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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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유럽 성지순례: 에탈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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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24 ㅣ No.1681

[유럽 성지순례] 에탈수도원


700년된 성모자상 유명, 해마다 150여만명 순례

 

 

1. 에탈수도원 전경. 1760년대에 새로 지어진 이 성당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2. 기도하고 있는 에탈수도원 수사들. 성 베네딕토의 `수도규칙`에 따라 이 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50여명 수사들도 매일 7차례 수도원 성당에서 공동기도를 바친다.


3. 에탈 수도원 성당 제대. 성모승천벽화 앞에 설치돼 있는 제대는 바로크 양식의 하려한 장식을 보여주고 있다.


4. '에탈의 마돈나' 성모자상. 루드비히 황제가 직접 마련한 이 성모자상은 화재에도 훼손되지 않고 보존돼 700여년 가까이 순례자들에게 성모와 아기 예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전형적 독일인의 삶과 전통을 체험하려면 '바이에른'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 바이에른은 독일 남동부 전체를 이루고 있는 독일에서 가장 큰 주로 동으로 체코, 남으로 오스트리아, 서로는 헤센주를 끼고 있다.

 

영어로 '바바리아'로 불리는 이 지역은 풍부한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오늘날 '관광천국'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이 지역 많은 관광지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 알프스 산록지대이다.

 

'에탈수도원'은 이 알프스 산록 해발 900m 지점 암머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수도원으로 가는 '로만틱 가도' 주변. 도나우강과 마인강 지류들이 흐르는 계곡과 알프스 흰봉우리들이 구름 한 점 없는 쪽빛하늘과 어우려져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에탈(Ettal)은 '맹세의 계곡''약속의 계곡'이라는 뜻. 바이에른 황제 루드비히(1314~1347)가 성모 마리아께 이 곳에 수도원을 세우겠다고 맹세한 후 그 약속대로 1330년 4월28일에 수도원을 설립해 '에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루드비히 황제는 세계 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프랑스 아비뇽에 유배돼 있던 교황 요한 22세(1316~1334)는 프랑스의 이권을 대변해 정치적 목적으로 1323년 루드비히 황제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이에 반발한 황제는 이듬해 공의회를 소집, 요한 22세의 부당함을 고발했다.

 

공의회에 참석한 일부 신학자들은 '신앙인 공동체의 대표인 공의회가 교회에서 최고의 권한을 행사한다'며 교황 공의회에 종속시키는 '공의회 우위설'을 주장했고, 독일인들은 교황 요한 22세의 반독일적 태도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었다. 그 결과 '공의회 우위설'이 확산, 두 명의 교황(대립교황)이 등장하는 '서구 대이교'(1378~1417년)가 일어났고, 16세기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가톨릭 신자들이 대거 이탈하는 결과를 낳았다.

 

루드비히 황제는 교황 요한 22세와 한창 대립 중이던 1330년 에탈 수도원 건립 공사를 시작했다. 수도원은 황제가 죽고도 한창 뒤인 1370년에 완공됐다. 40년 만에 완공된 수도원 성당은 12각형 고딕양식 성당으로 제단에는 루드비히 황제가 생전에 이탈리아 피사에서 직접 가져온 대리석 '성모자상'이 안치돼 있다.

 

'에탈의 마돈나'로 불리는 이 성모자상은 아기 예수가 성모 마리아 무릎에 서서 마리아와 사랑스런 눈빛을 마주하면서 성모 왼빰을 손으로 비비는 모습을 하고 있다.

 

어머니와 아들의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을 형상화한 이 성모상으로 인해 에탈수도원은 15세기 이래로 순례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지금도 해마다 150만명 이상이 찾고 있다.

 

에탈수도원은 700여년 장구한 역사 동안 많은 시련을 겪었다.

 

1744년 6월 화재로 수도원 성당이 전소됐다. 이후 1762년 고딕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혼합된 새성당이 완공돼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 수도원 성당 역시 비스성당처럼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침공 영향으로 유럽의 다른 수도원들과 마찬가지로 1803년 수도회가 해체, 전재산이 정부 소유로 압류되는 불행을 겪었다.

 

이후 100여년 가까이 방치됐던 에탈수도원을 1900년 성베네딕도 수도회 샤이에른(Scheyern) 수도원이 매입해 그해 8월 다시 문을 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순례단이 에탈을 방문했을 때 성당 입구에 한 수사신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렸는지 큼지막한 코가 빨개져 있었다. 수사신부 안내로 수도원 성당으로 들어갔다.

 

성당 내부는 흰 대리석과 금도금 장식, 그리고 천장화로 정교하게 꾸며져 있었다. 천장 돔에 설치된 11개 장미창은 성당 내부 구석구석으로 햇빛을 내려보내고 있었다.

 

제대 안쪽에는 성모 마리아가 승천하는 모습의 대형 벽화가 있고, 그 밑에 '에탈의 마돈나'가 자리잡고 있다. 또 중앙제대 주위로 '부활 예수' '성가정' '성 베네딕토' '성 세바스찬' '성녀 가타리나'의 조각상이 있는 '소제대'가 놓여 있다.

 

1769년에 제작된 천장 프레스코화는 성 베네딕토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던 400여명 성인 성녀와 남녀 수도자들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프레스코화 중심에는 창조주 성부와 십자가의 승리를 표상하고 있는 성자, 비둘기 형상의 성령이 천사들 호위를 받으며 자리하고, 그 주위로 천사들과 성인 성녀들,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찬미하고 있다.

 

천장화를 설명하던 수사신부는 "성인들 모범을 본받아 매일매일 새롭게 이 천장화 아래에서, 이 거룩한 공간에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또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 이외에 '기도하며 일하라'는 성 베네딕토의 가르침에 따라 고등학교인 '김나지움'과 출판사, 인쇄소, 농장, 빵집, 맥주와 약주 공장, 호텔 등을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김나지움은 독일에서도 유명한 사립학교로 알려져 우수한 학생들이 지원한다고 했다.

 

중세부터 내려오는 수도원 내 전통 제조기법 그대로 생산하고 있는 이곳 맥주(Ettaler Klosterbier)와 약주는 유럽인들에게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며 자랑스러워 했다.

 

순례단은 수사신부 안내로 맥주와 약주 제조장을 둘러본 후 다시 성당으로 와서 이곳 수사들과 함께 저녁기도를 바쳤다. 수도복을 입고 자기 자리에 앉는 수사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곳에 사는 수도자 55명 중 절반 이상이 40대"라는 설명을 들었지만 젊은 수사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많았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고운 화음도 박력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대수도원들에서도 볼 수 없던 광경이었다.

 

기도를 끝마치자 안내했던 수사 신부에게 젊은 수사들이 많은 이유를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김나지움 학생들 중 지원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이곳 김나지움 출신으로 신부가 된 후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그 수사신부는 "신입생들에게 천장화를 설명해 주면서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했다.

 

에탈수도원은 수사신부 말처럼 하늘에서는 천사들과 성인성녀들이, 땅에서는 수도자들이 시편을 노래하며 매일매일 하느님을 찬미하는 거룩한 장소였다. 순간, 어느 때부터인가 아무런 감동과 의식없이 성당을 들락날락하던 자신을 비춰보게 됐다.

 

미사에 참례하고 영성체를 해도 잠든 영혼에 동요조차 없던 내 모습을 보면서 수사신부의 빨개진 코만큼이나 얼굴이 달아올랐다. 달아오른 얼굴로 수사신부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수도원을 빠져 나왔다.

 

나무와 도로는 벌써 어둠에 묻혀버렸지만 흰 대리석으로 지어진 수도원은 알프스의 흰 산봉우리들과 하나가 되어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었다.

 

[평화신문, 2004년 4월 11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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