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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2010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대회: 용기있는 신앙의 증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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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9-11 ㅣ No.142

[2010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대회] 용기있는 신앙의 증거자들

 

베르나르도 체르벨레라 신부(교황청외방선교원 / Fr. Bernardo Cervellera, P.I.M.E.)

 

 

이 대회에 저를 초대해 주신 것에 대해 큰 감사를 드립니다. 교황청 평신도 평의회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그리고, 전 세계 교회에서 가장 영웅적이고 활발한 아시아 교회의 평신도 대표이신 여러분 모두에게 저의 감사를 표합니다.

 

한국의 모든 신앙의 조상들에게도 감사드리고 싶은데, 교회의 보편성 덕분에 이들을 “저의” 조상들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저희는 이태리 선교사인 마태오 리치의 서거 400주년을 기념했습니다. 그는 중국에 복음을 전함으로써 서양과 동양 사이의 견고한 문화적 종교적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마태오 리치에 대한 기념식 중 유감스럽게도 한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마태오 리치의 책을 읽은 평신도들 덕분이었고, 거기서 한국의 복음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박해가 시작되었고, 처음으로 세례 받았던 고관의 아들, 이승훈 베드로가 다른 많은 동료들과 함께 1801년 순교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의 증거가 있었기 때문에 이 대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승훈 베드로는 1784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같은 해에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자신의 그리고, 역사상 성음악의 걸작품 중 하나인 수도자의 만과를 작곡했습니다.

 

이 작품에는 신앙의 고백들이 펼쳐집니다 : 적 앞에서 메시아의 승리를 약속하는 장면(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 시편 108); 하느님을 경외하는 인간의 확신과 하느님의 자비, 동정, 정의가 가난한 이들과 사회에 전파되는 것(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로 큰 즐거움을 삼는 이, 시편 111); “주님을 찬미하라”의 아름다운 선율은,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을 진리와 평화의 승리로 감쌉니다.

 

뒤를 이어 강하고 웅장한 마니피캇이 나오는데, 이는 강약의 대조와 하늘과 땅이 이어지는 고음과 저음의 풍요로운 조화 속에서 겸손한 종 마리아와 모든 겸손한 이들을 비춥니다.

 

이 장엄한 만과가 어느 수도자를 위해 헌정되었는지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은 것은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제 생각에 이는 우선, 비록 알지는 못했지만, 동시대인이였던 이승훈 베드로와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하느님의 위대한 뜻을 위하여 싸우는, 무명 용사들”이라고 정의하신 유명 무명의 모든 순교자들을 위한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면서 쓰신 그분의 회칙, 제삼천년기에서 교황님은 : “제2천년기 말에 와서 교회는 다시 한번 순교자들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신자들 - 사제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평신도들 - 에 대한 박해는 세계 곳곳에서 위대한 순교의 씨를 뿌리게 해왔습니다. 피를 흘리면서까지 보여준 그리스도 증거는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공동 유산이 되어왔습니다…바로 우리들의 세기에 순교자들이 다시 등장했으며,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위대한 뜻을 위하여 싸우는, 이를테면, “무명 용사들”입니다. 가능한 한, 교회는 그들의 증거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n.37)라고 말씀하십니다.

 

 

순교와 축복

 

순교는 교회를 위한 하나의 축복입니다. 테르툴리아노는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순교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순교로 인해 많은 회개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박해와 순교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 젊은 대학생들, 지성인들이 양도불가능한 개인의 권리와 인간존중을 바탕으로 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중국에 필요한 것은 바로 크리스찬 정신이 아닌가라고 자문합니다. 잔혹한 자본주의가 자리잡고 있는 새로운 중국에는 많은 전문인들이 사랑이 돈과 부, 안락함을 이기며 평범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바치도록 하는 크리스찬 정신에 어떤 중요한 것이 있는지 자문합니다. 공산주의의 박해로 인해 가톨릭신자들이 최근 60년 동안 4배로 증가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가치가 있습니다. ‘49년에는 3백만 명이었던 신자들이 지금은 지하교회와 애국교회를 포함해 천2백만 명이 넘으며, 매년 수만 명의 신영세자들(성인)이 있습니다.

 

순교는 한 사회를 위해서도 축복입니다 : 지상의 많은 지옥과 같은 곳에 그리스도와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다른 이와 화해하고 용서하며 자신의 삶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이땅이 폭력이 만연하고 파괴될 운명을 지닌 종말의 장소가 아니라, 희망의 장소라는 가능성을 줍니다. 섬세한 사목적 배려로 일본주교들은 2008년 11월 24일 나가사키의 188명의 순교자들을 시복했습니다. 일본 선교사로 있는 저희 교황청 외방전교원의 동료신부님은 당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일본사람들은 큰 가치를 추구합니다. 이들은 매일 자살, 청년범죄, 가족파탄, 경제위기 등과 같은 고통스런 문제에 직면합니다. 이런 현실들로 인해 예전에는 확실했던 가치들이 파괴되고, 사람들은 더 지속적이고 중요한 가치를 갈구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진정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시복식은 진실한 삶에 대한 이런 열망에 답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1]

 

 

두 가지 종류의 순교

 

모든 크리스찬들이 순교로 불린 것은 아닙니다. 신학자인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은 두 가지 종류의 순교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 모든 것을 위해 한 번에 피를 흘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들의 신앙을 매일의 삶에서 증거하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면서, “한 방울 한 방울씩” 피를 봉헌하는 이들입니다. 이 두 번째 형태의 순교도 교회와 사회를 위한 축복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지난 8월 11에 하셨던 교리를 통해 순교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 아버지와 인류를 위한 전적인 사랑의 길로 따르라”고 한 초대에 기반을 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하느님을 향한 전적인 사랑을 표현하는데, 이는 그의 자유를 풍요롭게 하고 현양합니다 : “순교자는 최고로 자유로운 사람이며, 권력과 세상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베네딕토 16세께서는 물론 모든 이들이 순교로 불린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그러나, 우리 중 그 누구도 크리스찬으로서 지존하게 살아야 하며, 성덕을 향한 거룩한 부르심에서는 제외되지 않았는데, 이는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함을 의미한다”고 하셨습니다. 결론으로 “모든 이들이, 특히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만연하는 이 시대에는 매일 하느님과 형제를 향한 더 큰 사랑을 지님으로써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더불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최우선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임무로 생각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의 자유

 

크리스찬들과 믿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 아시아에는 아직도 확립되지 않은 인간의 권리와 종교의 자유가 필요합니다.

 

종교의 자유는 - UN에서도 말하듯이 ? 신앙생활을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같은 종교 신자들과 모이고, 여행하고, 지도자로부터 가르침 받을 수 있는 자유; 자신이 추구하는 진리에 따라 종교를 바꿀 수 있는 자유이다. 종교의 자유는 다른 권리에 달려있는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인간권리의 요약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께서 늘 확언하신 것처럼, 종교의 자유는 모든 권리[2]의근본이고, 그 사회가 진정 자유를 보장하는지 확인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3]와 같은 것입니다.

 

종교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것은 또한 한 그룹의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의 자유는 자신이 신앙을 갖게 된 동기를 공적으로 표현하거나 고백할 수 있는 자유(양심의 자유); 발언이나, 기고, 영상 또는 다른 대중매체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자유(언론의 자유); 국내와 국외에 있는 자신의 종교공동체 회원을 만날 수 있는 자유(집회의 자유)입니다.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시민 각자의 표현, 언론, 출판, 홍보, 집회, 활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데서 발생합니다.

 

 

아시아, 종교의 자유가 탄압받는 대륙

 

아시아 대륙은 이제 국제정치와 경제의 주역이 되었지만, 아직도 종교자유에 있어 많은 불균형과 탄압이 있습니다. 2008년 “고통받는 교회를 위한 도움”에서 “세계의 종교자유에 관한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아시아뉴스는 얼마 전부터 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아시아 부서에서 협력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는 아시아가 전반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탄압받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3개국에 관한 한 목록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심각하게 탄압받고 있다”고 나오며, 이는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 중국, 부탄, 미얀마, 라오스, 북한 등10개국입니다. 이와 더불어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와 수단, 쿠바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 아시아의 다른 15개국이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으며, 다른 대륙의 9개국도 이런 상황입니다.

 

탄압의 형태는 매우 다양합니다 :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전면적인” 이슬람국가임을 선언하면서, 무슬림이 아닌 다른 신앙의 모든 공식적인 표현 예를들면, 성경소지, 십자가, 로사리오를 갖고 다니는 것, 부처의 장식, 공적으로 기도하는 것, 만남의 장소를 갖는 것을 계속 금지하고 있습니다; 부탄에서는 불교신자가 아닌 선교사들은 입국이 금지되고; 불교외의 종교적 건물의 건설은 허가되지 않거나 제한됩니다; 심지어 모든 시민들, 특히 불교신자들은 공공기관이나, 법당, 학교 공식적인 행사때 느가롭(Ngalop) 종족의 의상을 입어야만 합니다.

 

종교의 탄압은 미얀마에서 있었던 불교승려들의 학살에서부터 종교생활이 금지되고 수십년 전에 모든 사제와 수도자가 처형되어 계속해서 단 한 명의 사제나 수도자도 없는 북한까지 이릅니다.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소수 크리스찬들의 증언에 의하면, 한반도가 분단된 직후, 북한에서는 삼십만명의 크리스찬들이 학살당했다고 합니다.

 

불행히 인도에서도 작년 유명한 오리사의 반크리스찬 힌두과격단체에 의해 탄압이 있었고, 중국에서는 사제들과 목사들을 감옥에 가두며, 정책적으로 교회와 티벳 불교신자들, 위구르족 무슬림들을 억압하고, 관광천국인 말디브에서는 무슬림들에게만 입법, 행정, 사법의 직업이 허용되고, 정부는 샤리아를 적용하며, 다른 종교의 공식적인 행사는 모두 금지됩니다.

 

현재, 아시아의 52개국 중, 적어도 32개국은 어떤 면에서 종교활동이 제한되고; 이슬람국가(중동에서 파키스탄, 인도네시아에서 말레이시아까지)에서는 이슬람 외에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소수 이슬람그룹도 탄압하고 어려움을 가합니다. 파키스탄에서 종종 수니티가쉬티나 소수 아하마디에 대항하여 폭력이 발생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인도와 스리랑카도 더욱 더 법으로 개종을 막으려고 합니다.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도 종교의 자유를 제한합니다 : 여호와 증인들, 개신교, 심지어는 그 나라에서 인정되지 않는 무슬림들을 어떻게 다루는지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중국, 라오스, 베트남, 북한과 같은 공산국가들은 가톨릭교회, 국내개신교회, 불교, 모든 종교들을 억누르고 박해하기까지 합니다.

 

 

학교와 발전의 탄압

 

종교자유의 탄압은 우선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는 한 나라의 사회와 국가의 경제, 사회발전에도 해당됩니다.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탄압하는 사람은 그 백성을 저개발의 상황에 처하게 합니다.

 

2008-2009년 오리사에서 반크리스찬 힌두과격단체는 “크리스찬들을 죽이자; 그들의 기관을 파괴하자”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없애기 위해 개인들을 억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병원, 사회센터 특히 학교 등의 기관들을 파괴하려 합니다.

 

중국, 홍콩, 인도네시아 (심지어 모루케의 대학까지), 네팔, 인도, 파키스탄 등에는 학교를 없애거나 (또는 그들의 입을 막는 것이) 이미 박해의 한 추세가 되었습니다. 이 경우에는 한 공동체가 혹시 수업을 통해 젊은 세대에게 그들의 신앙을 전할까봐 그들의 입을 막는 것뿐만 아니라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가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학교에 맞서 싸우는 힌두교인들은 인도의 하층민들을 부릴 수 있는 노예로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군대와 연결된 무슬림들은 암본의 대학에 불을 지르며 크리스찬들이 교육을 받지 못해, 직장을 찾지 못하게 하고, 모루케인들이 정치적으로 외국의 지배를 받길 바랍니다.

 

중국 정부는 사립학교의 설립을 허가했지만, 종교과목을 폐지했습니다. 다른 학교들은 기술, 직업, 생산 등을 가르치지만, 자유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독재정권은 항상 대담자가 아니라 노예를 찾습니다.

 

홍콩에서는 가톨릭학교들이 모든 이로부터 가장 근대화되고 깊이 있으며, 잘 가르치는 곳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이징에서는 이들을 폐교하거나 검열하기 위해 모든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난 달 북이라크에서 50명의 크리스찬 젊은이들이 탄 버스가 테러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4] 학생들은 “끊임없는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버스로 모술대학에 가던 중이었습니다.”라고 함 다이냐의 시장, 니산 카로우미는 말했습니다. 과격 이슬람 그룹들은 5년 전부터 젊은이들의 회개를 위해 대학들을 겨냥하여 투쟁하고 있습니다. 대학가에서는 자주 “베일을 입지 않는 이라크 여성들을 죽이겠다”는 전단지가 돌고 있고, 누구든지“서양식” 옷을 입은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이라크에서 이루어지는 크리스찬에 대한 박해는 이라크의 지적 능력을 없애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수니티와쉬티들은 지성인, 대학교수, 물리학자, 엔지니어, 언론인 등 소위 온건 무슬림들이 다른 문화와 대화를 시작함으로써, 근본 이슬람의 순수성을 오염시킨다는 생각으로 이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라크에서 일어나는 지성인, 과학자들의 납치, 살인은 이 나라를 빈곤하게 만들고 전쟁이나 불안정보다 더 심각한 저발전을 겪게 합니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과 같은 무슬림 국가정부들은 다른 종교에 기회를 주고 교육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신 코란에 의거한 근본주의자들의 학교를 지원하면서, 미래의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을 형성합니다.

 

결론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은 사회파괴의 근본이 됩니다. 무슬림 국가들에는 근본주의가 성장할 것이고, 무신론 국가들에는 종교자유의 부재로 사회적 분쟁이 더욱 심각해 질 것입니다. 종교적 차원에서 인간의 위엄이 보장되지 않고 사회적 연대감이 없다면, 기술의 발전은 불의와 분열, 분쟁을 야기할 것입니다. 중국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중국 보안국의 통계에 의하면, 작년에 십만 명 이상의 “집단사고”가 발생했는데, 이는 경찰 또는 군인들과 시민들이 충돌하여 생긴 양쪽 모두의 사상자들의 숫자입니다.

 

 

경제발전과 종교의 자유

 

중국, 인도, 말디브, 베트남에 비록 종교의 자유가 억압되었다 하더라도 이들은 이미 매우 발전한 나라들이라 반론할 수 있습니다. 사실, 종교의 탄압은 그 사회가 발전하는 만큼 “인간의 도덕”이 위기에 처하는 심각한 불균형의 징표입니다.

 

이를 분석해 본다면, 예를 들어 이런 발전을 위해 중국이 치른 희생은 : 광산에서 죽은 이들; 실직자들, 퇴직금 없이 퇴직한 이들, 보건과 교육의 혜택이 없는 가정, 노예처럼 일하는 이주민들, 절망하고 자살하는 젊은이들; 사형; 부패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에 덧붙여 인간과 자연, 하느님에 대한 존중 없이, 비종교적으로 과격하게 진행된 발전으로 생긴 엄청난 환경학적 농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중국의 강과 호수의 90% 이상이 오염되었고, 3천 2백만 명의 농부들에게 식수원이 없는 것 외에도 약 19만 명이 오염된 물을 마시고 이를 농경수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병과 암을 앓고 있습니다. 정부의 한 전문가에 의하면, 오염으로 생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 생산품 총수익의 8~13%에 달하는 비용이 든다고 합니다.[5] 마오쩌둥의 자랑거리였던 문맹퇴치도 이제는 사치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농부들의 자녀 중 적어도 80%가 절망한 이주민으로서 도시에 가서 일하기 위해 의무교육을 중단하고 있습니다. 알려진 것처럼 무질서하고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인해 후난, 광둥, 해난, 하북, 저장, 합서에서는 수십 명의 사상자와 구속되는 이들이 생기며 눈사태와 같이 항거가 증가되고 있습니다. 공산당국에 의하면, 불균형적인 발전으로 인해 생긴 사회부정의는 중국의 안정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된다고 합니다.

 

베트남의 상황도 의미심장합니다. 이곳의 종교박해는 소위 몬타냐즈(Montagnards)라 불리는 소수민족의 차별, 또는 그들을 제거하려는 시도와 관련됩니다. 이들은 산속의 부족으로 그들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권리(교육, 보건, 도로, 땅, 건물)도 없습니다. 베트남이 산업을 발전시키고, 부를 축적하려고 할수록 집과 교회, 땅들은 당의 이름이나 몇몇 지도자들의 개인 소유로 징집되어 후에 부동산 시장에서 다시 매매됩니다. 여기에는 이 나라의 훌륭한 자연과 생산력에 그들의 생산고리를 연결하면서, 베트남에 투자하고 있는 서구기업들이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불균형과 부정의는 종교의 자유가 부족하고 사회에서 종교적 요소를 없애려는 것 때문에 생깁니다. 여기, 교황 베네딕토 16께서 최근 발표하신 회칙, 진리 안의 사랑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참다운 발전을 보장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많은 나라에서 종교무차별주의나 실천적 무신론을 의도적으로 촉진하는 것 역시 정신적인 자원을 앗아가 민족들의 발전에 필요한 것을 방해합니다.” 또한, “국가가 실천적 무신론을 조장하고 가르치거나 실제로 강요한다면 이는 국민들이 온전한 인간발전을 이루는데 필수적인 도덕적 정신적 힘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이는 인간이 하느님 사랑에 더욱 관대한 인간적 응답을 하기 위해 새로운 활력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종교의 자유가 없다면 많은 아시아 국가들의 “초발전”은 “참다운 발전”을 해치는“도덕적 저개발”로 인해 비탄에 빠질 것입니다.[6]

 

 

결론

 

종교의 자유에 대한 탄압은 항상 더욱 권력 때문에, 그리고, 인간발전과 사회성을 무시하는 것에 기인한다고 확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다른 종교공동체를 말살하려는 광적인 근본주의의 동기들이 여러 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교와 같은 종교를 거부한다거나, 과거 식민지 상황과 관련된 것,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여기며 없애려고 했던 막시즘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종교에 대항한 투쟁은 권력과 당의 소수 독재정치를 유지하기 위한 자유에 대항한 투쟁임이 분명합니다.

 

인도에서의 박해도 강한 힌두교 획일화에 의한 것이지만, 이는 정당의 이익이 개입되었고, 토지 소유자들이 달리트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그들 삶에서 새로운 경제적, 사회적 해방이 열리는 것을 막고, 부족민들을 계속 노예처럼 부리기 위한 것에 기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를 입막는 것은 인간 위엄의 발전과 언론의 자유와 부패에 대항하여 정의를 외치는 목소리들을 봉쇄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자유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권력은 그들의 독재와 이익을 보전하기 위해 폐쇄적이고, 제한되며, 경제발전 없는 나라들이 되려고 합니다.

 

또한 세계 다른 나라 정부들도 점점 더 종교의 자유에 관한 문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화를 통해 시민사회는 더욱 견고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인해 정부들은 더욱 경제에 좌지우지됩니다. 저는 지금과 같은 전세계적인 퇴보로 인해 이런 무관심이 더욱 깊어질 것 같아 두렵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저런 상황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조사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지지하고, 연대감을 표하는 사회가 있습니다. 이런 관계와 교류는 무관심과 흉악한 상업주의를 거슬러가는 사조를 형성하며, 이는 세상을 위한 희망의 씨앗이 됩니다.

 

베네딕토 16세께서 중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풍부히 인용되었던 그분의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의 말씀을 인용하며 마치겠습니다. 교황님의 말씀은 아시아인, 유럽인, 동양인, 서양인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교회는 가장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고자 정치 투쟁을 할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국가를 대신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이성적인 토론의 길로 그러한 투쟁에 들어서야 하며, 그 정신적인 힘을 다시 일깨워야 합니다. 그러한 힘이 없으면, 언제나 희생을 요구하는 정의는 구현될 수도 없고 진보할 수도 없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교회가 아닌 정치를 통해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공동선의 요구에 마음을 열고 의지를 불러일으키도록, 교회는 정의 증진을 위한 활동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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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Asia News.it, 2008년 11월 24일, ‘일본인들의 하느님에 대한 목마름을 채워주는 188명의 순교자들’ 

[2] 참조, 베네딕토 16세, 교황청 대사로 임명된 외교관들에게 한 연설, 2008년 1월 7일, n.11: “종교의 자유는 양도할 수 없는 각 사람의 권리이고, 인권의 초석입지만, 자주 타협의 대상이 됩니다. 사실 이 권리를 온전히 행사할 수 없는 곳이 많습니다. 교황청은 이 권리를 방어하고 모두가 이를 존중하길 촉구합니다. 교황청은 크리스찬들이나 다른 종교인들에 대한 차별에 대해 우려하는 바입니다.”. 

[3] 요한 바오로 2세, OSCE 국회 참석자들에게 한 연설, 2003년 10월 10일, n.1

[4] AsiaNuews.it, 2010년 5월 3일, 모술 근처에서 크리스찬 학생들이 탄 버스의 폭발.

[5] AsiaNews.it, 2007년 3월 14일, 식수 없이 한달 째 지내고 있는 의흥시의 8만명의 농부들. 

[6] 참조, 진리 안의 사랑, n.29

[7]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n.28; 편지 …, 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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