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4일 (화)
(녹) 연중 제9주간 화요일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강론자료

2011-1113...연중33주일...하느님의 축복에 참여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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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1-11-12 ㅣ No.1114

연중 제 33 주일 (가해)

잠언 31,10-13.19-20.30-31                    1테살로니카 5,1-6             마태 25,14-30

2011. 11. 13. 등촌3

주제 : 하느님의 축복에 참여하려면....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교계제도는 교회의 구성원을 사제와 평신도로 구분합니다. 사제는 교황/주교/사제/부제 등으로 구분하고, 하느님백성인 평신도에 속하는 사람들은 교회공동체에서 담당하는 일에 따라서, 사목위원/단체장/임원/ 그리고 특정한 역할이 없는 다양한 사람들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교계제도를 설명했습니다만, 이런 구별이 신앙인의 삶에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역할을 구별하는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각자의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 충실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순간에 우리가 무엇에 또 왜 충실하게 살아야 하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드릴 가장 좋은 대답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거나 적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 내가 가진 능력이 크다고 생각하거나 작다고 생각할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그 의미에 대한 질문을 듣고 대답하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목적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마태오복음은 하늘나라에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지녀야 할 삶의 자세를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고, 본보기를 설명하시는 비유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을 천천히 읽고 묵상해야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만, 비유내용에 주인으로 등장하는 이 사람은 엉뚱한 데가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사이에 믿어주는 마음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는 합니다만, 복음의 이야기처럼, 주인이라는 사람이 종을 믿어준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특혜입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얼마나 가능할까요? 복음의 표현에 하느님이라는 낱말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묘사하는 비유이니, 우리는 이 주인을 하느님으로 알아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인 앞에서 어떻게 살았던 사람들이기에, 그 종들은 주인의 신뢰를 얻은 사람들이 되었을까요? 요즘에는 탈렌트라는 말의 뜻을 영어를 따라서 사람이 가진 재능이라는 뜻으로 알아듣는 세상이 되었습니다만, 로마시대에는 돈이라는 의미도 있었던 낱말입니다. 한 탈렌트는 요즘으로 계산하면, 일용노동자가 165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날품을 받아서 모아야하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이 금액을 계산하면 얼마가 될까요? 한 달에 150만원이 넘는 금액(1,524,390)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65개월간 모아야 만들 수 있는 금액이 한 탈렌트입니다. 이런 돈을 종들에게 5배나 2배 혹은 그 금액 그대로 맡기고 떠날 수 있었던 주인의 배포는 어떻다고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돈에 대한 씀씀이가 커진 요즘 세상에서, 15억이나 6억 혹은 3억 원은 큰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200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로마시대라고 가정한다면, 주인에게서 그렇게 큰 신뢰를 받았던 종들도 제각각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처음의 두 종은 자신들을 믿어준 주인의 뜻에 맞춰 충실하게 살았지만, 나머지 한 사람이 문제였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의 뜻을 배우고 실천한다는 우리는 복음에 등장하는 3명의 종들 가운데 어떤 사람을 본보기로 삼아야하겠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당연히 세 번째의 종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의 신뢰를 받았으면서도 돈을 땅속에 묻어둔 세 번째 종의 태도가 우리들 안에는 정말로 한 푼어치도 없겠는지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지는 않습니다. 오늘 선했던 사람이 내일은 악한 사람으로 돌변할 수도 있고, 오늘까지는 아주 악했던 사람이 내일은 선한 사람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을 들으면서 범하기 쉬운 잘못은,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더라도 하느님은 우리를 향해서 화를 내지 말아야 하는 분이라고, 또 하느님은 우리를 무조건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입니다. 정말로 그럴 수 있어야 하느님이라고 우리가 공경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느님은 우리가 주장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람으로서, 세상의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 내 뜻대로만 될 일은 어떤 일이 있겠습니까? 내가 하느님이 아니라면, 그래서 나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사람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 하느님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그 하느님은 나에게 무엇을 바라시겠는지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중심에 남자만 있고 여자는 그 존재의 의미가 중요하지 않았던 때에, 오늘 잠언서에 나온 말씀과 같은 뜻이 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잠언서 말씀의 초점은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나 그들 각자가 해야 할 일의 비교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신뢰로 표현되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신앙의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우리에게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인들 가운데에 이렇게 중요한 것을 늘 잊지 않고 사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세상 삶에서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어야 할 일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려고 다가오는 위험한 요소들을 먼저 알아보고 대처할 수 있는 법입니다. 이 지혜를 우리가 어디에서 발견하겠습니까? 우리 삶에 확실한 근거가 되시고, 영원한 삶의 등불이 되실 하느님 안에서만 올바른 자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는 신앙인의 삶이 되도록 오늘, 평신도 사도직을 기억하는 날 특히 정성을 더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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