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6일 (일)
(녹) 연중 제11주일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선교ㅣ복음화

복음화와 습(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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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6-20 ㅣ No.958

[다시 보는 세상] 복음화와 습(習)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고 듣는 말 중의 하나가 복음화입니다. 너무 흔하게 사용하다 보니 본래의 의미를 잊어버린 채 그저 구호(?)처럼 습관적으로 되뇌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어느 회사에서 직원들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자동적으로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도록 교육받는다고 하는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복음화라는 말도 그런 느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짝 걱정됩니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에 반복하여 강조할 필요는 있지만, 자칫 내면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형식화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가 신학자는 아니지만, 종교의 기본적인 의미 안에서 복음화의 진정한 뜻을 성찰해보고자 합니다. 저의 성찰 내용이 본격적인 교리신학에서의 해설과 다른 점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은 내면 차원의 의미로서는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 의미를 지니는 복음화 개념이 형식화로 퇴색되지 않고 본래 생명성을 더 잘 드러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복음화’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복음(福音)’과 ‘화(化)’의 두 단어 결합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진리, 하느님의 가르침을 뜻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화’는 변화의 의미입니다. 둘을 결합하여 복음화는 ‘하느님의 진리에 의한 변화’ 또는 ‘하느님의 진리로(하느님의 진리에 맞게) 변화’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주어는 하느님의 진리, 동사는 변화라는 점은 드러났는데 변화의 대상인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체 문맥을 고려하면 목적어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인간과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진리에 의해 인간 내면과 세상이 변화하는 것, 또는 인간 내면과 세상이 하느님의 진리로(하느님의 진리에 맞게) 변화되는 것이 복음화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복음화의 기본 의미는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보편적 의미와 일치합니다. 여러 종교의 내용을 비교 연구하는 종교학에서는 인간에게 종교가 지니는 핵심적인 의미를 ‘초월 추구’로 설명합니다. 초월적 진리에 따르는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교는 인간에게 현세적 가치 혹은 질서와는 전혀 다른 (그 너머)의 초월적 진리를 제시해주고, 초월적 진리에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궁극적 의미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런데 초월적 진리에 따르는 삶을 산다는 것은 이전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이전까지 현세적 가치와 질서를 좇는 삶을 살았다면 초월적 진리를 만난 이후에는 전혀 다른 삶,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후 이전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았던 것,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 충실한 사도 바오로로 변화된 것을 떠올려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결국 복음화는 하느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 하느님의 진리에 부합하는 인간 존재로 전환을 뜻합니다. 이렇게 종교의 기본적 의미와 연결할 때 복음화의 의미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복음화의 기본 의미를 충분히 성찰했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과제가 있습니다. 관건은 어떻게 복음화를 실현하느냐입니다. 복음화가 삶의 전환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짐에 따라 복음화는 단지 아는 데서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화가 실천적인 삶의 전환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안 이상 이제 복음화는 형식적으로 반복하는 구호에 그칠 수 없습니다. 너무 쉽게 말해왔던 복음화에서 엄청난 무게의 압박감을 느끼게 됩니다.

 

압박감과 곤혹스러움은 삶의 전환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점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오랜 기간 굳어져 온 나의 삶이 전혀 다른 방향의 삶으로 전환되는 것은 어려운 문제 정도가 아니라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삶의 전환은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선불교(禪佛敎)에서는 돈오(頓悟), 즉 단박에 깨달음이 이루어짐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돈오의 의미가 단순히 시간적 의미에서 한순간에 갑자기 깨달음이 이루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돈오에서 강조하는 것은 깨달음의 완전성 혹은 철저함입니다. 깨달음은 한순간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변화시키는 완전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이 갑자기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삶의 전환, 즉 복음화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력 그리고 점차적인 변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의미를 유교에서 강조하는 습(習)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교에서 습은 ‘지속적인 익힘’의 의미로 강조됩니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 구절에서 익숙한 개념입니다. 유교에서는 궁극적 완성의 경지, 즉 군자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 인간과 세상에 관한 여러 진리를 공부하도록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공부하는 진리를 매일 일상의 삶 속에서 반복하고 지속해서 익히는 일입니다. 익힘(習)의 노력이 없으면 공부한 진리는 단지 머리에 머무는 형식적 지식일 뿐 내 삶을 변화시켜주지 못합니다. 일상 안에서 지속해서 익힘으로써 진리가 온전히 나의 것으로 내면화될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온전히 초월적 진리를 따르는 삶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결국 복음화에서 핵심은 ‘습(習)’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머리로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일상의 삶 속에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익혀가는 것이 복음화의 핵심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지속해서 익히다 보면 하느님의 진리가 점차 나의 것으로 내면화되고, 어느 순간 온전히 하느님을 닮은 인간 존재로 변화될 것입니다. 복음의 생활화라는 것 역시 이러한 지속적 닦음의 의미이지 않을까요?

 

[2022년 6월 19일(다해)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수원주보 4-5면, 오지섭 요한사도(서강대 종교학과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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