 존엄성의 이유' - 왜 존엄하며, 왜 평등한 것인가? -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하고 그들에게 물어본다면 대답할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만 아마 대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를 어떻게 학문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지극한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잘났던 못났던 하느님께서 한결같이 사랑해 주시기 때문이고, 옛날에 한번 사랑하셨고 그것으로 끝마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자리'(hic et nunc)에 현재 사랑하시기에 모든 인간은 참으로 존엄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말 교리를 가르칠 때도 우리 신자들에게, 특별히 지성인들에게도 호소력이 있는 말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인간이 존엄한 그 이유는 참으로 신앙의 원리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와 같은 상속자로 만들기 위해서 사랑하셨다는 것을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교부는 이에 대해 성경에서 수없이 말하기 때문에 일일이 인용할 수 없다고까지 표현하였습니다. 단 두 가지를 예를 든다면 요한 1서 3장 1절에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 4장 6-7절에서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당신 아들의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서는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요한 복음 17장 21절에서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세상 모든 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빅뱅으로 시작되어 150억 년 동안에 우주가 생성되고 진화한 그 목적은 의식하는 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이며, 그 이후 진화한 목적은 그리스도를 탄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일치되고 궁극에는 떼이야르 드 샤르댕이 말한 것처럼 온 우주가 그리스도화 즉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하고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고린토 전서 2장 9절에서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우리에게 공로가 있어서 주어진 것입니까? 물론 아니지요! 이미 인용한 사도 요한의 말씀대로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고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셨고,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본성이 같은 분이셨지만 당신을 낮추심으로 이른바 케노시스(Kenosis), 즉 우리 때문에 당신을 완전히 비우신 그리스도의 겸손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것을 본받아야 되는데, 앞에서 그런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 지난 번 한 달 피정을 할 때 '나를 비운다'는 이 문제에 대해 결국 제가 들은 것은 죽는 날 까지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고 비우는 것을 죽는 날까지 비워야하는데 죽고 나서도 15분 뒤에 비로소 자아를 비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 때 영혼이 떠나니까!

 

이제 우리는 이러한 크신 사랑을 묵상하면서 사도 바오로와 같이 로마서 8장 31절 이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무슨 말을 더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31절-34절) 물론 아니지요.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바오로는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38-39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피를 통해 사랑의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동물의 피가 아니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피로 맺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나의 사랑을 믿어라!' 이것입니다. "나는 너를 극진히 사랑해서 죽기까지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 사랑을 믿어달라!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내 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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