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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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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유럽 성지순례: 아시시, 로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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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24 ㅣ No.1678

[유럽 성지순례] 아시시, 로피아노

 

 

1.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전경

2.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내부. 조토를 비롯한 14세기 이탈리아 최고의 화가들이 그린 프레스코 벽화들로 장식돼 있다.

3. 성 프란치스코 생가에 있는 소성당 내부

4. 프란치스코 성인이 유해가 모셔져 있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내 지하소성당. 제단 뒤 돌기둥에 안치돼 있는 석관이 성인 무덤이다.

5.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안에 있는 포르치운쿨라 소성당.

 

 

평화의 도시 '아시시'(Assisi)와 '로피아노'(Loppiano).

 

종교와 이념, 민족과 빈부의 벽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진리와 선, 그리고 사랑과 평화를 구현하고 있는 축복의 땅이다. '이탈리아의 푸른 심장'으로 불리는 아시시는 성 프란치스코(1182~1226)와 성녀 클라라(1194~1253)의 고향이다.

 

푸른 밀밭의 목가적 전원과 눈덮인 산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방 페루자의 작은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아시시는 중세 도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대리석이 깔린 넓은 광장, 그 주변으로 뻗어 있는 좁은 골목길. 그 양편으로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중세 건물들. 동화 속 풍경같이 빼곡한 성물가게와 2층 발코니마다 햇살을 듬뿍 머금고 있는 화분들. 그 모습이 새벽 공기를 달구는 따스한 아침 햇살만큼이나 싱그럽고 평화롭다.

 

 

포르치운쿨라

 

아시시에 도착한 후 제일 먼저 역 앞에 있는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순례했다. 대성당 가운데에는 성 프란치스코가 가장 사랑했던 장소인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 '작은 몫'이란 뜻) 소성당이 있다. 성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난 후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자 17세기 후반에 교황청이 포르치운쿨라를 덮는 대성당을 세운다.

 

프란치스코는 27살 때 손수 벽돌을 찍어 수리한 이 소성당에서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마태 10,9-10)는 복음 말씀을 깨닫고,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요 원하던 바요,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것"이라며 즉시 신발을 벗어버리고 지팡이를 치우고 한 벌 옷에 만족하는 청빈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프란치스코는 또 이곳에서 첫 동료들과 함께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창설한다. 그리고 늘 소망했던 대로 프란치스코는 1226년 10월3일 이곳에서 선종한다. 이후 사람들은 이곳 포르치운쿨라를 '성 프란치스코의 심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포르치운쿨라에 들어섰을 때 마침 한국에서 프라도회 사제로 살았던 프랑스 생드니교구장 오영진(올리비에드 베랑제) 주교가 교구 사제단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다. 그레고리오 성가를 합창하는 사제들 목소리가 그렇게 감미로울 수 없었다. 미사후 순례단을 본 오 주교는 우리말로 "반갑습니다"라며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좋은 순례가 되길 빌며 축복해 주었다.

 

오 주교 일행을 환송하고 소성당에 들어갔다. 성 프란치스코의 청빈을 그대로느낄 수 있는 성당이었다. 장식없는 벽면과 작은 돌제대, 언제 그렸는지 모르겠지만 소박한 제대벽화가 전부다. 성 프란치스코가 그랬듯이 포르치운쿨라에서는 입고 있는 옷 그 자체가 사치인 듯 싶었다.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식히기 위해 얼른 성당 밖으로 나왔다.

 

나오면서 미련이 남아 고개를 돌려 포르치운쿨라를 다시 한번 보았다. 그러면서 성 프란치스코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모든 것, 하늘의 태양과 바다의 별, 땅 위의 나무와 나는 새들, 그리고 나환자에게까지 "형제, 자매"라며 사랑할 수 있었던 그 힘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바로 포르치운쿨라처럼 가식없는 삶. 자신을 드러낼 만한 어떠한 꾸밈도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가득 차 있는 실체! 그것이 성 프란치스코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열을 식히기 위해 성당 주변을 둘러보았다. 입구에 지난 1986년 교황청 주최로 이곳에서 열린 '세계종교지도자회의' 사진 동판이 붙어 있었다. "그래 2000년 대희년을 기념해 열린 세계종교지도자회의도 이곳에서 열렸지!". 아시시가 평화 도시임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순례를 떠나기 전 성 프란치스코에 관한 소책자를 읽었다. 성 프란치스코의 어록 중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어 묵상용으로 취재 노트에 옮겨 놓은 것이 있었다.

 

"진정 평화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 가운데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몸과 마음에 평화를 간직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을 가슴에 새기면서 성 프란치스코 유해가 모셔져 있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 향했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포르치운쿨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웅장하고 화려하다. 외벽은 마치 중세 성을 보는 듯하다.

 

성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1228년에 착공, 1230년 성당 일부가 완공되자 성 지오르지오 성당에 안장돼 있던 성인 유해를 지하 성당으로 옮겨온다. 이후 공사는 계속돼 1258년 마무리된다. 성인 유해는 지하성당 제단 가운데 가로질러 서 있는 굵은 돌기둥 속 석관에 안장돼 있다. 성인의 청빈한 삶을 웅변하듯 성당 내부는 무릎틀과 제단위에 깔린 낡은 양탄자뿐 아무것도 없다.

 

고딕양식의 대성당 내부는 13~14세기 이탈리아의 대표적 화가들인 조토와 로렌체티, 치마부에, 마르티니 작품의 프레스코 벽화와 색유리화로 꾸며져 있다.

 

이 대성당은 지난 1997년 10월에 일어난 강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토(Giotto)의 프레스코화 작품 '성 프란치스코의 일생' 28점은 2층 천정과 벽이 무너지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수도회와 이탈리아 정부 노력으로 일부가 복원됐지만 군데군데 석회와 시멘트 등으로 떼운 흔적이 남아 있다.

 

성당을 둘러본 후 박물관으로 갔다. 성인의 수도복을 비롯해 여러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낡을 대로 낡은 성인의 수도복은 우리 순례자의 '텅빈 마음'을 꾸짖는 듯 했다.

 

 

성 클라라 대성당

 

대성당을 빠져나와 성녀 클라라 유해가 있는 '성 클라라 대성당'을 순례했다. 이 곳도 97년 지진 피해로 공사중이어서 애석하게도 지하 성당에 안장돼 있는 성녀 유해는 볼 수 없었다. 성녀 유해는 밀랍된 채 유리관에 전시돼 있다고 한다. 아쉬움을 제단 위에 세워져 있는 성 다미아노 성당 십자고상으로 달래야만 했다. 성 다미아노 성당 십자고상은 성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소명을 처음으로 들은 기적의 십자가이다.

 

성녀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의 영향을 받고 1212년 프란치스코회 첫 여자 수도자가 된 후 봉쇄 수도회인 '글라라회'를 창설, 42년간 엄격한 수도생활을 했다.

 

성녀의 청빈한 삶을 그대로 드러낸 듯한 성 클라라 대성당 외형은 물론 내부 역시 단아하다. 외벽과 내벽은 장식이 거의 없다. 성당을 찾는 이들이 제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천정화도 제단 위에 있는 것이 전부다. 생전 성녀 클라라가 봉쇄 수도 생활을 하면서도 기도를 통해 세상 모든이의 가까운 이웃으로 다가갔듯 성 클라라 대성당도 세상 곳곳에서 찾아온 순례자들에게 세상을 잊고 하느님을 관상하는 편안한 쉼터를 제공해 주고 있다.

 

 

로피아노

 

또 다른 평화의 도시를 방문하기 위해 서둘러 로피아노로 향했다. 로피아노는 피렌체 근교 인치사(Incisa)의 작은 구릉 위에 세워진 '포클라레'(마리아사업회) 소도시이다. 지형적으로는 아시시와 너무 닮았다. 전세계에서 매년 3만명 이상이 이곳을 방문한다. 찾는 이들도 가톨릭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뿐 아니라 타종교 사람들과 심지어 무신론자까지 다양하다. 또 젊은이들뿐 아니라 남녀노소 모든 연령층이 찾는다.

 

종교와 이념, 민족과 빈부, 연령과 배움의 차이는 있지만 이곳을 찾는 모든 이는 오직 하나 '포클라레 정신' 즉 '복음 안에서 하나되는 일치의 삶'을 배운다. 또 수도자처럼 봉헌이 삶을 살길 원하는 포클라레 회원들은 이곳에서 2~3년간 수련을 거친다. 수련을 마치면 포클라레 회원들은 각자의 나라에서 로피아노의 삶을 재현하기 위해 다시 떠난다.

 

복음 안에서 하나되는 일치의 삶이 무엇이냐고 안내자에게 물었다. 그의 답은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자신을 지탱해주는 한가지씩 기쁨이 있는데 자신들에게 가장 큰 기쁨은 복음을 통한 하느님과의 만남이며 이 만남을 통해 모든 이가 하나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964년 엘레토 폴로나리가 기증한 땅에 설립된 로피아노는 가정집과 공동숙소, 학교, 단과대학, 공장, 농장, 공연장 등 여러 시설을 세워 나가면서 비록 규모는 작지만 도시 면모를 갖추고 있다. 다민족 음악그룹인 '젠 로쏘'와 '젠 베르데' 본부도 이곳에 있다.

 

현재 상주하고 있는 약 800여 포클라레 회원들이 이곳 주민들이다. 이들은 각자 정해진 작업장에서 가내수공업 일을 하지만 생산 목표량을 정해놓고 노동하지는 않는다. 작업반장도 있지만 조합원들을 관리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도우미' 역을 한다.

 

로피아노 사람들은 영신적 재산뿐 아니라 물질적 소득도 공동으로 나눈다. 서로간 사랑이 이곳 주민들 삶의 바탕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공동으로 나누며 살고 있다.

 

밤 늦게 로피아노에 도착한 순례단을 로피아노 주민들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한국뿐아니라 필리핀, 브라질, 캐나다, 우크라이나, 세네갈, 스페인에서 온 포클라레 회원들이 노래와 춤으로 환영식을 치러주었다. 그리고 순례단을 위해 따뜻한 쌀밥을 지어 대접하면서 옆에 앉아 "부족한 것이 없냐"며 최고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다음날 작업장 견학 시간에도 포클라레 사제학교에서 연수 중인 대구대교구 박덕수 신부와 청주교구 석근웅 신부를 비롯해 한국인 포클라레 회원들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신기한 것은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결같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행복해서 어쩔줄 모르는 환희, 통제할 수 없는 기쁨이 표출되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 너무나 다른데도 불구하고 하나가 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고 지상의 '하느님 나라'라고 생각했다.

 

로피아노. 1박 2일의 짧은 경험이었지만 '평화의 도시'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교회가 살아 있는 한 부분으로서, 세상에 열려진 그리고 세상 모든 것과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우리가 살아아할 도시였다.

 

순례단 일원인 서양자(비르짓다,62)씨는 "마치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모습을 보는 듯하다"며 "주민 모두가 자기 재능과 욕심, 가진 것을 다 내놓고 서로가 다르다는 점을 모두 수용하면서 사는 로피아노 주민처럼 인류가 살아간다면 세상살이 걱정이 없겠다"고 동화된 듯 말했다.

 

 

성 프란치스코

 

성 프란치스코(1182~1226)는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의 소도시 아시시에서 포목상을 하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출생했다. 자유분방하고 야심많은 청년기를 보낸 프란치스코는 일련의 계시와 나환자와 만남을 통해 23세에 회개했다.

 

2년 뒤 아시시 성 다미아노 성당에 있는 십자가에서 "가서 무너지려고 하는 나의 집을 돌봐라"는 목소리를 듣고 소명을 자각한 후, 1209년 포르치운쿨라에서 마태오 복음서 10장 5-14절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프란치스코회'를 창설했다.

 

수도회 창설후 선교를 위해 시리아와 스페인, 근동 지역까지 순례했고, 1224년 9월에는 라 베르나 산에서 '그리스도의 오상'을 받았다. 이후 오상의 고통과 심한 눈병을 앓다 1226년 10월 3일 포르치운쿨라에서 선종했다. 청빈과 단순,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헌신,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겸손 등을 실천, "또 하나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라 불린 프란치스코는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됐다.

 

 

성녀 클라라

 

성녀 클라라(1194~1253)는 아시시 귀족 출신으로 성 프란치스코 영향을 받고 1212년 성지주일 밤 집을 나와 삭발을 하고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다. 복음적 가난과 관상의 삶을 살기 위해 봉쇄수도회인 '가난한 자매들 수도회'(글라라 수도회)를 시작한 클라라는 42년간 봉쇄 수도생활을 했다.

 

봉쇄 수도원은 주님과 단둘이 누리는 자유 공간이며, 가난은 그리스도를 관상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라고 가르친 클라라는 기도를 통해 아시시에 쳐들어온 사라센 군대를 몰아내고 중환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클라라는 1253년 8월 11일 선종, 2년후인 1255년 교황 알렉산델 4세에 의해 시성됐다.

 

 

포콜라레

 

포콜라레(Focolare)는 우리말로 '벽난로'라는 뜻으로, 한국교회 공식 명칭은 '마리아 사업회'. 창설자는 키아라 루빅(Chiara Lubich, 1920~). 포콜라레는 '일치'와 '사랑'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을 실생활에서 실천으로 옮기면서 사람들이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운동.

 

현재 182개국으로 확산된 회원수는 대략 450여만명. 회원 대부분은 가톨릭 신자들이지만, 종파와 종족, 세대를 초월하여 포콜라레의 영성을 따라 살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회원이 될 수 있다. 우리 나라에는 1969년 여자 포콜라레 공동체가 들어왔고, 1974년 남자 포콜라레 공동체가 들어왔다. 현재는 서울과 대구 지역의 일곱 곳에서 남녀 공동체가 활동 중이다.

 

[평화신문, 2004년 3월 21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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