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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한티와 신나무골에 남은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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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213

한티와 신나무골에 남은 신앙

 

 

을해박해와 정해박해로 흩어지게 된 경상도 북부의 교우촌 신자들은 저마다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나서야만 했다. 북부의 상주와 문경은 물론 남부의 양산, 울산, 밀양 등에 있는 산간 지대가 바로 그들이 찾은 새로운 은거지였다. 칠곡의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도 이 무렵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혜의 은거지로 손꼽히는 '한티'(칠곡군 동명면 득명동)는 대구에서 5번 국도를 따라 군위로 향하다가 시군 경계를 벗어나자마자 우회전하여 동명 저수지를 안고 돈 다음 11km 정도를 올라가면 나온다. 북서쪽으로는 가산(해발 901m)을, 남동쪽으로는 팔공산(해발 1193m) 자락을 안고 있는 이 곳은 그야말로 내지의 요새로, 박해자와 밀고자들의 추적을 따돌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교우들은 1850년대 이후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순방을 받게 되면서 다시 신앙의 활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티의 교우들은 1860년에 불어 닥친 경신박해로 다시 한 번 혼쭐이 난 뒤에야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 경상도 지역의 사목을 맡게 된 성 다블뤼 주교는 1862년 교구장인 성 베르뇌 주교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 있는데, 이 곳에서는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습니다."("한국 천주 교회사" 하, 340면)라고 적고 있다. 바로 한티 교우촌을 지칭한 것이다.

 

같은 칠곡군에 있으면서도 '신나무골'(지천면 연화동)은 한티에 비해 찾기 쉬운 곳에 있다. 왜관에서 4번 국도를 따라 5km 남짓 대구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기 때문이다. 이 곳에 새 터전을 잡은 교우들은 박해가 있을 때마다 한티 쪽으로 피신을 갔는데, 경신박해 때는 칠곡에 거주하던 이선이(엘리사벳) 가족이 신나무골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티로 피신하던 중에 체포되어 아들 배도령(스테파노)과 함께 포졸들이 가져온 농가의 작두날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 때 배교하고 살아남은 엘리사벳의 남편은 뼈저리는 아픔 속에서도 모자의 시신을 이 곳에 묻었다가 훗날 부인의 시체만을 찾아내 선산이 있는 칠곡 안양동으로 이장하였다.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에 은거해 살던 신자들은 병인박해로 다시 한 번 수난을 겪게 되었다. 그 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이 곳은 대구 본당 설립의 전초 기지가 되었으며, 경상도의 첫 담임 신부로 임명된 로베르 신부에게 첫 본당 중심지로 설정되었다. 이러한 의미를 기리기 위해 왜관 지역에서는 1973년부터 이 곳을 사적지로 개발하기 시작하여 1977년에 선교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1984년에는 왜관 성 베네딕토 수도회의 주선으로 칠곡에 있던 이선이(엘리사벳)의 무덤을 옮겨 와 안장하였다. 한편 한티에는 그 후 유명·무명 순교자들의 묘역이 조성되고, 1983년에는 피정의 집이 세워지면서 새로운 신앙의 안식처가 되었다.

 

[사목, 2000년 1월호, pp.90-91, 차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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