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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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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사목] 우리 곁에 와있는 베트남 교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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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0-02 ㅣ No.551

[달라도 우리, 다문화] 우리 곁에 와있는 베트남 교우들

 

 

“20살 어린 나이로 한국에 시집와서 일주일 만에 정신질환을 앓던 남편에게 살해당한 아가씨. 도대체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화려한 영정 뒤에 숨죽이고 있는 수많은 이주민들과 이주 노동자들의 그림자를 봅니다.”

 

지난 7월 1일 가난을 벗어나고픈 꿈을 안고 한국에 왔다가 한 줌 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베트남 여성. 결혼사진이 바로 영정사진이 되어버린 그녀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10여 년 전 경향잡지에 만화 ‘베드로의 세상살이’를 연재한 이동수 베드로 씨의 그림과 글이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베트남은 식민통치와 해방, 남북분단 과 동족상잔의 전쟁 등 한국과 역사적 공통점이 많다. 베트남은 1954년 프랑스가 베트남 독립군에게 패하면서 물러났지만, 제네바 협정으로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이 분단되었다. 그리고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공산국가가 되자 많은 이가 자유를 찾아 외국으로 떠났다.

 

박해와 순교의 교회 역사도 그렇다. 13만의 순교자를 낸 베트남 교회는 안드레아 ‘융락’(둥락은 잘못된 표기란다.) 사제를 비롯한 117위의 순교 성인을 모시고 있다. 신자 수는 아시아에서 네 번째인 620여만 명, 한국은 그 뒤를 잇고 있다. 1975년 공산화 이후 교회 재산을 몰수당하고 정부가 사제서품 숫자까지 통제할 정도로 규제를 받고 있다.

 

결혼 이민은 물론 돈을 벌고자 한국을 찾는 베트남인들이 많아지면서 우리 곁에 와있는 베트남 신자들의 공동체도 늘고 있다. 가난하지만 순수한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은, 현재 서울을 비롯하여 의정부, 수원, 부산에서 어려움 속에서도 공동체를 꾸리고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순교자의 후예들, 베트남 신자 공동체

 

1990년 초부터 움직임이 있었지만, 한국에 베트남 신자 공동체가 정식으로 형성된 것은 2003년 4월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 팜탄빈 요셉 신부가 입국하고부터였다. 지금은 제2대 사목자라 할 짠쯔엉터 요셉 신부가 2008년 4월 입국하여 서울대교구 노동사목회관 이주노동자상담실에서 일하며 공동체를 돌보고 있다.

 

4층 상담실을 찾아가 “씬 짜오(안녕하십니까).” 하고 서툴게 인사하자 요셉 신부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민다. 베트남어 통역은 류시황 토마스 아퀴나스 씨(71세)가 맡아주었다. 1966년 육군 대위로 베트남전에 참가하여 베트남 군인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는 교관으로 활동했는데, 2001년부터 통역봉사를 해오고 있단다.

 

서울에 있는 베트남 신자 공동체는 등록 인원이 210명, 그 가운데 200여 명이 주일미사에 참석한다고 한다. 다문화 가정 신자들은 거주지역 본당으로 가기에 몇 명 안 되고 대부분 이주 노동자들이다. 개인신심에만 치우친다는 지적도 있지만 베트남 현지도 주일미사 참석률이 90%에 이르는 본당들이 있다니, 16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전해준 신앙을 순교로 지켜낸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순교자들의 후예답다.

 

베트남에는 26개 교구가 있는데, 한국에 오는 이들은 북쪽 출신이 많다. 수도인 하노이가 북쪽에 있어 그 쪽이 더 영향력이 큰 것 같다고 한다. 남북으로 긴 국토탓에 서울의 공동체 안에서도 북부, 중부, 남부의 문화 차이가 있어, 이들은 출신 교구별로 6개 지역으로 나누어 미사 준비 등 공동체 내 여러 행사를 맡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정식 근로 비자를 받은 이들도 있지만, 유학이나 관광 비자로 입국했다가 돈을 벌려고 눌러앉은 불법 체류자도 많다. 이들은 임금 체불 등으로 고통을 겪는다. 위장 결혼을 한 여성들은 일하다가 만난 베트남 남성과 함께 살기도 한다. 그래서 미사 때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이들을 보면 요셉 신부는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가난해서 돈을 벌러 온 베트남 신자들을 사제로서 도와줄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단다.

 

다른 어려움을 묻자 한국말이 어렵다며 빙긋 웃었다. “신부님, 어디 갔다 오세요?” 하고 따지듯 묻는 한국의 인사법도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 기분이 나빴단다.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2007년 5월 보문역 7번 출구 바로 옆 건물에 마련한 베트남 공소에서 주일 12시면 요셉 신부가 주일미사를 봉헌한다.

 

“와서 보라!”는 권유를 받고 지난 8월 15일 베트남 공소를 찾아가는 길에, 보문역 근처 신암교회에 들렀다. 담임목사인 친구는 광복절 기념 ‘평화통일주일’ 예배를 드리다가 경향잡지 소개와 아울러 가까이에 어려운 이웃들이 있음을 교인들에게 알려주었다.

 

보문역 출구에는 베트남 젊은이 무리가 보였다. 좁은 층계를 올라 4층의 작은 문을 열자 후끈한 열기와 전자악기 반주의 성가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고해성사를 보려고 줄지어 선 젊은이들, 전통 의상인 아오자이를 차려입은 여성들과 하얀 와이셔츠 차림을 한 남성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미사를 준비하고 있다. 하얀 솜뭉치를 눈처럼 깔고 반짝이 전구를 곁들인 성모상이 무척 아름답다.

 

성모 마리아를 교구 주보로 모신다는 빈 교구 젊은이들이 성모승천대축일을 맞아 정성껏 준비한 제단 장식과 곱고 우렁찬 성가소리에서 베트남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줄지어 성모상에 장미꽃을 봉헌하는 것으로 미사가 시작되었다.

 

베트남어 기도의 운율, 봉헌예절도 인상 깊다. 제병과 제주를 든 남녀가 앞장을 서고, 초를 든 남녀가 뒤따르며, 그 뒤에 꽃과 과일바구니를 든 여성이 둘, 맨 뒤에 향을 피워 든 양복 차림의 남성 하나가 매우 느리게 행진하며 예물을 봉헌하였다.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없는 좁은 공간에서 비록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영성체 때 우리가 합장하듯 팔짱을 끼고 나오는 문화적 차이가 있어도 만국 공통인 미사 순서는 변함없었다.

 

 

“못 하이 빠 요!”

 

두 시간여의 미사가 끝나자 순식간에 의자를 물리고 바닥에 비닐을 깔고 양고기와 쌀국수 등 전통 음식을 차린다. 소주와 맥주도 빠지지 않는다. 대축일 미사 잔치가 벌어졌다. “못 하이 빠 요!(하나 둘 셋, 위하여!)” 하는 건배사가 여기저기서 잇달아 쩌렁쩌렁하게 터져나온다.

 

당연히 노래와 춤판이 이어진다. “깜언, 짜!(고맙습니다, 신부님!)”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 탓인가, 인사말이 술술 나온다. 모처럼 성모승천대축일 잔치를 기쁘게 지냈다. 11월 24일은 성 안드레아 융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를 기리는 베트남 성인 대축일이다. 한국처럼 가까운 주일로 옮겨 지낸다니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봉급을 못 받고 한숨 쉬는 이들이 있는데 돕고 싶으면 언제든지 이주노동자상담실로 연락(☎ 02-928-2049)하란다. 달력을 보니 추석(9월 22일)이 멀지 않았다.

 

[경향잡지, 2010년 9월호, 글 · 사진 배봉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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