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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신학ㅣ사회사목

[병원사목] 불치병 환자의 심리변화를 고려한 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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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129

불치병 환자의 심리 변화를 고려한 사목

 

 

신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본당 사목을 시작하는 사목자가 처음 느끼게 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어설픔이다. 학교에서 아무리 교육을 잘 받았다 하여도 사람에 따라 다르기 마련인 일에 대해서는 서투를 수밖에 없다. 본당의 신자들은 사목자를 성직에 봉사하고 있다는 이유로 관대하게 대하는 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사목자들의 노력에 대해 매우 감사하지는 않는다 하여도 최소한 인내심을 가지고 대한다. 그러나 때로는 사목자들 자신은 어떤 일을 아주 어설프게 처리했다는 자괴심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이런 때에는 아무리 본당 신자들이 위로를 해 주어도 소용이 없다. 이러한 느낌은 사목 현장의 여러 곳에서 들게 된다. 곧 강론 때, 미사 집전 때, 교육할 때, 상담할 때, 병자를 사목할 때 등의 경우에 그런 감정이 들게 된다. 설문 조사를 하지 않더라도 오랜 사목 경험이 있는 사목자의 경험담을 듣고 함께 일하는 가운데 사목적으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바로 불치병 환자를 위한 사목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불치병 환자를 위한 사목을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의 심리 변화 단계를 숙지할 필요가 있다. 몇 년 전에 독일의 심리학자인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Ross) 박사는 이러한 심리 변화 단계를 규명한 바 있다. 이러한 단계를 파악하고 나면 사목자는 불치병 환자를 좀 더 효율적으로 대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글에서는 바로 이러한 단계별 문제를 다루어 보기로 한다. 이 글이 사목자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퀴블러 로스의 이론에 의하면 불치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대개 그 사실을 우선 부인한다. "아니야! 내가 그럴 리가 없어!"라고 하는 것이 흔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저자와 함께 일을 했던 한 신자가 이러한 부인의 사례를 잘 보여 준 적이 있다. 이 신자는 급성 암에 걸렸었다. 이 신자는 이것이 오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시간과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을 시작했다. 이 신자는 엑스레이 사진이 다른 사람의 것과 바뀐 것이라고 확신했고 또한 검사 결과가 그렇게 빨리 나올 수 있는 것인지도 확인하고 싶어 했다.

 

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 신자는 다른 의사들을 '쇼핑'하러 나서기 시작했다. 첫 검사 결과가 오진이기를 바라며 다른 의사들에게 검사를 다시 해 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다른 의사들도 처음 검사와 동일한 결과를 내놓자 비로소 이 신자의 확신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불치병에 걸린 모든 사람들이 이 신자처럼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단 부인하고 보는 것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첫 번째 심리적 단계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시카고 대학 병원에서 사목을 담당했던 칼 니스원저(Carl Nighswonger)는 부인이 "비극에 대한 인간적인 완충 장치"라고 말한 바 있다. 부인은 견디기 힘든 현실에 대한 정서적인 마취제인 것이다.

 

사목자는 다음 세 가지 사항에 주의하며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첫째로 불치병에 걸린 사람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강요하면서 부인하는 마음을 바꾸도록 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헛된 희망을 품도록 하면서 그의 부인에 동조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불치병에 걸린 사람의 하소연을 잘 들어 주어야 한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의 부인하는 마음을 바꾸도록 강요하면 그 환자는 오히려 그러한 생각을 더욱 강하게 가지게 된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 부인의 단계가 지속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헛된 희망을 품도록 하면 평화롭고 품위 있는 그리스도교적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그렇지만 사목자가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의 하소연을 잘 들어 주는 기술을 연마했다면 불치병에 걸린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줄 여유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원래의 부인은 부분적인 수용으로 변하게 되고, 환자는 건강과 병 그리고 죽음과 영생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할 것이다. 마치 이 개념들이 쌍둥이 형제나 되는 것처럼 더불어 논의하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목자가 불치병에 걸린 환자를 사목하는 데 있어서 다루어야 할 두 번째 반응은 일종의 분노이다. 이것은 격정, 질투, 증오 등의 감정과 함께 나타난다. 이러한 감정들은 부인하는 반응이 사라지면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환자는 이러한 분노를 병원의 의료진, 친지, 사목자 또는 하느님을 대상으로 터뜨리곤 한다.

 

사실 사목자들은 왜 그런 분노가 표출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위치에 서 보지 못해서 죽음에 임박하여 나타나는 좌절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효율적인 사목을 하기 위해서 사목자는 자존심을 잊고 모욕감도 참아가면서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의 적개심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일단 분노를 터뜨리고 나면 불치병 환자들은 마치 짐을 벗어 던진 듯 보인다. 그러면 그들 인격의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곧 성령의 선물인 따뜻한 마음, 사랑의 능력, 통찰력, 애정 등을 그들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면 이 단계에 있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다.

 

분노가 가라앉고 나면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은 타협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소위 말해서 거래를 트기 위해 일종의 연극을 벌이기도 한다. 여기에는 여러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다. 만약 환자가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면 의사는 환자를 '골짜기'에서 끌어내기 위한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사목자와도 타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곧 좀 더 신심이 깊은 본당 신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또는 환자가 하느님과 직접 거래를 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환자는 하느님이 개입하시도록 설득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한 의사가 죽음을 앞둔 환자에 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 환자에게는 결혼을 앞둔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은 병든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계획을 진행 중이었다. 이 환자는 장남이면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을 것 같아 시름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이 환자는 병원의 의료진을 설득하였다. 곧 충분한 약물 투여를 해서 결혼식에 몇 시간만이라도 참석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을 편하게 해 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아들의 결혼식이 있는 날까지 살아 있게만 해 준다면 뭐든지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아들의 결혼식이 있는 날 이 환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병원 문을 나섰다.

 

결혼식이 끝난 후 이 환자는 매우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병원에 돌아왔다. 의사가 병실에 들어와 안부 인사를 묻기도 전에 이 환자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잊지 마세요. 내게는 아들이 또 한 명 있어요."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타협은 지극히 정상적인 정서적 단계인 것으로 보인다. 이 타협이 누구와 맺는 것이든 관계없이 여기에서는 일종의 죄의식이나 충족하지 못한 욕망이 한 몫을 하고 있다. 사목자는 이러한 감정을 무시하거나 강화해서는 안 된다. 다만 주의 깊게 상대방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기술을 동원하여 환자가 이 어려운 단계를 잘 거쳐 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있다.

 

일단 부인, 분노, 타협의 단계가 지나고 나면 불치병에 걸린 환자는 우울증에 걸릴 수가 있다. 퀴블러 로스는 환자가 이 단계에서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느끼게 된다고 한다. 사목자들은 이 단계에서 우선 격려를 해 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슬픈 표정이나 눈에 가득한 눈물을 감추려고 애쓰지만 잘 안 되는 사목자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행동인 것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는 이 우울증의 단계를 벗어나야 한다. 이 단계에서 또 알아야 할 점은 환자들이 사목자들과 도통 말을 나누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죽음은 상실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잃을 뿐 아니라, 사람이든 물건이든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잃게 된다. 우울증은 죽음을 앞둔 환자가 이러한 상실에 대비하는 도구이다. 곧 불치병 환자는 이를 통해 당신을 포함한 이 세상과 조금씩 분리되는 일에 대비하는 것이다.

 

병원 사목을 담당하는 성직자와 알고 지내던 한 환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손이 점점 더 차가워져 갈 때 당신의 따뜻한 손을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목자는 비록 별 말이 없다 해도 임종을 앞둔 사람 곁에 있을 필요가 있다. 이 사람은 사목자가 곁에 있는 것을 느끼며 또한 필요로 한다.

 

마지막으로 시간적 여유가 충분한 경우에 불치병 환자는 부인, 분노, 타협 그리고 우울증의 단계를 거쳐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단계, 곧 수용의 단계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단계에서 임종을 앞둔 사람들은 대개 주변의 모든 사물과 사람들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 그토록 소중한 사람들과 장소들을 떠나야 한다는 것에 대해 슬퍼하고 나서는 조용한 기대감을 가지고 종말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이해 부족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위암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던 어떤 신자와 연관된 일이었다. 이 신자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에 이르렀다. 남편과의 지나간 결혼 생활이 행복했었다는 확신이 있었으며 평화롭게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신자는 자신의 남편 때문에 화가 난다고 사목자에게 말을 했다. 이 신자가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남편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남편은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기 위해" 의사들과 이 신자의 다음 수술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이 신자는 남편이 있는 자리에서 사목자에게 다음과 같이 간청을 했다. "이 사람에게 말 좀 해서 설득을 해 주세요!"

 

이 신자의 남편은 사목자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며 자신의 아내가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아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 신자는 얼마 후에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사목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이 죽음을 커다란 위안으로 여기며 주변의 모든 사람과 물건들로부터 떠날 준비가 된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단계에서의 사목은 매우 중요하다. 사목자가 이 단계에서 활용할 수 있는 도구는 환자가 하는 말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면서 복음의 내용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위해 외친 노래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조금이라도 셈이 슬기로웠더라면 알아차렸을 터인데! 

저희들이 장차 어찌 될지는 깨달았을 터인데!"(신명 32,29)

 

그리고 에밀리 디킨슨은 희망의 순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죽음은 영혼과 먼지 사이의 대화. 

죽음이 말한다. '흩어져라.' 

영혼이 말한다. '주님, 저는 또 다른 것을 믿어요.'"

 

불치병에 걸린 환자 사목에 대해 배운 사목자는 그 환자가 평화롭고 품위 있게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 사목자 자신의 삶에도 의미를 더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목자도 언젠가는 임종자들과 더불어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에 가서는 사목자의 삶과 임종자의 삶 모두가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것이다.

 

* 원문: Charles Dickson, "Our Ministry to the Dying", The Priest 55호(1999.11.), 18-20면, 이종범 옮김.

* Charles Dickson은 대학 교수이자 미국 루터 교회 목사이며, 플로리다 대학 병원에서 원목 활동을 한 바 있다. 

 

[사목, 2002년 6월호, 찰스 딕슨(미국 루터 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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