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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31: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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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29 ㅣ No.742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31)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 ⑪


그리스도의 십자가 통해 유다 민족 구원 확신



1933년 42세 때 에디트 슈타인이 입회한 쾰른 가르멜 수녀원 전경.


가르멜 수녀원을 선택하게 된 동기

유다인들에 대한 나치 정권의 무자비한 박해에 직면해서 에디트는 이 모든 부조리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개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그는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뮌스터에 살았던 에디트는 기도하기 위해 그곳에 있는 성 루드비히 성당을 자주 들르곤 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했습니다. 에디트는 기도하는 가운데 이 처참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몸소 지고 가고자 했습니다. 그는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서 유다 민족이 구원될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에디트는 가르멜 수도회 안에서 이 십자가를 지겠다는 결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이 시점에 이르러 가르멜 수녀가 되겠다는 원의가 확고해진 것입니다. 에디트는 가르멜 수녀원에서 자기 민족을 위해 그리고 자신과 자기 민족을 박해했던 원수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이 총체적인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에디트가 세례를 받고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고자 했을 당시, 고해신부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입회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에디트는 더 이상 학자로서 공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에디트 입장에서 그간 수녀원 입회를 주저했던 데에는 어머니와의 관계가 단절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디트는 이 상황에서는 가르멜 수녀로서 독일에 머무는 것이 어머니를 떠나 외국으로 가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성녀의 어머니는 가르멜을 선택한 에디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르멜 성소에 대한 선택은 에디트 자신이나 어머니 모두에게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십자가 선택함으로써 희망을 살다

무엇보다 에디트는 가르멜 성소를 받아들이는 것을 고통 중에 있는 자기 민족을 위해 그리고 전쟁 중에 있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오래전 에디트는 동료 라이나흐의 죽음과 이를 굳은 신앙 속에 받아들인 유가족의 태도 속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아들은 바 있습니다. 이제 이 시점에서 에디트는 보다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선택하고 이를 살아내기 위해 가르멜을 선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에게서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이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향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새롭게 이루신다는 데 대한 희망의 징표였습니다. 그래서 에디트는 십자가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기 위해 가르멜에 입회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동기는 에디트가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해서 수녀로 살게 되는 그 이후의 삶을 이해하게 해주는 키워드였습니다.


쾰른 가르멜 수녀원으로의 입회

이렇게 해서 에디트는 1933년 10월 14일 독일 북서부에 위치한 쾰른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했습니다. 입회할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로 여러 면에서 볼 때 성숙한 여인으로서 가르멜에 뿌리내리는 데 적합한 때였습니다. 하지만 가르멜 수녀원에서의 삶은 그간 에디트가 살아왔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 이전까지 에디트는 학자로서 국제 학술 분야에서 지명도 있는 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수녀원에 들어간 에디트는 18살 아가씨와 함께 청원 기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간 자신이 가르쳐왔던 여학생과 비슷한 또래의 어린 수녀와 호흡을 맞춰야 했고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봉쇄의 삶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에디트는 주위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가르멜 수녀로서의 삶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르멜 수녀원에서 에디트의 삶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는 것은 그가 예전에 전념해왔던 모든 학문 활동을 포기하는 것이나 진배없었습니다. 그러나 에디트는 이미 입회 전부터 가르멜 영성을 살아왔으며 입회 후에는 가르멜 성소에 전념하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에디트는 입회 후 6개월간 청원기간을 보낸 후 1934년 4월 21일부터 수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에디트는 본격적으로 가르멜의 삶과 영성을 배워나갔습니다.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다

특히 에디트는 자신의 이름에 담겨 있는 영성적 의미를 깊이 있게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에디트 슈타인의 정식 수도명(修道名)은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다’입니다. 여기서 ‘데레사’라는 이름은 에디트의 삶에서 성녀 데레사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베네딕다’라는 이름은 그가 베네딕도 수도회로부터 받은 영적 유산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에디트의 수도명에서 일생을 이렇게 살겠다고 하는 영성적인 의미가 담긴 현의(鉉義)인 ‘십자가’는 그가 속한 유다 민족이 처한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비롯해 그 유다 민족을 위해 자신이 선택한 성소와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이름 ‘데레사’, ‘베네딕다’, ‘십자가’는 세례 받은 이후 줄곧 에디트 안에 깊이 새겨진 실재이자 장차 교회 안에서 에디트의 성소를 완성해 줄 이름이 됩니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29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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