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수영 장대와 오륜대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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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15

수영 장대와 오륜대 기념관

 

 

울산 장대에서 휘광이가 칼춤을 출 무렵 '수영 장대'(부산시 남구 광안 4동)에서도 10명의 교우가 천상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들은 동래 지방 출신으로 그 지역에서는 일찍이 최양업 신부의 순방으로 공소가 치러졌으며, 최 신부가 선종한 뒤에는 성 다블뤼 주교가 이 곳의 신앙 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현재 수영 사적지는 광안 성당의 서쪽, 수영 중학교 뒤편에 조성되어 있다.

 

박해자들의 눈초리를 피하기는 아주 어려웠다. 간월 산중의 범바위굴도 찾아낸 그들이었다. 그러므로 박해가 진행되는 동안 동래의 회장 이정식(요한)은 교우들에게 티를 내지 않도록 당부하고는 위험을 피해 가족들과 함께 기장과 울산 등지로 피신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동래 포졸들은 갑자기 없어진 사람들에게 의심을 품고 그들의 종적을 찾는데 혈안이 되었고, 마침내는 울산에서 이 회장을 비롯하여 아들인 이관복(프란치스코), 박주아(마리아) 부부, 조카 이근삼(베드로) 등 일가족 4명과 교우 이월주, 차장득(프란치스코), 옥소사(바르바라)를 찾아내고 말았다. 이에 앞서 동래에서는 양재현(마르티노)이 체포되었다.

 

울산에서 체포된 7명은 곧 동래 부사의 관아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고 47일 동안 감옥 생활을 해야만 했다. 특히 양 마르티노는 먼저 동래 부사와 수사 앞에서 형벌을 받고 다시 통영 우수영으로 이송되어 형벌을 받은 후 동래 옥으로 와서 이 요한 회장을 만나게 되었다. 통영으로 이송되기 전에 마르티노는 옥사장의 꼬임에 빠져 돈 300냥을 주고 석방되었다가 다시 체포되었는데, 이 때 가족들에게 "너희도 나를 따라 함께 가자. 천주께서 부르시니 영복을 받으러 가자." 하고 권면했다 한다.

 

1868년 8월 4일(양력 9월 20일), 동래 옥에 갇혀 있던 증거자 8명은 마침내 참수형 판결을 받고 수영 장대로 끌려 나가 영화로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가운데 이 요한 회장의 가족 4명의 시신은 친척들에게 거두어져 부산 가르멜 수녀원 뒷산(동래구 명장동 산 96번지)에 묻혔다가 1977년 9월 17일에는 '오륜대 순교 복자 기념관'(금정구 부곡 3동) 구역내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이 때 나머지 4명의 순교자는 시신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기념비만을 건립하였다.

 

오륜대는 다섯 노인이 지팡이를 꽂고 놀았다는 데서 유래된 지역 이름으로,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에서 이 곳에 분원을 설립한 것은 1968년이고, 기념관과 성당을 완공한 것은 1982년이다. 이 곳을 순례하려는 사람들은 경부 고속도로 부산 끝 지점에서 금정 구청을 지나 좌회전하여 1km 정도 가면 된다. 오륜대의 기념관에는 순교자 묘역뿐만 아니라 한국의 순교사를 이해할 수 있는 형구들과 갖가지 사료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너 그 도를 버리지 못할까, 죽어도 버리지 못하겠다."라는 순교자들의 마지막 외침을 적은 작은 기념비가 눈길을 끈다.

 

[사목, 2000년 1월호, pp.93-94, 차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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