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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 (9) 십자가의 신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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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39

제9강의 : 십자가의 신비 1(5월 12일 오전)

 

 

어제까지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구약 성서와 신약 성서를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 모든 성경 말씀이 증언하는 것은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우리를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조건 없는 사랑을 뚜렷이 드러내는 분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육화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특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이 사랑을 극적으로 증거 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것은 참으로 우리 신앙의 신비이며, 가장 깊은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예수님을 우리가 생각 할 수 없고, 십자가 없는 복음도 생각할 수 없고, 십자가 없는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십자가의 뜻을 알아듣기가 참 힘들다는 것을 느낍니다.

 

십자가는 현재의 우리 신앙인들에게 거룩한 그 무엇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며 성호도 긋고 기도도 바치고, 조금도 우리 눈에 거슬리지 않을 만큼 친근감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래 십자가는 저주스러운, 치욕적인 것이었습니다. 아주 대죄인, 그것도 살인 강도, 반역 대죄인을 죽이는 무서운 형틀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21장 22-23절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을 처형하고는 나무에 달아 효시할 경우가 있다. 이렇게 나무에 달린 시체는 하느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니.."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도 이 말씀을 인용하여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을 자다'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주받은 것으로 간주되는 그 십자가의 죽음, 사도 바오로도 '십자가의 어리석음'이라고 표현한 그 십자가가 어떻게 하느님 사랑의 가장 큰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왜 하필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을까? 다른 길은 없었을까?"하는 의문도 없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시니까,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도 우리를 구원하셨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그렇게 저주스럽고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을까요?

 

시몬느 베이유는 참 재미난 사람입니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깊이 믿고 따른 분이었는데, 세례 성사는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거부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깊이 믿은 유대인이었는데, 그 시몬느 베이유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아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하신 말씀인 것 같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이 같은 죽음을 결코 영웅적으로 위풍당당하게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강도와 섞여 그들 중 하나처럼 참혹히 죽었습니다." 루가 22장 37절에서도 "그는 '악인들 중의 하나로 몰렸다'라는 예언대로 죽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께서는 두 강도와 함께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지나가는 사람들도 모두가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너는 너 자신이나 먼저 구원해 봐라"하고 말하면서 조롱했습니다. 이사야가 야훼의 종에 대해 예언한 그대로였습니다 : "이제 나의 종은 할 일을 다 하였으니 높이 높이 솟아오르리라. 우리가 그를 보고 기막혀 했었지,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고, 인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제왕들조차 그 앞에서 입을 가리우리라. 이런 일은 일찍이 눈으로 본 사람도 없고 귀로 들어 본 사람도 없다"(이사야 52장 13-15절).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참혹한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도 당신이 어떻게 죽으실 지를 미리 다 알고 계셨고, 당신 자신이 겪으실 죽음에 대해 세 번씩이나 예언하셨습니다. 그러시고도 우리가 복음을 보면 그 분은 죽음을 앞두고 무척 괴로워 하셨습니다. 마르꼬 복음에 의하면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14, 34)하고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역시 "예수께서 근심과 번민에 싸여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26, 38)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하셨을 때는 피땀을 흘리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당신에게서 멀리 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씩이나 당신께서 겪으실 죽음에 대해 예고를 하셨지만 막상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는 한없이 괴로워 하셨습니다. 참으로 죽음은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으리라 장담했던 베드로도 세 번씩이나 '나는 그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마태오 26, 74에 의하면 거짓말이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하기까지 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잡아떼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얼마나 공포에 사로잡혔으면, 베드로가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고 까지 말했을까요? 다른 제자들은 그 전에 이미 다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모습이었다면 또 어떤 의미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성서에서는 "때는 밤이었다"(요한 13, 30)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아무리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 해도 하느님이신 분이 이처럼 버림을 받고 치욕적인 십자가상의 죽음의 길을 가셔야만 했는지 참으로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또 성서를 보면, 예수님 친히 이 십자가가 영광이 되는 것처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 12장 23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분명히 이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키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십자가의 죽음이 영광이 되는 것인지 더욱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인용하여 '십자가의 어리석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고린토 전서 1장 22-24절에서 하신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 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라고 했는데 어떻게 십자가가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가 된다는 것일까요? 십자가의 죽음은 분명히 저주스럽고 고통스런 죽음이므로 그것은 절망이며 무력, 실패, 암흑을 의미할지언정, 적어도 그것은 우리 인간의 판단으로서는, 힘이자 지혜, 영광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만 해석하려 한다면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은 신앙의 문제이며, 그 중에서 가장 큰 신앙의 신비입니다. 믿음의 빛으로 보고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제 나름대로 인간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에도 구원이 요구되고 또 이를 위해서 변화가 요구됩니다. 특히 지금 우리 사회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경제 회복을 위해서, 또 곧 닥치는 새로운 세기의 세계화를 앞두고, 정치적 사회적 변혁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획"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그런데 계획이라는 말은 무성한데, 실제 우리 사회 현실의 모습은 정신적, 도덕적으로 황폐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뉴스에 보도되는 내용 중에서 왜 그렇게 사기와 부정 부패가 많은지, 오랏줄에 묶여 줄줄이 끌려가는 모습을 매일같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실 지 모르지만, 저는 그런 장면 때문에 뉴스가 보기 싫어지기도 합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기를 잘 치는 사람이 많은 나라가 도대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암담하기도 합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우리가 변화될 수 있고, 누가 무슨 힘으로 우리 사회를 보다 참다운 사회, 인간다운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모두의 마음이 바뀌어야 하는데,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돈이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물론 아닙니다. 권력이나 과학의 힘이 인간 개조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보다 더 차원 높은 참된 의미의 인간 구원을 생각할 때, 그 구원을 위한 인간의 변화, 회개를 가져오는 것은, 어떤 인간의 힘이나 지혜로도 불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기적은 어떨까?'하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기도 합니다. 만일 예수께서 그 옛날에 행하셨던 기적을 행한다면 어떨까?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나병환자가 일어나고, 요즘 불치병이라는 암도 고치고, 죽은 사람도 부활시킨다면, 우리 사회가 그걸 보고 변화될 수 있겠는가? 상당한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예수께서 그 옛날에 행하셨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 효과는 오래 갈 것 같지가 않습니다.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셨을 때는 사람들이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고 많이 몰려들었고 또 예수님을 많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스스로 당신의 기적이 실패하셨음을 개탄하셨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하도 믿지 못하니까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 행동을 보고서라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마태오 복음 11장 21-23절과 루가 복음 10장 13-15절을 보면,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셨던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을 저주하십니다. 예수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신 지역이 갈릴래아였고, 그 중에서도 말씀하신 도시들에서 가장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도시의 사람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또 바리사이파 사람도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며 그 힘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에게서 오는 것이라며 헐뜯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물론 상당히 달랐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주님께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할 만큼 믿음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요한 복음 6장에서 예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다음에, 당신 자신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고 거듭 말씀하시며,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음식'이라 하셨고,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산다고 강조하셨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을 뿐 아니라, 비위에 거슬려 그 말씀을 듣고 떠났고,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떠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남은 사도들을 보시며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요한 6, 67)하고 말씀하셨을 때,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6, 68)하고 대답하면서 믿음으로 주님의 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도들은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란 것이 얼마나 약했습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제자들이 배반하고 도망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겐 아직까지 아브라함이 지녔던 믿음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하느님께서는 죽은 사람까지도 살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지녔는데, 사도들에게는 아직 이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뿐더러 우리가 루가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수난을 앞둔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도 사도들은 누가 더 높은지, 주님께서 이룩하실 나라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인지를 두고 서로 다투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런 다툼이 다른 자리에서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루가 복음사가는 좀 짓궂게 주님의 수난 전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사도들이 이렇게 자리다툼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들 역시 주님과 함께 다니면서 3년 동안 많은 기적을 목격하였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스스로 기적을 행한 적도 있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크게 질적으로 변화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참으로 감동을 주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입니다. 벗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자기 목숨까지 바치는 그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고,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막시밀리언 꼴베 신부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이 분의 죽음은, 비록 오직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지만, 2차 대전 중 수백만 명이 희생된 그 암울한 시대를, 그 어두운 역사의 밤을 밝히는 빛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음,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인간의 죄를 당신 대신 짊어지셔야 할 때, 예수님은 죽음 아닌 다른 길을 가실 수도 없었을 것이고 죽음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럼고 치욕적인 죽음의 길을 가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지셨다고 할 때, 그 '대신 지신다'는 것은 그냥 어깨에 지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 하나 하나의 죄와, 죄로 말미암은 고뇌와 마음의 어둠과 비참과 죽음의 고통을 당신 안에 다 받아들이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마태오 복음 8장 17절에서 말씀하셨듯이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받아 주시고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습니다. 베드로 전서 2장 24절에서도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시어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 분이 매맞고 상처 입은 덕택으로 여러분의 상처는 나았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고린토 후서 5장 22절에서는,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 있는 분으로 여기셨다"고 표현했습니다. 외국 번역을 보면, 이보다 더 표현이 강한데, 거기서는 "죄로 만드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영어 번역을 보면, "For our sake, God made the sinless into sin." 이렇게 쓰고 있는데, 그러니까 죄 없는 분을 죄 덩어리로 만드셨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우리를 당신이 하느님으로서 지니신 힘으로 구원하셨는데, 그 힘은 전능하신 분의 권능이 아니고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으로 우리 모두의 죄와 그 결과를 당신이 껴안으시고, 당신을 희생함으로써, 우리를 위해 당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낮추시고 당신을 무(無)로 만드심으로써 우리의 죄, 우리의 더러운 모든 것까지도 받아들이시는 당신의 그 한없는 겸손과 자비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이신 분께서 나를, 나를 이토록 사랑하신다,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까지도 바치셨다'는 사실을 정말로 깊이 깨닫고 묵상한다면, 우리는 사실 그냥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불란서 영성가가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 때문에 미치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 복음 교회 신학자 J. 몰트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 "불타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박해 당하시고 고통 당하신 그리스도, 하느님의 침묵 속에 고통받으시는 그리스도,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해 그토록 철저히 버림받으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는 형제이며 친구이십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또는 그 이상을 이미 다 겪으시고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에 교도소에 직접 가본 적도 있고, 또 사형수들도 만나고 했을 때, 그 사형수들은 사형수인데도 그 표정이 참으로 평화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중에서 거의 대부분이 교도소에서 회개했는데, 그들이 회개한 중요한 이유는, 하느님이신 분께서 나를 위해서 죽기까지 하셨다는 그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회개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극치를 잘 드러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원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셨을 때 군중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네 목숨이나 건져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므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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