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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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제주 대정 성지: 유배지에서 부른 신앙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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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17

제주 대정 성지 - 유배지에서 부른 신앙의 노래

 

 

천주교 신앙이 가장 늦게 전파된 한반도의 남쪽 섬 제주 당에는 남과 북에 하나씩 사적지가 자리잡고 있다. 정난주(마리아)의 무덤이 있는 '대정 성지'(남제주군 대정읍 보성동)와 제주의 '황사평'(제주시 봉문동)이 그곳이다. 이제서야 버젓한 사적지로 조성되어 순례객들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그 동안 방치되어 오다시피 하여 제주의 신자들조차도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할 정도였다. 이 사적지들은 제주 복음 전래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제주의 신자들이 한마음으로 노력하여 일군 탓에 더욱더 신자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잡게 되었다.

 

정난주(마리아)는 이미 여러 차례 설명한 순교자 황사영(알렉시오)의 부인으로, 양근 땅 마재의 유명한 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계상으로 마리아는 순교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조카며 정하상(바오로) 성인의 누님이 된다. 18세가 되던 1790년 무렵 16세의 황사영과 혼인을 한 마리아는 서울 아현의 시집에서 생활하였다. 바로 그 해 진사시에 합격한 황사영은 이승훈, 정약종 등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과거를 포기하교 교회 일을 도왔으며, 마리아는 이러한 남편을 도와 아현의 집을 신앙 공동체로 가꾸는 데 노력하였다.

 

마리아는 혼인 초기에 자주 자식을 잃은 것 같다. 그러다가 1800년에 아들 경한(景漢)을 낳게 되었으나, 이듬해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모든 가족이 수난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황사영이 교회 재건을 위해 제천 배론으로 몸을 숨긴 뒤, 1801년 2월 10일경 아현의 가족들은 모두 체포되어 갖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 때 마리아는 특히 어린 경한이를 옥에서 키워야 했으므로 육정에서 오는 또 다른 고통까지 감내해야만 하였다.

 

7개월 후, 황사영은 배론에서 체포되어 11월 5일(양력 12월 10일)에 능지처사의 판결을 받았다. 이어 11월 7일에는 마리아와 남은 가족들에게도 연좌죄가 적용되어 유배형이 내려졌으며, 시어머니 이윤혜는 경상도 거제부로, 마리아는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유배되었다. 다행히도 어린 경한은 두 살이었던 까닭에 역적의 아들에게 적용되는 형률을 받지 않고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의 노비로 유배되었다. 이들이 서울을 떠나 유배지로 향한 것은 11월 8일이었다.

 

마리아와 어린 경한의 유배지인 제주도와 추자도는 조선의 유배지 중에서도 서울 한양에서 가장 먼 곳이다. 이름하여 유배 3천 리. 훗날의 전승에 따르면, '마리아는 유배형을 받은 뒤부터 어린 경한이만은 일생을 노비로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사공과 나졸들을 구슬렀다고 한다.

 

제주도를 향해 오던 중 마리아는 추자도 가까이 왔을 때 배사공에게 패물을 주면서 애원하여 경헌이만을 살릴 생각으로 '경한이는 죽어서 수장했다'고 조정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패물을 받은 사공들은 나졸들에게 술을 먹여 허락을 받고 추자도에 이르렀을 때 추자도 예초리(禮草里) 서남단 물산리 언덕빼기에 어린 경헌이를 내려놓았으니, 마리아의 애간장이 얼마나 탔는지 기절까지 했다고 한다. 추자도에 내려오는 전승을 보면 "어린애 울음소리를 듣고 소를 뜯기던 부인이 가 보니 아기가 있어서 집으로 데려와 저고리 동정에 무엇인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펼쳐 보니, 여기에는 부모 이름과 아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후 아기를 그 집에서 기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그 곳에 사는 뱃사공 오 씨(吳氏)였다."고 한다. 이후 추자도 오 씨 집안에서는 황 씨를 기른 인연으로 해서 오늘까지도 황 씨와는 혼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초리 산 위에 가면 경헌이의 묘가 있다(김병준, <항사영 처자의 피난길>, "교회와 역사" 제25호, 1977. 10.).

 

박해가 끝난 뒤 마리아와 아들 경한은 오랫동안 잊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09년에 제주 본당의 2대 주임 라크루(Lacrouts, 具) 신부가 전교를 위해 추자도를 왕래하던 중에 황경한의 손자를 만나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라크루 신부는 곧 파리의 샤르즈뵈프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순교자 황사영의 아들 겨한과 그 후손들의 비참한 생활을 알렸고, 샤르즈뵈프 신부는 이를 전교 잡지에 소개하였다. 그 후 라크루 신부는 프랑스 은인들의 후원금으로 경한의 손자에게 집과 농토를 사 줄 수 있었다.

 

한편 제주에 도착한 마리아는 그 곳에서 대정군으로 배소가 결정되었고, 관비(官婢)의 쓰라린 유배 생활을 시작하였다. 다행한 것은 관비를 담당하던 관리 김씨 집안에서 마리아의 성품을 높이 사서 어린 아들을 맡긴 일이었다. 마리아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집안의 배려로 점차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명색이 관비의 몸이었으므로 아들을 만나러 추자도로 갈 수는 없었다. 그 후 김씨 집안에서는 마리아를 '한양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양모와 같이 봉양하였으며, 1838년 2월 마리아가 사망하자 추자도의 증손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그 서한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마리아는 유배된 후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비밀리에 기도 생활을 하였다. 김씨 집안에서는 마리아가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누구도 이를 막지는 않았다. 그의 일상 기도는 30여 년 동안 유배지에서 외롭게 불린 신앙의 노래였다. 마리아는 이처럼 어린 아들을 추자도에 떼어놓았던 생이별의 아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였다.

 

마리아의 무덤은 김씨 집안 사람들이 모슬봉 북쪽에 있는 속칭 한굴밭에 조성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13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초, 교회사가 김구정과 김병준 신부는 수소문 끝에 그 무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김씨 집안에서 대를 이어가며 무덤을 돌보아 왔기 때문이다. 이 무덤은 1977년에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되었다가 1994년 제주 신자들의 염원을 담은 '대정 성지'로 조성되었다. 이제 제주의 신자들은 마리아를 '백색(白色) 순교자'로 공경해 오고 있다.

 

[사목, 2000년 3월호, pp.74-76, 차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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