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6일 (일)
(녹) 연중 제11주일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강론자료

부활 3 주일-다해-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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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신부 [gold] 쪽지 캡슐

2001-04-28 ㅣ No.322

부활 제 3 주일 (다해)

 

        사도 5,27-32.40-41    묵시 5,11-14    요한 21,1-19

    2001. 4. 29.

 

주 제 : 우리가 행동하는 사랑의 목적은 무엇일까?

 

하느님을 찬미하는 마음으로 성당에 나오신 여러분,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날씨가 쾌청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날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흔히 몸이 '찌뿌드드하다'는 말을 씁니다.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이웃 사람이 심사(心思)를 불편하게 하면 싸움이라도 한 판 벌릴 수 있는 날입니다. 이렇게 삶이 나른하고 힘들다는 것은 우리가 들여야 할 정성이 많다는 말도 되며, 동시에 조금만 노력해도 삶에서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 후 맞이하는 부활 3 주일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경험한 적이 없는 아주 특별한 사건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선물로 다가올 것은 분명하지만, 그 때가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고 또한 그때를 우리가 환영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다만 신앙을 우리가 인생 끝까지 지킬 수 있다면, 또 우리 삶이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었다면 좋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삶이 좋은 것으로 남을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신앙인의 입장에서 봐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 삶을 신앙인이 아닌 입장에서 바라본다거나, 신앙이 식어버린 차가운 마음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도대체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식어버린 마음이란, 신앙이 더 이상 삶의 변화에 영향을 끼치지 않거나 '노는 날에 할 일도 많은 데 무엇 때문에 성당에는 가야하는지 묻는 사람이며, 주일에 한번쯤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이 노(怒)하시겠어?'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처지에서 할 말은 있겠지만, 그 사정과 핑계를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실 수 있는 것이냐의 판단은 따로 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삶은 '사랑'입니다.  요즘은 유행가에서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기에 그 가치가 하락한 듯한 느낌도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말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다면, 좋은 말이 갖는 삶의 특징은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남길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행동은 무척이나 중요하기에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베드로에게 질문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의 의도는 같습니다만, 조금씩 달라지는 표현 때문에 힘들여 응답하던 베드로는 결국 마음이 슬퍼졌다고 합니다.  

 

사랑을 장담하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에 대한 약속을 함부로 하는 사람 가운데는 허튼 사람이 많은 법입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지난 삶을 잊어버리고 흥분(?)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완벽한 것은 없는 것이고 사람에게 변할 수 없는 다짐은 없는 법인데,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다말고 서글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할 이런 모습은 예수님의 부활, 신앙인도 참여할 수 있는 부활을 선포하는 제자들의 행동에서도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는데 한몫을 했던 대사제'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에 정신 없어서 한 말, '예수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울 작정인가?'라는 항의에 사도들은 오히려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세상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것은 분명히 넋 나간 행동이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의 행동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사도들의 신앙을 이야기하는 저나, 미사에서 제 이야기를 들으시는 여러분은 '나사 풀렸다고 평가된 사도들'의 삶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시각에서는 옳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무리에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삶을 지내는 사람이라면, 두 번째 독서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훗날 하느님을 뵙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한 가장 최선의 방법은 바로 사랑의 실천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처음 부르던 것과 같은 모양(모습)으로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다시 부르십니다. 이것은 삶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일은 우연한 일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소리도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를 찾아오시지만, 그 하느님을 우리가 항상 발견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요한 사도는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족과 이웃들,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는 사랑의 행동이 하느님을 우리 가운데 드러나게 하는 방법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행하는 사랑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잠시 생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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