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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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수리치골, 둠벙이, 진밭, 황모실: 감추어진 공소, 본당의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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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206

수리치골, 둠벙이, 진밭, 황모실 - 감추어진 공소·본당의 중심지

 

 

한국 천주교회는 초기부터 성모 신심이 유달리 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심은 1835년 말 이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특히 제2대 조선교구장 성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1838년 12월 1일에 조선교구의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모시게 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를 허락하여 1841년 8월 22일에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聖母無染始孕母胎)를 주보로 정해 주었다.

 

사실 프랑스 선교사들은 박해 가운데서도 조선 교회가 유지되어 나가고 자신들이 계속 이땅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을 성모님의 은덕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감사하기 위하여 성 다블뤼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은 1846년 11월 2일 공주 '수리치골'(신풍면 봉갑리)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립하고, 박해받는 조선 교회를 보호해 달라고 전구하게 되었다. 이 회의 설립 동기와 과정에 대하여 교회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선교사들은 성모 마리아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 파리 '승리의 성모 성당'에 본부를 둔 '성모 성심회'를 조선에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이 게획을 실천에 옮기는 데 적합한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당시 그들에게는 경당(經堂)이 없었으므로 많은 신자들이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결국 그들은 외딴 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한 신입 교우 가족이 사는 조그마한 오막살이를 골라 잡았다. 여기에서 그들은 1846년 11월 2일에 성모 마리아와 새로운 결합을 튼튼히 하는 것을 기뻐하는 몇몇 신자들 앞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설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하, 136-137면).

 

위의 기록을 볼 때 수리치골은 당시 교우촌이 아니라 단지 한 신입 교우 가족만이 사는 외딴 곳이었다. 그런데 다블뤼 신부와 선교사들이 이 곳을 방문하여 성모 성심회를 설립함으로써 자연 인근의 신앙 중심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선교사들은 "주일마다 신자 몇 명이 이 곳에 와서 하느님의 어머니 성화 앞에서 몇 가지 기도문을 외우기로 결정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이후 신자들은 이 곳에 모여 조선말로 기도문을 외우면서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고 죄인들의 회개를 빌게 되었다.

 

수리치골은 공주 - 유구 간 국도의 중간 지점에서 서쪽으로 한참을 들어가야만 하며, 국사봉을 뒤로하고 있는 막다른 골짜기의 궁벽한 곳이다. 옛 수리치골 교우촌은 미리내 '성모 성심 수도회'가 1984년에 정식 인가를 받은 뒤 오랜 답사 끝에 찾아내게 되었다. 그런 다음 수도회에서는 이 곳에 '성모 성심 수도회 분원'을 건립하였다. 한편 국사봉 너머 북쪽으로는 또 하나의 유서 깊은 교우촌 '둠벙이'(공주군 신하면 조평리)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수리치골에서 직접 갈 수가 없고, 유구 쪽에서 들어가야만 한다.

 

성모 성심회를 창립할 무렵에 다블뤼 신부는 주로 둠벙이를 거처로 삼고 있었는데, 1854년에는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심한 뇌염에 걸린 쟝수(Jansou, 楊) 신부가 이 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쟝수 신부는 결국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1854년 6월 18일 둠벙이에서 선종하여 그 곳에 안장되었다. 또 그 무렵에는 '진밭' 교우촌(공주군 사곡면 신영리)도 공소로 설정되어 있었다.

 

1861년 이래 둠벙이에 새로 입국한 죠안느(Joanne, 吳) 신부가 거처하면서 이 곳은 본당 중심지의 하나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그 또한 병으로 1863년 4월 13일 둠벙이 교우촌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때마침 진밭에 거처하던 리델 신부는 그에게 성사를 주고 난 뒤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였다.

 

부활 축일 전날 죠안느 신부가 너무나 쇠약해져 있었으므로 종부 성사를 주고 그와 함께 밤을 지냈습니다. 그 동안 그는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입술에서는 자주 화살 기도와 천주께 대한 열렬한 갈망의 말이 새어 나왔습니다. … 4월 13일 월요일 정오쯤에 그는 두 번 하늘을 향해 눈과 팔을 올리고 미소짓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저녁 7시 반에 조용히, 그리고 아무런 동요 없이 그의 아름다운 영혼을 천주께 바쳤습니다(리델 신부의 1863년 9월 9일자 서한).

 

31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한 죠안느 신부의 시신을 신자들은 둠벙이 마을의 동족 골짜기에 안장하였다. 그의 무덤은 지금까지 그 곳 산 중턱에 남아 있는데, 이름없는 교우촌 신자들의 무덤 몇 기가 그 아래에 함께 조성되어 있다.

 

이 둠벙이 교우촌과 같이 훗날 공소와 본당으로 승격되고, 그 곳에 거처하던 선교사 2명이 선종한 또 하나의 교우촌이 있었다. 지금은 비록 신앙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합덕에서 덕산 쪽으로 가다 보면 왼쪽에 위치한 한적한 농촌 마을 '황모실'(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이 그 곳이다. 이곳에서는 1858년에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1863년에 랑드르(Landre, 洪) 신부가 선종하여 뒷산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그러나 1970년 4월 30일 두 선교사의 유해가 합덕 성당 경내로 이장되면서 황모실은 기록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사적지가 되었다.

 

[사목, 1999년 9월호, pp.119-121, 차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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