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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 산책39: 참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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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2-07 ㅣ No.765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39) 참된 행복

 

준비된 이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선물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잠시나마 하느님과 하나 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겠습니까? 또한, 만약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한 후에 즉시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어떤 감정을 느끼겠습니까? 아마도 이 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최고이자 최상의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사람들에게 가르치실 때 이 최고이자 최상의 행복을 이미 선언하신 바 있는데(마태 5,3-12 참조) 이것을 ‘진복(眞福) 선언’ 혹은 ‘참된 행복’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참된 행복을 선언하는 문구를 보면 “행복하여라, ~한 사람들! ~일 것이다”로 구성돼 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덕행 실천으로 공로를 쌓으면 ‘~이’ 되는 미래의 상급이나 때로는 현세의 상급을 선물로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신학대전」에서 참된 행복을 영적 여정의 발전 단계와 연관 지어 의미 있는 해석을 시도했습니다. 즉 토마스는 여덟 개의 참된 행복을 설명하기 위해 ‘관능적인 삶’과 ‘활동적인 삶’ 및 ‘관상적인 삶’의 세 범주를 제시했습니다. 관능적인 삶은 다가올 행복에 장애물이고, 활동적인 삶은 다가올 행복의 특성이며, 관상적인 삶은 다가올 행복의 진수입니다.

 

먼저, 첫 세 개의 참된 행복은 관능적인 삶의 관점에서 부와 영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난을, 탐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슬픔을, 그리고 분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유함을 지닐 수 있을 때 다가올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두 개의 참된 행복은 활동적인 삶의 관점에서 이웃과의 적극적인 삶 속에서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말라야 하고, 인색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비로워질 때 다가올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다음 두 개의 참된 행복은 관상적인 삶의 관점에서 순수한 관상의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마음이 깨끗해야 하고, 이웃과 잘 지내기 위해 평화를 이룰 때 다가올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덟 번째 참된 행복은 앞선 일곱 개의 참된 행복의 내용을 종합해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관능적인 삶은 거짓된 삶으로써 악습을 끊어버리려고 노력하는 삶에 해당합니다. 활동적인 삶은 좋은 덕행을 실천하여 발전시키는 삶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관상적인 삶은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주시는 삶에 해당합니다. 특히 참된 행복을 영적 발전 단계로 해석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를 루카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 복음사가와 달리 예수님께서 평지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는데, 네 개의 참된 행복 선언 이후에 네 개의 불행 선언을 말씀하십니다(루카 6,20-26 참조). 불행 선언에서 ‘~한’ 사람은 아직까지 끊어야 할 악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발전의 여정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참된 행복은 습득적인 특성을 지닌 초자연적 주입 덕행보다는 성령께서 원하실 때 베푸시는 은사의 특성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영혼에게도 작용하는 은총이나 성령의 역사하심보다는 잘 준비된 영혼에게 어느 순간 하느님 나라를 지상에서 미리 맛보게 해 주는 선물입니다.

 

따라서 참된 행복은 성령의 선물로, 성령의 열매들 중에서 가장 최상급의 열매를 훨씬 뛰어넘는 매우 완전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 중에 누리게 되는 ‘지복직관’(至福直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지고 믿음을 굳건히 하도록 격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공로 없이 무작정 참된 행복이란 상급을 바라는 자세가 결코 바람직하지 않고, 우리의 공로마저 하느님 은총의 범주 안에 있으니 겸손하게 감사하게 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평화신문, 2016년 2월 7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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