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사목자] 새 시대 사목자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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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152

새 시대 사목자의 덕목

 

 

머리말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가운데 인류는 마침내 새로운 천년을 맞이했다. 새 밀레니엄이니 세기적 전환이니 하는 것이 단지 인위적인 시대 구분일 뿐이라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시각도 일리는 있지만, 필자에게는 제삼 천년기 초입을 장식할 21세기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변혁의 시기가 될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21세기와 함께 밀려올 변화와 도전은 실로 예측 가능한 또는 예측 불가능한 양태로 사회와 교회에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새로운 생존 양식, 이것이 사회나 교회에 밀어닥칠 대세의 흐름 또는 살아 남기 위한 자구책이 될 것이다.

 

'새 시대 사목자의 덕목'이라는 주제를 논구하는 임무를 띤 본 작업은 이런 맥락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여겨진다. 현장 사목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 분야에 대한 관심자의 한 사람으로서 결론부에서 대체 어떤 예지에 도달하게 될지 자못 궁금해지는 작업이다.

 

새 시대에 요청되는 사목자의 덕목을 논하려면 먼저 '사목자'에 대한 정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사목자는 ① 성부의 뜻을 받들며 성령의 도움을 힘입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대신하여, ② 역사와 사회 속에서 구원 사업을 계승, 구현하는 실존이다."라고 언명할 때, 새 시대 사목자의 덕목을 짚어내는 일이 명료해지기 때문이다. 이 정의에서 ①은 사목자의 존재론적인 덕목과 관계가 있고, ②는 사목자의 기능적 덕목과 연계된다고 보면 되겠다. 곧 ①과 관련하여 우리는 모든 시대에 공통적인(공시적인) 사목자의 덕목을 고찰해 볼 수 있겠고, ②와 관련하여 각 시대에 부응하는(통시적인) 사목자의 덕목을 궁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전체(全體)적 전망을 배경으로 해서 우리는 먼저 본고의 주요관심사인 ②의 덕목을 그리기 위한 선행 작업에 착수하기로 한다. 곧 객관적인 접근을 위해서 먼저 새 시대 예측상(豫測像)을 그려보고, 그에 상응하여 교회가 직면한 도전을 예상해 볼 것이다. 그런 다음, 이 양자가 요청하는 본당 사목자의 덕목을 유추해 보고자 한다. 참고 자료로 유수 일간지, 월간지 등의 최근 특집 난에 실린 각 분야 전문가들의 기고문들과 요즈음 서점가에 쏟아져 나오는 여러 신간 서적들을 활용하였음을 밝히며, 이하의 글에서 구체적인 인용 출처는 작업의 편의상 기록하지 않기로 한다.

 

 

1. 새 시대 예측상(豫測像)

 

새 시대 예측상에 대한 총체적 접근을 위해서 구조적 변동, 가치-이념의 새 물결, 그리고 생활-소통 양식의 변화, 이 세 영역을 구분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컴퓨터에 비유한다면 첫째 것은 하드웨어에, 둘째 것은 소프트웨어에, 셋째 것은 연산 처리(Operations process)에 상응한다 하겠다.

 

1) 구조적 변동

 

미래 사회 예측 자료들을 종합할 때, 구조적 변동은 크게 보아 '세계 판세의 변화' 측면과 '사회/경제/정치 판도의 변화' 측면에서 조망된다.

 

(1) 세계 판세의 변화

 

세계 판세의 변화를 나타내 주는 키워드(Keyword)들 가운데서 필자의 눈에 들어오는 것들만 대강 추려 보면 지구화, 기술 제국주의의 등장, 블록 경제 강화, 지구 생태 환경의 위기 등이 있다.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 지구화:지난 세기에 이미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만 한 진전을 보이고 있던 '지구화'의 결과로, 21세기에는 전 지구인을 통제하는 하나의 규범,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가 등장하게 된다. 근래 정보 통신 분야의 기술 표준과 관련한 국제 통신 연합(ITU: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 움직임은 글로벌 스탠더드의 도래를 확언하게 하는 부분이다. 최근 세계 주가 지수 'S&P 글로벌 100'이 개발되어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그 확인인 셈이다. 결국 일정 지역, 일정 민족에 대해서만 유효성을 가진 규범이나 가치관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한편으로는 도전받게 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편협성을 벗어나는 계기를 얻게 될 것이다.

 

- 기술 제국주의의 등장:'신자유주의'라 불리는 오늘날의 무차별한 세계 경쟁에서 우수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자가 지배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전망에서 '기술 제국주의'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요컨대, 첨단 과학 기술을 장악하는 소수 국가 또는 기업이 세계에 제국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는 시나리오이다. 실제로, 컴퓨터의 인공 지능 개발기술, 기계 복제와 디지털 복제를 거쳐 DNA 복제를 가능하게 하는 복제 기술, 유전체들의 유전 정보를 체계적으로 해독하여 활용하는 게놈 과학 등의 신기술은 소수의 서구 기업이 쥐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더 심화되어 결과적으로 빈곤의 세계화, 국가간의 불평등을 조장하게 될 것이다.

 

- 블록 경제 강화:지난 세기에 이루어진 유럽 연합(EU:European Union)의 등장은 개별 국가 경제 연대인 블록 경제의 강화를 촉발하고 있다. 이는 개별 국가의 생존이라는 문제를 단위 국가가 아닌 지역 경제 단위 전체의 문제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국제 경제에 새 판세를 조성할 것이다. 중국, 일본, 한국의 경제 연대 필요성이 여기서 제기된다.

 

- 지구 생태 환경의 위기:지난 천년의 시기는 인간이라는 종(種)이 무절제하게 환경을 난도질해 온 기간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그 동안 특히 후진국들을 대상으로 자행되어 왔던 생태 환경의 파괴는 엘리뇨, 라니냐 현상과 부메랑 효과 등으로 전지구를 위협하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2) 사회, 경제, 정치 판도의 변화

 

21세기에는 사회, 경제, 정치 판도에도 구조적인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우리는 '20 대 80의 사회', '시장의 영향력 강화', '자본주의의 전환', '민주주의 틀의 변화' 등의 키워드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 20 대 80의 사회:'20 대 80'이라는 계층 구조가 사회, 경제, 정치 분야 전반에 형성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곧 첨단 지식과 기능을 소유하고 있는 능력 있는 소수 20%가 각 분야에서 상위의 노른자위를 차지하고 어정쩡한 대다수 80%는 하위의 잔여 영역을 나누어 먹게 된다는 예측이다. 새로운 세기를 주도할 능력 있는 이런 소수 가운데 하나로 부상되고 있는 것이 이른바 '디제라티'(digerati)이다. 디제라티란 디지털(digital)과 리터라티(literati)를 합성한 신조어 곧, '지식인'의 사이버 버전인데, 이들은 디지털 변혁의 선봉에서 디지털 시대 파워 엘리트로 부상할 것이다. 새로운 세기를 열어갈 이들은 인문 과학과 자연 과학의 경계를 아우르면서 '제3의 문화'를 펼쳐 나갈 잡종들이다. 여하튼, 이와 유사한 소수 신지식층 또는 신실세층이 여러 영역의 미래 판도를 주도할 것이라는 관망이다.

 

- 시장의 영향력 강화:21세기에는 시장의 민영화가 이루어져 국영이나 공영의 모든 공공 분야가 점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시장은 모든 것의 재판관이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생산자 주도의 경제 유통 구조가 약화되고 소비자 중심의 경제 질서가 더욱 강화될 것이다.

 

- 자본주의의 전환: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는 보건, 교육, 사법 기관, 시민권, 성 등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공공 분야거나 무료로 제공되는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공개적으로 그리고 합법적으로 그 손길을 뻗칠 것이다. 그러나 자유 경쟁의 시장 논리를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미완의 사회주의에 비견하여 그 우월성을 인정받는 것은 사실이나, 심각한 빈부 격차와 실업 문제 파생 등으로 도전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가를 견제하고 맞서는 세력으로 지식을 보유한 사람들이 입지를 강화할 것이다. 지식 산업, 아이디어 산업의 비중이 커지면서 자본주의가 지닌 단점을 보완하는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결국 자본주의는 더욱 인간적이고 친환경적인 체제로 전환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 민주주의 틀의 변화:민주주의는 지난 1천 년 간 인류 역사의 가장 커다란 성취 중의 하나지만, 아직 미완의 과제다. 특히 근대 정치의 주요한 성과라 할 수 있는 대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의사가 왜곡되거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시민들이 정치적 의사 결정에 자발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시민 권력을 강화하여 기존의 대외 민주주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움직임이 21세기에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이미 정보 사회의 도래와 함께 네트워크를 통한 시민 운동은 시민 권력의 새로운 현장으로 지목되고 있다. 요즈음,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총선 연대와 시민 연대의 국회 의원 선거 낙천 및 낙선 운동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시민 권력 형성은 환경 문제, 시민에 대한 감시 체제, 핵 전쟁 위협 등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위기 극복을 위한 정치적 전략의 중핵이 될 것이다. 새로운 시민 단체는 시민 권력의 초석이 될 것이며, 이 같은 비정부 조직(NGO)의 연대 강화로써 정치, 경제, 권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카오스의 세계로 나가고 있는 현재의 세계 질서(금융 자본 팽창, 국제 이민 물결, 민족 갈등 폭발 등)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의 하나가 다름 아닌 비정부 조직의 활발한 민주적 국제 연대가 될 것이다. 이처럼 영토에 제한받지 않는 국경 없는 민주주의(글로벌 민주주의)가 새로운 양상의 민주주의로 출현할 것이다.

 

2) 가치, 이념의 새 물결

 

가치, 이념의 새 물결을 우리는 '자율화', '다원 문화', '공생 이념' 등의 키워드로써 조망할 수 있다.

 

(1) 자율화

 

N(Networking) 세대의 등장은 이미 집단 중심의 사고와 가치 체계에서 개체 중심의 자율 체계로 전환을 드러내고 있다. N세대를 학계에서는 '컴퓨터를 통해 학습하고, 매사를 집안에서 처리하려는 특징을 갖는 세대'로 정의한다. 이들은 기성 세대와 판이한 정치, 사회, 윤리관과 라이프 스타일을 갖고 있으며, 독립적이고 자신만만한 반면 이기적, 비윤리적, 비타협적이다. 이들이 표방하고 있는 이른바 '솔로(solo:나홀로)족 인간'이 새 천년의 정치, 경제에서 가족 제도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것은 분명한 일이다.

 

(2) 다원 문화

 

21세기 문화는 한마디로 다원성의 문화가 될 것이다. 이는 세계의 다양한 문화가 한 사회 안에 공존하는 '공간적 다원성'과 여러 세대의 천차만별한 가치관이 한 시대 안에 병존하는 '시간적 다원성'으로 나타난다. 이를 반영하는 신조어로서 우리는 '잡종 문화'와 '레고 문명'을 소개할 수 있다.

 

- 잡종 문화:정보의 지구화가 진전하면서 타문화 간 접촉이 더욱 다양한 층위에서 복합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끊임없이 새로운 변종과 그 변종의 변종들이 생겨날 것이다. 결국 잡종 문화는 형편으로는 전통 문화에 심각한 도전이 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타자(他者)를 인정함으로써 조화를 추구하는 디딤돌이자, 이원론의 틀에 갇힌 상상력을 해방하고 금기를 타파하는 창조의 씨앗이 될 것이다.

 

- 레고 문명:어린아이가 레고 게임에 몰두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듯이 21세기 인간은 삶의 수많은 요소(철학, 이데올로기, 정치 체계, 문화, 종교, 예술 등)들을 전지구적이며 전인류적인 문화 전통 안에서 뽑아 자기 취향대로 결합해 나르시스적(자기 도취적)인 세계를 만들어 갈 것이다. 이름하여 레고 문명이다. 레고 문명은 서로의 독특한 개성은 인정하고 돈독한 유대 관계를 맺는 것이므로 '관용'이라는 덕목이 비중을 얻게 될 것이다.

 

(3) 공생 이념

 

얼핏 보아 위에서 기술한 '자율화' 성향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공생 이념'이 인류 공동의 위협이라는 위기 상황을 전제로 해서 부각되고 있는 추세이다. 21세기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는 생태 환경 파괴, 핵 전쟁 발발 위험, 그 밖의 재난과 재앙은 파멸에 대한 공동의 위기 의식을 갖게 하고 결과적으로 공생 원리의 강화를 초래할 것이다. 최근에 부상하고 있는 '공생체', '공생권', '박애' 등의 키워드가 이러한 흐름을 반증해 주고 있다.

 

- 공생체(共生x本):공생체란 공동체와 생명주의를 결합한 용어로 생명 중심적 연대와 결속의 공동체 이념이다. 여기서 인권은 생명권이며, 윤리는 생태 도덕이 된다. 공생체는 이성을 '살아 있는 합리성'으로 이해하며, '상생의 윤리'를 내면화함으로써 생명권 전반에 신뢰와 정감을 확대하는 새로운 휴머니즘이다. 이는 비록 서로 다르지만 포용력을 지닌 인종, 문화, 종교 집단이 차이를 관용함으로써 평화를 누리고 안정적으로 존속할 수 있게 해 주는 시대 정신이 될 것이다.

 

- 생태권(生態權):귀익은 단어 같지만 마지막 한자 '권(權)이 '권'(圈)이 아님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과 그를 둘러싼 환경의 유기적 관계를 지키는 것이 인간의 생존을 위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는 뜻의 '생태'와 '인권'의 합성어이다. 궁극적으로 생태권은 인간을 지구적 차원에서, 지구를 우주적 차원에서 보는 '온 생명'의 우주론을 함축한다.

 

- 박애:'박애'는 19세기의 유토피아인 '자유'와 20세기 유토피아 '평등'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21세기 유토피아다. 21세기에 가장 요청되는 이념인 박애는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형제로 생각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타인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정신으로서, 이는 새로운 사회 질서의 근본 원리가 되며, 이 질서로부터 새로운 권리의 체계와 새로운 정책 관행이 세워지게 될 것이다.

 

3) 생활, 소통 양식의 변화

 

앞에서 언급한 구조적인 판세와 판도 변화, 그리고 의식(意識) 성향의 변화와 더불어 생활, 소통 양식에도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 일단(一端)을 우리는 '네트워크 사회', '유목민화', '양성 사회화', '일상성 혁명'이라는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1) 네트워크 사회

 

이미 전세계가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네트워크 사회가 출범하였거니와, 이는 21세기 인류의 생활 전반을 규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 실상을 우리는 '인터넷 소통'과 '사이버 공간'이라는 키워드에서 엿볼 수 있다.

 

- 인터넷 소통(Internet Communication):인터넷은 사회 모든 영역의 유통 및 소통에 기간 통로가 되고 있는 추세이다. 모든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기술 조직은 기존 계층 체계에서 상호 접속된 매듭(노드)의 총체인 네트워크로 변할 것이다. 결국 계층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전환될 것이다. 또한 이는 편리함과 효율성, 신속성을 제공하는 한편, 게으름, 익명화, 고립화를 초래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 사이버 공간:사이버 공간에서 전개되는 가상 현실은 다양한 모험과 새로운 광기의 장소가 될 것이다. 21세기 인류에게는 가상 공간에서 생활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이 될 것이다. 가상 현실에서는 더 이상 건전한 정신과 광기, 비도덕성과 도덕성, 불합리와 합리성, 법과 윤리 규범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현문명의 철학적 개념과 도덕적 규범의 재고가 요청된다.

 

(2) 유목민화

 

21세기에는 삶의 공간과 계층의 유동화가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맥락에서 '유목민'은 새 시대 인간의 전형적 모습이 될 것이며, 점차 유목민의 가치와 사상, 그리고 욕구가 사회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서 유목민의 가치 덕목인 박애, 관용, 유쾌함, 자유로움, 환대, 경계심, 접속 등이 높이 평가받게 될 것이다.

 

(3) 양성(兩性) 사회화

 

한 인간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통찰이 심화되면서 남성성과 여성성의 원리를 생물학적인 성별(性別)에 고착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21세기에는 양성 사회화 현상이 전개될 것이다. 결국, 남성적인 추진력과 여성적인 유연성을 함께 개발시킨 사람의 사회 적응력이 높게 될 것이기에 다수가 이런 추세에 편승하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4) 일상성 혁명

 

21세기 사람들의 일상적 삶의 세계는 광고, 미디어, 언론에 포위되고, 범세계적으로 표준화된 생활 양식(코카콜라, 맥도널드 등)을 강요받는다. 그래서 21세기 인류는 더 식민지화된 일상의 포로가 될 것이다. 여기서 이에 환멸과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는 선각자들을 주축으로 해서 '일상성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생기고 있다. 지식과 정보, 자본과 권력을 통제하는 기술 관료적 프로그램에 조작되는 소비적 일상을 거부하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 일상을 만들어 감으로써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일상성 혁명(문화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2. 새 시대 교회가 직면한 도전

 

우리는 앞에서 그려 본 '새 시대 예측상'에서 새 시대 교회가 직면한 도전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도전은 두 가지 측면에서 관망된다. 첫째, 새 시대의 조류가 그대로 교회 안으로 유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교회 밖의 시대적 흐름에서 '시대의 징표'를 읽어서 '세상'에 대한 자신의 사명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이 두 가지 측면을 총괄하여 교회가 감당해야 할 도전과 사명을 구명하되, 더하여 한국 교회가 처한 상황의 특수성에서 기인되는 특별한 소명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이 작업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세 직분, 곧 왕직, 사제직, 예언자직을 교회적 삶의 영역 구분으로 삼아 다양하고 방만한 도전들의 갈래를 잡아 보기로 한다.

 

1) 왕직 수행의 영역

 

왕직은 세상을 위한 교회의 봉사, 자선 활동, 공동체 관리 등과 관련된 교회적 사명을 일컫는다. 이와 관련하여 '새 시대 예측상'에서 교회는 다음과 같은 도전을 예상할 수 있겠다.

 

(1) 구조 조정

 

교회는 구조 조정의 압력을 여러 방면에서 받고 있다.

 

첫째, 사목 구조 개선의 요청이다.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의 대중화는 탈중앙 집중화를 촉진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중앙 집중적인 사목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는 분권화의 압력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둘째, 인적 재원 관리 체계 개선의 요청이다. 시장의 영향력 강화로 교회도 '종교 시장' 속에서 '고객'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가톨릭 종교'의 품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시장성'의 논리에 힘이 실릴 것이다. 사제 권위주의의 극복, 평신도 재원 활용, 여성의 교회 내 입지 강화 등의 필요성이 여기서 대두된다.

 

셋째, 사목 영역 설정의 보완책이 요청된다. 생활 양식의 '유목민화'는 기존의 본당 중심 사목을 보완하는 직능, 직장 중심의 공동체 사목의 필요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사이버 공간에서 형성되는 관심사별, 기능별 동아리 모임은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모델 개발을 압박하고 있다.

 

(2) 문화 서비스

 

다원 문화(잡종 문화, 레고 문명)에 길들여진 신자들은 교회에서도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기대할 것이다. 이에 교회는 다양한 문화 공간과 프로그램으로 건전 문화 운동을 선도할 필요가 있다. 연령별, 계층별 기호와 욕구에 맞게 상품 프로그램을 다양화하고 서비스를 개선하지 않으면 신자들은 점점 교회 밖에 있는 수많은 선택 가능성에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3) 80을 위한 우선적 선택

 

이후 모든 영역에 형성될 것으로 예상되는 '20 대 80' 구조는 교회가 지배 또는 중심 세력인 소수 20%를 배척하지 않되, 피지배 또는 소외 세력인 80%에 대해서 우선적인 배려를 해야 한다는 복음적 요청을 실현해야 한다.

 

(4) 교회 내 NGO

 

NGO 시민 연대 활동의 강화는 교회 내에서도 그와 유사한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게 한다. 교회는 이에 대하여 수세적으로 방어만 하려 하지 말고, 자기 발전을 위하여 지혜롭게 수용하고 활용할 줄 아는 포용성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2) 사제직 수행의 영역

 

사제직 수행의 영역은 구원 중재, 성화, 치유 활동과 관련된 교회적 사명을 일컫는다. 이 영역에서는 생명 운동, 화해 일치 운동, 신세대 영성 등으로 여러 도전들을 묶어 볼 수 있겠다.

 

(1) 생명 운동

 

교회는 여러 측면에서 '생명'의 수호자로 부름 받고 있다.

 

첫째, 지구 생태 환경의 위기 상황에서 '생명 유기체' 보전에 앞장서는 일이다. 특히 복음을 근거로 생명 운동의 원리적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 요청된다. 만물의 유기체적 연관성에 대한 통찰, 공생과 상생의 원리, 차이와 다양성의 수용, 우주적 박애 정신 등을 복음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정초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첨단 과학과 유전 공학이 꾀하는 유전자 조작 또는 생명 창조의 시도에 대해, 그 문제점과 위험성을 설득력 있게 지적하고 계도 또는 저지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고 있다.

 

셋째, 질적인 삶을 선도하는 일이다. 무의미한 반복만이 계속되는 소비적 일상을 거부하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 일상 속에 새로운 의미를 불러일으켜 보람 있고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 혁명인 '일상성 혁명'을 주도하는 일이다.

 

(2) 화해 일치 운동 

 

화해와 일치 운동은 세 차원에서 요청된다.

 

첫째, 가정을 중심으로 한 화해와 일치 운동이다. 개인주의와 시장 원리에 따라 결혼과 가정은 복수적인 또는 반복적인 선택의 차원으로 전락될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결혼의 엄숙성과 가정의 성스러움을 회복하는 것은 교회가 짊어져야 할 무거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둘째, 민족의 통일을 위한 헌신이다. 한국 교회는 통일의 문제와 민족 동질성 회복이라는 도전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시기와 방법의 불확실성 앞에서 무기력하게 불안과 우울에 젖어들기 보다는, 여건의 완화를 위하여 치밀하고 점진적인 화해 운동이 다각도로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종교 및 문화 간 대화 운동이다. 여러 인종, 문화, 종교 집단이 갖는 다양성, 개성, 차이를 인정하면서 상호간 열려 있는 대화로써 공존의 길을 찾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으로 몰고 간 한국 사회에서의 '순수성의 이데올로기' 논쟁을 지양하고 탄력 있는 창조적 포용성을 견지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질서하고 무원칙한 '혼합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하는 식별 능력과 자신의 존재 이유와 존재 방식을 확인하는 정체성을 구비할 필요가 있겠다.

 

(3) 신세대 영성

 

N세대를 중심으로 한 개인화, 자율화 성향 그리고 다양한 정보의 접촉은 그들에게 그 동안 교회에서 맛볼 수 없었던 정신적이거나 영신적인 갈망에 대한 충족을 사이버 공간 안에서 찾게 할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도전이 생긴다.

 

첫째, 이들 신세대 젊은이들을 위해 교회는 자율성과 합리성을 갖춘 신세대 영성을 계발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개인들의 영신적 갈망에 부응하는 묵상, 잠심, 수행 방법 등을 계발할 필요가 있다. 정통 교리에 대한 고백, 공동 성사 생활의 참여, 교도권 지침에 대한 순응 생활을 요체로 하는 종래의 '피동적인 영성'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고립화, 익명화를 즐기는 '나홀로 문화'에 교회는 어떤 형태로든 교회의 본질적 존재 양태인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도록 다각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사이버 공간에서 만나는 영성, 성경 공부, 나눔 동아리 등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3) 예언자직 수행의 영역

 

왕직과 사제직이 기존 체제와 조류를 대체로 수용하고 윤곽에서 각각의 사명을 수행하는 성격을 띠고 있는 데 비해서, 예언자직은 대체로 그에 대한 창조적 비판의 윤곽에서 임무를 부여받는다. 크게 보아, 공동선 구현, 반대 운동, 에코에너키즘 등으로 갈래가 잡힌다.

 

(1) 공동선 구현

 

예상되는 '구조 변동'을 배경으로 공동선 구현의 도전이 밀려온다.

 

첫째, 기술 제국주의의 출현과 블록 경제의 강화로 초래될 심각한 인권 문제와 지역 이기주의에 맞서 생존권과 인류애를 수호하는 일이다. 한편으로, 현재 신자유주의 세력이 지배하는 과학 기술에 대한 의사 결정 독점을 제1세계와 제3세계의 시민 대중이 연대해 깨뜨리고 시민 참여권을 확보함으로써, 제3세계의 각 지역 조건에 맞는 다원적인 과학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려는 시민 운동에 동참하여 피해국의 인권 침해를 막는 데 교회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역량을 기울여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고도 성장과 발전을 구가하는 서구 블록 경제 수혜국들의 그늘에서 반사적으로 희생양이 되어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되는 블록 이외에 존재하는 국가(예컨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다수 국가)를 실질적으로 옹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지역 경제의 블록화가 가지는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교회의 보편적인 이념이 지배하는 전세계 경제 건설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둘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갖는 모순과 한계를 직시하고 경제와 정치 체제의 개선안을 모색하는 데 교회는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자본주의의 연장선상에서 효율과 경쟁을 숭배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서 기인되는 빈곤의 세계화에 맞서서 '세계 공동선'의 구현을 촉진함으로써 연대와 공존, 형제애의 세계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세계 공동선을 조직적으로 파괴하는 '시장의 우상'에 맞서 가톨릭 경제 윤리를 재정립하고 이를 신자들에게 적극적으로 교육하는 것이 급선무라 하겠다. 다음으로, NGO 시민 연대의 정치 참여 활동에 연대적으로 동참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새 방향을 주도하는 것도 '공동선' 구현의 구체적인 방편이 아닐 수 없겠다. 또한, 이런 다양한 시민 연대 활동의 추세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 교회 내 다양한 소수층들의 참여 창구를 열어 주는 포용력도 갖추어야 할 것이다.

 

(2) 반대 운동

 

시대 조류를 창조적으로 비판하는 사명을 띤 교회적 예언직 수행은 그 특성상 반대 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교회는 각 시대마다 등장하는 반생명적, 반생태적, 반인륜적, 또는 반복음적 문명 조류에 대하여 명백하고 단호한 반대 운동을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 핵무기 개발 반대 운동, 국가 보안법 반대 운동, 환경 파괴 반대 운동, 개발 반대 운동, 급기야 반문명 운동 등 교회가 선도적으로 동참해야 할 도전이 끊임없이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3) 방법론적 무정부주의

 

예언직 수행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충격적으로 완수하기 위한 '상징 행위'로서 교회는 무정부주의를 선택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보인다. 교회는 근래에 국가 이기주의에 편승한 몰염치한 환경 파괴자들을 대항하여 혁혁한 공로를 세우고 있는 그린피스(Greenpeace) 전사들의 생태 무정부주의(Ekoanarchism) 활약과 노선을 같이할 필요가 있다. 비단 생태 환경 분야뿐만이 아니라 문명과 체제에 대한 창조적 비판의 사명 수행은 구약의 예언자들의 활약이 그러했듯이 때로는 법의 테두리를 과감히 무시하고 개인적 소신과 양심 및 행동 양식을 중시하는 에너키즘의 방법론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그럴 때, 곳곳에 위험 요인이 일촉즉발의 긴급성으로 매복되어 있는 이른바 '위험 사회'에 효과적인 경종을 울려 줄 수 있을 것이다.

 

 

3. 요청되는 사목자 덕목

 

이제 우리는 "① 성부의 뜻을 받들며 성령의 도움을 힘입고 그리스도 예수를 대신하여, ② 역사와 사회 속에서 구원 사업을 계승, 구현하는 실존"이라는 사목자의 정의로 되돌아가 이와 관련된 사목자의 덕목을 짚어 내는 작업을 앞두고 있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새 시대 사목자의 덕목'이라는 본고의 중심 과제는 ②와 관련되어 통시적으로 요청되는 사목자의 기능적 덕목을 궁구하는 것이 되겠으나 총체적인 전망을 견지하기 위하여 먼저 ①과 관련하여 공시적으로 요청되는 사목자의 존재론적 덕목을 일별한 다음 본 작업에 착수하기로 한다.

 

1) 공시적 요청:사목자의 존재론적 덕목

 

"성부의 뜻을 받들며 성령의 도움을 힘입고 그리스도 예수를 대신하여"라는 사목자 정의의 전반부는 사목자의 존재론적 근거를 규정해 주고 있다. 여기서 순명, 정결, 청빈의 복음 삼덕이 사목자 영성의 본질 요소로 확인된다. 우리는 이 세 가지를 사목자의 존재론적 덕목이라 이름하여도 무방하겠다.

 

- 순명:오로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아버지의 구원 경륜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정신이 순명이요, 또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결단의 표명이 순명 서약이다. 비굴한 굴복이 아닌 자발적인 순명은 하느님 백성을 위한 봉사직에서 권위주의나 자기 과시에 빠지지 않고 오로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에 골몰하게 한다. 순명의 덕은 자신의 존재와 소유가 모두 하느님의 자애와 전능에서 유래함을 깊이 수긍하고, "나 자신에 관해서는 내 약점 밖에 자랑하지 않겠다."(2고린 12,5)라고 한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자신의 약함을 통하여 아버지의 능력이 드러난다는 것을 상기하고 부단한 자기 부정의 길을 가게 한다. 

 

- 독신 생활(또는 정결):정통적인 시각을 벗어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필자에게는 사제 독신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라는 언표와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독신의 정신은 오로지 하느님과 사랑을 나누고 일체가 되고자 하는 전인적 헌신의 생활 양식이다. 여기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갈라 2,20)이라는 고백과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사제의 신원 의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 청빈:청빈의 정신이 '성령의 도움을 힘입고'라는 언표와 맞닿아 있음을 우리는 여러 성서적 전거에서 알아볼 수 있다. 청빈은 한편으로는 자기 희생적 나눔의 정신을,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성령의 능력과 도움에 내어 맡기려는 방법론적 자기 비움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청빈은 물질적인 가난과 영적인 가난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구현되는 것이다.

 

이들 세 가지는 사목자들에게 시대를 초월하여 요청되는 존재론적인 덕목이지만, 현대의 문화 여건은 이들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못한 양상을 띠고 있다. 사목자들은 무력한 듯이 보이지만 가장 근원적인 힘을 발휘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듯하지만 모든 시대를 앞서고, 무대책한 듯이 보이지만 가장 원대한 대비책인 이들 복음 삼덕의 적극적이고 깊은 취지를 늘 새로이 확인하여 흔들림 없이 의연하게 사목 일선에서 매진할 수 있어야겠다.

 

2) 통시적 요청:사목자의 기능적 덕목

 

"역사와 사회 속에서 구원 사업을 계승, 구현하는 실존"이라는 사목자 정의의 후반부는 사목자의 기능적 덕목, 곧 각 시대마다 다채롭게 요청되는 사목자 덕목의 징조가 되고 있다. 이제 앞부분에서 언술된 바를 토대로 하되, 다시금 왕직, 사제직, 예언자직이라는 영역 구분을 윤곽으로 하여 요청되는 사목자 덕목을 짚어 보고자 한다.

 

(1) 왕직 수행 영역의 덕목

 

새 시대 예측상과 교회가 직면한 도전의 맥락에서, 새 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덕목이 사목자에게 필요하다고 유추된다.

 

- 뉴 리더쉽:새 시대에는 중앙 집권식 교회 구조 안에서 통하던 종래의 권위주의적, 가부장적, 훈육 주임형 리더쉽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될 것이다. 새 시대의 지도력은 파트너쉽이다. 21세기의 특징적 사고는 공존, 동반자적 자세이고, 이에 따라 새 시대 사목자에게도 열린 사고가 요구된다. 뉴 리더쉽은 협의, 동반자적 협동, 구성원의 주인 의식, 민주적 절차 등을 지도 원칙으로 삼아 구성원의 잠재 역량을 능동적으로 발휘하게 하는 지도 역량을 총칭한다.

 

- 프로 의식:'시장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 전문 지식이 생존 조건이 되는 사회에서 사목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적어도 신앙 분야에서는 투철한 전문가적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여, 다른 분야는 무능력자요 문외한으로 머무는 한이 있어도 신앙 분야에서는 스스로 프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희망에 대하여 묻는 이들에게 항상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으라."(1베드 9,15) 하는 사도적 권고를 사목자는 자신의 것으로 삼아, 모든 계층의 욕구와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영성과 학덕을 겸비하는 데 온 힘을 다해 할 것이다.

 

- 하심(下心) 영성:끊임없이 낮은 데로 임하신 강생의 영성, 곧 눈높이 영성이다. '20 대 80'의 계층 구조가 암시하듯이 새 시대에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다. 예수님을 본받아 마음을 항상 낮은 데로 향하여 소외 계층과 고통받는 이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을 수 있어야 하기에 하심 영성이 필요한 것이다.

 

- 박애:이미 언급했듯이 박애는 21세기에 가장 요청되는 덕목이다. 박애만이 시장과 민주주의를 하나로 화합하게 할 수 있다. 소수에게 '자유'의 이름으로 거부권을 행사하게 하면서도 '평등'으로 향하는 다수의 결정들을 받아들이도록 해 새로운 유토피아를 이루는 것이 전문가들이 꿈꾸는 미래 시나리오이다. 새 시대 인류의 생존을 좌우할 이 박애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기 위해 지식인들의 양식 있는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본다. 사목자에게 박애 정신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맥락에서이다. 바로 복음적 사랑에 다름 아닌 박애, 이것을 자신 안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안에서 일깨우기 위해 사목자는 부단히 영성 계발에 힘써야 할 것이다.

 

(2) 사제직 수행 영역의 덕목

 

사제직 수행 영역에서 필요한 시대적 덕목은 다음과 같다.

 

- 생명 외경:20세기의 성자 슈바이처가 선구자적으로 보여 주었던 생명에 대한 외경심은 그대로 새 시대 사목자들에게 더욱 필요한 덕목이다. 사목자가 시대를 선도하는 지도자로서 지구 생태 환경의 위기, 첨단 유전 공학의 무모한 도전에 대항하여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생명체 전반에 대한 외경심과 그 상호 유기체적 연결성에 대한 통찰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주와 자연에 대한 명상적 관조와 복음 묵상으로 심화될 수 있다고 보인다.

 

- 통합 조정 능력:가족간, 민족간, 문화간의 여러 방면에서 화해와 일치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통합 조정 능력 또는 중재 능력이 필요하다. 다양한 계층의 이해 관계와 가치관을 화해와 일치의 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려면, 개방성, 대화 능력, 분별력 등을 함양하고 있어야 한다.

 

- 관용:다원 문화 속에서 사목자가 갖추고 있어야 할 덕목은 관용이다. 다른 관점, 다른 사고 방식을 이해하고 수용해 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 측은지심:새 시대의 사람들은 더 다양한 문제와 고통으로 각자의 성에서 홀로 괴로워할 것이다. 이 때, 각자의 다른 처지를 이해하고 동정해 줄 수 있는 측은지심이 그들에게는 구원 요인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측은지심, 그것이 새 시대에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 뉴 프론티어 정신:변화 물결의 선두에서 창의적으로 앞장서 나가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영어 단어를 빌려 썼다. 영성적 개척자 정신은 미래 교회의 생존을 좌우할 것이다. 특히 신세대의 사고와 욕구에 부응하는 영성을 계발하기 위하여, 그리고 사이버 시대에 적합한 공동체 모델을 발굴하기 위하여 사목자에게는 바로 뉴프론티어 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3) 예언직 수행의 영역

 

예언직 수행의 영역에서 요청되는 새 시대 사목자의 덕목은 다음과 같다.

 

- 대안 제시 능력(또는 비전):창조적 비판을 생명으로 하는 예언직 수행을 위해 요청되는 것이 비전이다. 비전은 분별력, 통찰력, 예지력이 종합적으로 빚어 내는 대안 제시 능력이다. 곧 분별력으로 새 시대 사회의 흐름을 올바로 진단해 내고, 통찰력으로 한계와 가능성을 짚어내며, 예지력으로 그 개선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엄밀한 성서적 의미에서, 비전을 보는 것은 사목자이지만, 보여 주는 이는 결국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영적 각성을 위한 노력으로써 하느님에게서 선명한 비전을 얻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사목자의 몫이라 할 수 있겠다.

 

- 정의감:사실 기술 제국주의니, 블록 경제니, 자본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것들은 보기 나름으로 '강 건너 불'일 수 있다. 이 '강 건너 불'에 대하여 어떤 이는 구경을 하고 어떤 이는 어떻게 해서라도 불끄는 데 일조해야 한다는 내적인 에너지에 떠밀린다. 그 차이를 형성하는 것이 정의감, 곧 정의에 대한 열정이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앞에서 언술된 '공동선의 구현'을 위해 사목자에게 필요한 덕목으로 정의감을 꼽아야 할 듯하다. 특히 먼 이웃이 당하는 불이익과 불의에 대하여도 적극적인 사랑과 관심을 기울이고 투신할 수 있는 정의감, 이것이 21세기 사목자에게 필요한 고귀한 덕목이라 생각된다. 이것 없이는 범지구적으로 자행되는 불의와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체제와 이념 문제에 모두 방관자로 머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반골 기질:반대 운동을 전개하는 예언자직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반골 기질이 필요하다. 소시민적 순종으로는 거대한 반생명의 물결에 대하여 아무 성과도 거둘 수 없다. 때로는 소신, 때로는 용기, 때로는 단호함, 때로는 이른바 '왕따'를 참아 내는 각오, 이들을 우리는 반골 기질의 발로라고 봐 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 자유로움:무정부주의적 방법론의 유효성을 앞에서 이야기했다. 그 접근법을 시의적절하게 무제한적으로 구사할 수 있게 하는 덕목이 자유로움이라 생각된다. 사고의 틀과 법의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때 복음에 입각한 소신, 양심, 행동 양식이 예언자직 수행의 동력으로 발산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왕직, 사제직, 예언자직의 영역에서 요청되는 새 시대 사목자의 덕목을 나열하였거니와, 이들은 그 자체로 독립하여 의미를 지니는 덕목들이 아님을 덧붙인다. 이 덕목들은 사목자의 말과 선택과 태도로써 복음이 그대로 반영되고, 선포되고, 증거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이바지하는 한에서 의미를 갖는 것들인 것이다.

 

 

4. 맺는 말

 

이상에서 살펴본 새 시대 사목자의 덕목을 두루 겸비하기는 불가능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이상적인 덕목의 카달로그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저마다 자신의 성향과 기질에 맞는 덕목을 계발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 생각된다. 각자의 장점을 드러내는 영역과 덕목, 곧 카리스마가 다르다는 것을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서로의 강점으로 남의 약점을 보완하여 '사제단' 전체로 보았을 때 통합적인 균형을 이루는 것이 이상적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청탁 받은 원고의 주제가 매력 있게 느껴져서 여러 가지 여건의 제약에서도 받아들였다. 필자 개인에게는 집필 기간이 성찰과 반성의 시간이요 은총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말미에 가서는 시간에 쫓겨서 어수선하게 벌여 놓은 자료들을 급히 수습하여 수술 도중에 어쩔 수 없이 응급 봉합을 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독자를 위해 각주를 달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여하튼 독자들께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새 시대를 살아가는 데 '시세지수'(時勢指數) 역할이라도 한다면 그저 만족할 따름이겠다.

 

[사목, 2000년 3월호, 차동엽(인천교구 고촌 천주교회 주임 신부, 사목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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