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인]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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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177

빠도바의 성 안토니오

 

 

1. 성인에 관하여

 

성 안또니오는 성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초대 학자이며 ‘기적의 성인, 빠도바의 성인’이라 불리운다. 안또니오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이라는 곳에서 아버지 말치노, 어머니 데레사로 두 귀족의 집안인 부모 밑에서 1190년 8월 15일 탄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국왕 스테파노 2세의 궁전에서 국왕을 모시는 용감한 기사였고 드높은 기품과 너그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머니 데레사는 경건한 마음과 이지적, 지적이며 상냥한 성격으로 설득력과 교육에 특별한 자질이 있었다. 안또니오는 관례대로 나은지 8일째 성세 성사를 받았는데 이름은 페르란도라고 지었다. 페르란도라는 뜻은 “평화 안에 용기 있는 자”란 뜻이다.

 

페르란도는 대성당 부속학교에 다니다가 16살에는 리스본에 있는 폴로라의 성 빈체시오 수도회로 학교를 옮기었다. 부모의 각별한 사랑과 훌륭한 교사 밑에서 교육을 받은 페로란도는 기사의 아들로서 부족함이 없는 아들이었다. 페르란도는 1210년 5월 어느 날 성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하여 포라 성 빈첸시오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2년을 지내고 꼬임부라에 있는 성 십자가 수도원에서 덕과 학문을 탐구하였고, 1220년에 사제로서 신품 성사를 받았다. 

 

1220년 포르투갈의 친왕 돈 베드로가 모로코에서 전교를 하다가 순교한 프란치스꼬회 수사 5명의 유해를 그가 생활하고 있는 수도원에 안치되는 것을 보았다. 5명의 순교자는 비타르, 오베, 베드로, 아쿠스, 아쿨리 이다. 이 당시 자모이신 성 교회가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터키 제국이 가깝게는 서양에서, 멀리 동양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이교도들이 승전을 거듭해서 같은 그리스도교 국민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 분파와 새로운 학설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페르란도는 이러한 불행을 보고 이교도가 살고 있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암흑의 세계”에서 헤매고 있는 영혼들에게 광명의 불을 켜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런데 페르란도가 소속되어 있던 아우구스티노회는 당시에 이교도 사이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참으로 페르란도는 안타까워했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럴 즈음 움브리아 평야에 둘러싸여 있는 작은 마을에서는 새로운 작은 형제들이라는 프란치스꼬 수사들이 맹렬한 기세로 각지로 번져갔고 자체 방어에 급급했던 것을 뛰어 사라센 사람이나 그밖에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러 다녔다. 페르란도는 이것을 보고 수도원에서 편하게 지내는 것보다 그들처럼 사랑의 실천을 해야한다는 강한 소리를 들으며 고뇌하다가 하느님의 뜻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 사실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며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페르란도는 용기있게 원장에게 자신의 뜻을 알렸다. 보물처럼 아끼던 원장과 아우구스티노회 수사들은 극구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를 끝내 놓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 된다는 생각에 그를 보내주기로 하였다. 정들었던 수사들과 마지막 인사를 할 때 한 노인 수사가 동료들을 대표하여 자! 그럼 부디 성인이 되시오, 이 예언은 훗날 그대로 이루어졌다.

 

페르란도! 그를 부르는 마지막 이름이었고 나이 25세로서 가장 감정이 풍부하고 대담하던 성 아우그스티노회의 수사 신부이던 그는 이제 가난하고 초라한 아씨시의 작은형제들 틈에 끼어 수도복을 입었다. 그리고 당시 귀족들에게만 붙여지는 이름인 페르란도라는 이름을 안토니오로 개명하였다. 그 뒤 이교인이 있는 곳으로 전교 하러 가라는 명령을 고대하면서 정성을 들여 고행과 극기의 수덕에 여념이 없었다. 안토니오는 필리피노라는 수사와 모로코로 전교를 떠나라는 명을 받고 아프리카의 대륙에 도착했는데, 그 동안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않고 극기와 대제를 지켰는데, 거기에 심한 배멀미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중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당시는 신통한 의약품이 없었기에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도저히 임무수행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같이 간 수사가 판단하여 본부에 보고함으로써 즉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포르투갈로 갔다. 그렇게 열망하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을 하게된 안토니오는 모든 것이 주님이 뜻이라는 신앙 안에서 위안을 받으며 배를 탔다. 이 배는 도중에 큰 폭풍을 만나 목적하던 곳으로 가지 못하고 표류하다가 이탈리아의 시실리아 섬에서 정착하여 안토니오는 그곳 메싸니 수도원에서 건강을 찾아 움브리아로 갔다. 

 

뽀르지웅꼴라 총회에서 프란치스꼬 사부의 축복을 받았으며 이것이 사부님과 첫 대면이자 마지막 대면이었다.

 

1222년 봄, 이웃에 있는 포르리의 거리에서 프란치수꼬회 몇 사람과 도미니꼬회 수사들의 서품식에 참석하였다. 강론을 하게 되어있던 신부가 갑자기 참석치 못해 당황하고 있는 것을 본 원장은 안토니오한테 강론을 요청하였다. 복음에 관해서 연구한 적은 있어도 강론은 한번도 해본 경험이 없는 안토니오의 강론은 참으로 겸손하면서도 힘찬 웅변으로 참석자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이것은 뜻하지 않은 발견이니 이 무명의 수사가 이용가치가 풍부한 기막힌 웅변의 소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원장 프라테그라첸은 안토니오가 기도와 극기 속에서 살아가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당시 교회가 절실히 필요했던 인재는 이교들과 투쟁하며 교리를 옹호하고 그들을 회심시키는 것이었다. 이태리 북부 이교도들은 성경 지식에 능란하여 순진한 신자들이 동요와 심한 혼란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무렵에 안토니오를 신학강사로 임명했다는 것은 유효 적절한 것이었다. 이태리 북부 이단자들은 서로 뭉쳐 단체를 조직하여 안토니오의 설교를 듣지 못하도록 길목을 차단하며 갖은 방법으로 방해하였다. 그는 이때에 사람들 앞에서 물고기들에게 설교를 하였는데 수많은 물고기가 모여들어 이상스런 소리를 내기도 하고 입을 벌리고 있는 것도 있었으며 제각기 다른 형태로 주님을 찬미하는 듯 움직였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물론 안토니오의 설교를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던 이단자들까지도 회두하여 처음의 착실한 신자생활로 돌아갔다. 이러한 소식은 꼬리를 물어 멀리 이웃 지방에서도 성인의 설교를 들으려 찾아왔고 이단자들도 이 젊은 설교가의 날카로운 지혜와 이론, 뜨거운 사랑으로 호소하는 부르짖음에 마음이 변하여 가톨릭의 품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많았기에 당시 사람들은 이단자의 쇠망치라는 별명을 주었다. 그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안토니오가 성서에 관해서 지니고 있는 깊은 학식과 지혜에 감탄해 “성서의 감실”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다.

 

1223년에 안토니오는 프랑스 땅에 와서 특히 로와즈 강과 가론강 사이에 있는 지방에서 전교하고 있었다. 이때 슬픈 소식이 모든 프란치스꼬회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 전해졌다. 1226년 10월 4일 위대한 프란치스꼬가 뽀르지웅꼴라의 초라한 곳에서 세계적인 사랑의 찬가를 부르며 주님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안토니오는 성신강림 때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하여 이태리로 떠났다. 

 

1227년 총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탁월한 교리의 지식과 성덕, 그리고 웅변으로서 다른 유명한 관구장들과 의논 끝에 덕망이 있고 총명하기로 이름난 기요반니 파렌티를 총장으로 추대하였다. 총회가 끝나고 안토니오는 프랑스에 돌아가지 않고 북부 이탈리아 지방을 순회하면서 신앙과 사랑에 넘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어 마음을 바로 잡아주고, 격려하여 “평화와 착함”의 씨를 뿌렸다. 이로 인해 많은 이단자를 회두시키고 수도원을 세워 많은 젊은이들이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이때부터 이 도시는 파도바의 도시로 불리게 되었다.

 

프란치스꼬 수도회가 성모 마리아를 특별히 모시는 것은 세상에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인데 안토니오 성인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어린 때 깊었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성모 승천의 교리는 그의 친구 둔스 스코투스와 더불어 특별히 주장한 신덕 교리이다. 그러므로 안토니오는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숨을 거두기 전에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을 볼 수 있는 은혜와 사랑스런 어머니에게 보호를 요청하면서, 성모 찬가를 불렀다. 안토니오는 마침내 1231년 6월13일 금요일 36세의 일기로 사랑하는 파도바에서 위대하고도 조용하게 막을 내렸다. 성 안토니오를 극진히 사랑하던 아르첼라의 사람들과 파도바의 시민들 사이에는 성인의 유해를 자기네 마을에 모시려고 다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안토니오가 생전에 원하던 대로 그의 유해는 산타 마리아 수도원 성당에 안장하기로 하였다. 이 성당은 안토니오가 생전에 강론을 하고 성사를 주던 곳이다. 장례식은 장엄하여 개선 장군을 맞이하는 기념식 같았다. 안토니오는 1232년 5월 30일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하여 스폴레또 대성당에서 죽은지 1년도 안되 성인 품에 올려졌다. 이 의식에서 교황은 “지극히 착하신 박사여”하는 대송 찬미가를 읊었는데 이것은 현재 교회 박사들을 위한 찬미가이다. 성인이 죽은지 1년이 되지 않아서 성인품에 올려진 사실은 그의 성덕이 얼마나 컸던가를 교회가 증명하는 것으로 길이 교회사에 빛날 것이다.

 

레오 13세 교황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에게 “전 세계의 성인”이라고 붙였다. 그래서 성 안토니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적의 성인”, “파도바의 성인”이라고 알려지고 안토니오에 대한 신심은 다른 누구보다도 많이 전해졌다.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성인에게 바쳐진 성당이 있고 경당이 있으며, 성인에게 드리는 상본, 향대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성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 유물이 있는 곳에서는 지금도 그칠 사이 없이 기적이 일어나 연간 수십만씩 순례자들이 밀려들고 있다.

 

신자들은 성인의 거룩한 덕과 애덕의 합당한 묘지를 세우기로 하여 1263년 기초 공사를 시작한 후 1424년에 장엄한 성당이 낙성되었다. 그의 유해를 이 성당으로 옮기는 의식을 집전한 사람은 프란치스꼬회의 수도자이며 총장인 보나벤뚜라였다. 수많은 신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묘의 문이 열리고 그의 유해가 공개되었다. 죽은지 32년이 지나 그의 모든 부분은 흙으로 돌아갔으나 그의 혀만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이 확인은 1350년과 1745년에 또다시 행하였으나 그의 혀는 변함이 없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 고귀한 성당은 1749년에 일어난 화재로 회당의 일부가 불타버렸으나 전 세계로부터 보내온 헌신자들에 의해 다시 복구되었다. 이 회당에 인접한 큰 수도원에 살고 있는 형제들은 수세기를 통하여 파도바의 성당을 지키고 있는 보호자들이 되었다. 

 

오늘 날에 있어서도 그의 공경은 대단히 성행되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주보이며, 그의 전구를 구하기 위하여 바쳐진 애긍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안토니오의 빵'을 사는 것에 사용된다. 

 

물건을 잃었을 때 안토니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가? 

 

그것은 성인의 성경책을 훔쳐 가지고 달아난 어떤 수련자가 성인의 기도로 그에게 다시 돌려준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성 안토니오는 1946년 1월 16일에 다시 교황에 의해서 “교화박사”라는 공식 선언을 받았다. 성상이나 상본에는 성 안토니오가 책을 들고 있는데 그것은 안토니오가 성경의 지식에 해박하다는 비유이다.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상본에 불꽃을 덧붙였으며, 또 15세기 부터는 심장을 그려 넣었는데 이것은 그의 뜨거운 열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백합은 그의 정결을 표시하는 것이며 포루타갈에서는 백합에 십자가를 덧붙여 넣었다. 

 

17세기부터는 안토니오가가 예수 아기를 안고 있는 것으로 표시했는데, 이것은 그의 탈혼 중에 일어났던 일을 상징하는 것이다. 

 

안토니오의 전기는 1245년 이전에 어떤 동료수사가 썼는데 이 책이 성인에 대하여 가장 확실하며 안토니오가 밖에서 한 일에 대해서는 1294년 후에 쓰여진 프란치스꼬회 수사 리무쨍의 요한이라는 전기이다. 그런데 이 전기에 전하여지는 안토니오 모습을 그린 것에 대한 자료는 남아있는 것이 없다. 여기 저기에서 전하여지는 바에 의하면 그는 화사한 몸맵시를 하고 있었으며 젊었을 때 고생하던 부스럼 때문에 좀 뚱뚱해 보이기 했지만 미남 자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결론으로서 “기적의 성인”, “파도바의 성인”의 참된 영예는 그의 학식이나 웅변, 그리고 기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의 덕행과 거룩함 그리고 천주께서 당신의 뜻대로 그를 성 프란치스꼬회에 부르셨을 때, 기꺼이 응답한데 있다. 그는 회의 작은 규칙하나라도 어기지 않고 창설자 프란치스꼬의 정신에 따라 그를 본받고 충실하게 이행하여 가난하고 작은 자라는 이름을 받은 프란치소꼬회의 이상을 실현시킨 것이다. 

 

  

2. 연보

 

1188-1195 포르투갈의 수도 리수본에서 출생, 세례명은 페르디난도 

1207-1208 아우구수띠노회 대성당 부속학교 입학 

1209-1210 꼬임부라의 아우구스띠노회 성 십자가 수도원 입회 

1218-1220 사제서품 

1220  포루타갈 왕 돈 베드로가 아프리카 모로코에서 순교한 프란치스꼬회 수사 다섯 분의 유해를 모셔왔을 때, 페르디나도는 열광적으로 환영하였고, 이를 계기로 프란치스꼬회에 입회, 수도명으로 안또니오를 받음.

1221  돗자리 총회 참석하여 프란치수꼬 성인을 만남 

1221-1222 몬떼파올로 (포를리)에서 생활 

1222  포를리 서품식에서 설교 

1222-1224 이탈리아에서 설교 

1223  프란치스꼬에 의해 신학강사로 임명 

1225-1227 프랑스에서 설교 

1226  아를레스 수도회의 중 설교할 때 살아있는 프란치스꼬가 발현 

1227-1229 “주일강론집”(Sermones dominicales) 저술 

1227-1230 로마, 롬바르디아, 마르카 관구의 관구장이 됨 

1227-1231 북부 이탈리아에서 설교 빠도바에 거주 

1230  수도회 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를 알현함 

1230-1231 “축일강론집”(Sermones festivi) 저술 

1231  사순절 기간 동안 빠도바에서 설교 

  5월에 성 보니파시오성의 백작 리차르도의 석방을 위해 베로나에 있는 폭군 로마노의 에젤리노에게로 감. 그 이후로 깜뽀짬삐에로에 거주

  6월 13일 마르첼라에서 선종, 성모 마리아 성당에 묻힘 

1232. 5.30 스쁠레또 대성당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서 성인품에 오름 

1263. 4. 8. 성인의 유해가 보나벤뚜라에 의해 세밀히 조사됨 

1350. 2.15 볼로냐의 귀도 추기경에 의해 다시 세밀히 조사됨. 성인의 턱을 성골상자에 모심 

1946. 1.16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교회박사" (Dottore della chiesa) 칭호를 받음 

1981. 1.16 베드로 팔라찌니 추기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교황청 위원회가 성인의 무덤을 열고 유해를 세밀히 조사함.

 

  

3. 성 안또니오께 드리는 13일 기도

 

1 오! 영광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당신은 죽은 자를 부활케 하는 능력을 천주께 받으셨으니 내 영혼을 깨어주사 열심하고 거룩한 생활에로 부활하게 하소서. 

 

2 오! 지혜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당신은 성 교회의 참 빛이시며, 천상 진리의 빛으로 내 영혼을 비추소서. 

 

3 오! 자비 지극하신 성인이시여, 고통 중에 당신께 달아드는 자를 도우심에 항상 바르시고 능하시니 내 영혼을 현재의 비애에서 구하소서. 

 

4 오! 능력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어려서부터 지옥의 원수 이기기를 배우셨으니 내 영혼을 원수의 공격에서 막아주시고 혹심한 유혹에서 지켜주소서. 

 

5 오! 지극히 정결하신 성 안토니오여, 당신은 비할 데 없는 순결의 백합이시니, 불결의 지겨운 모병에 내 영혼을 한번도 더럽히지 말게 하소서. 

 

6 오! 사랑하올 천상 의사이신 성 안토니오여, 무수한 병자들이 당신의 전달로 건강을 회복하오니, 죄로 상처받은 내 영혼을 고쳐주시고 악한 경향을 바르게 하소서. 

 

7 오! 지극히 충실하신 성 안토니오여, 풍랑 거치른 인생 행로에 내 영혼을 지배하사 영원한 구원의 포구까지 인도하소서. 

 

8 오! 자애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당신은 인간 재판에서 유죄 언도 받은 자들의 구속자이시니, 죄의 올가미에서 내 영혼을 해방시켜주사 떨리는 천주의 심판 받을 무리 중에 들지 말게 하소서. 

 

9. 오! 참으로 기이하신 성인이시여, 몸에서 떨어졌던 지체들도 당신 전달로 다시 결합되어 생명을 얻은지라, 불신과 악습 때문에 떨어져나가 지체들도 다시 성 교회에 결합시켜주소서. 

 

10 오! 지극히 고마우신 안토니오여, 당신은 잃어버린 물건을 잘 찾아주시오니 고마우신 안토니오여, 나로 하여금 성총과 천주 사랑을 죄로 잃지 말게 하시고 만일 불행히 잃는다면 즉시 찾아주시어 다시는 잃지 말게 사소서. 

 

11 오! 사랑 지극하신 성인이시여, 젊은이도 늙은이도 당신께 달아들면 들어 허락함을 받나이다. 불쌍하고 가련한 나도 당신께 달아드오니 당신 사랑을 감하지 말으시고 나를 또한 들어 허락하소서. 

 

12 오! 사랑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무수한 위험이 내 영혼을 둘러 샀으니, 나를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소서.

 

13 오! 사랑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빠도바의 당신 무덤 속에서 내게 요긴한 사정들을 굽어보시고, 당신 기묘하온 혀로써 천주께 말씀드리사 마침내 위로받고 들어 허락함을 받게하소서. 빌지어다, 오! 주여 당신께 달아드오니, 안토니오 성인을 공경함으로써 우리 안에 평화가 충만하고 영신이 굳세어지고 영복을 받는데 도움을 얻게 하소서.

 

[출처 :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홈페이지, 꼰벤뚜알 프란치스꼬회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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