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강론자료

2011-0515.....부활 4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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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1-05-21 ㅣ No.1040

부활 제 4 주일 (가해)
사도행전 2,14.36-41        베드로12,20-25     요한 10,1-10
2011. 5. 15. 등촌3.
주제 :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
세상에서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음식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요즘에는 과학이 발달해서 입으로 먹지 않아도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 있다고도 합니다만, 그러한 특별한 경우를 뺀다면, 사람이 살 수 있는 힘을 얻는 방법은 몇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답을 찾는 질문에 사람들이 대답할 때는 육신에 관련된 것을 말하고 끝낼 때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靈魂)에 관련된 것을 대답으로 하는 때는 거의 없다는 얘기지요.
 
오늘은 부활시기 4번째 주일입니다. 동시에 교회는 오늘을 성소주일로 지냅니다. 이 표현에서 성소(聖召)라는 말은 라틴말로 보카시오(Vocatio), 즉 하느님의 일을 하라고 우리를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하시고, 그렇게 특별한 선택에 맞게 살도록 부르시는 것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한자로 표현하면 성소라고 우리말로 설명하려니 이래저래 말이 길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히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청소년이나 신학교 입학연령제한인 28살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만 관련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나이에 속하는 성소는 교회공동체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직무사제직을 맡을 사람으로 구별하기 위한 나이라고 말하고, 그 나이를 넘기거나 그에 미치지 않은 다른 나이에 해당하는 성소는 보편사제직이라고 해서 우리들 각자가 세상의 곳곳에서 우리더러 특별하게 살아야 한다고 초대하는 것으로 구별합니다.
 
이 시간은 직무나 보편사제직을 구별할 낱말 공부를 하라고 하는 시간은 아니기에, 성소주일이라고 정해진 때를 지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나는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렇게 던진 질문에 대답하는 일입니다. 아무래도 이 시간은 신앙에 대한 것을 먼저 말하는 시간이기에, 성소에 대한 것을 말하거나 생각할 때, 세상일에만 관련된 것을 언급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일과 신앙에 관련된 일을 말할 때 사용하는 본보기가 있습니다. ‘어느 수도자가 자기 딴에는 아주 심각한 자세로 스승님께 물었답니다. “스승님! 담배를 피우면서 기도해도 됩니까? 아니면 기도하면서 담배를 피워도 됩니까?”하고. 드러나는 모습만 본다면, 이것인지 저것인지 구별할 수 있지만, 이 질문을 듣고 스승님은 질문하는 제자에게 대답을 해주셨겠지요?’ 어떤 대답이 그 제자에게 돌아갔을까요?
 
사람들은 흔히 세상의 것과 하느님의 것, 세상의 일과 하느님의 일을 같은 높이에 두고 대립시키기를 좋아합니다. 때로는 경쟁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둘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일이 고민스럽다고도 하고, 때로는 인간의 일을 먼저 한 다음에 하느님의 일이라고 구별된 일을 하는 것이 무슨 큰 잘못이냐고 인간적으로 묻기도 합니다. 질문하는 것은 인간이고, 대답하는 것도 인간이니 어떤 표현을 쓰더라도 그 대답은 자유일 것입니다. 다만 그 대답이 무엇을 향하는지 물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도둑이나 강도와 목자의 관계를 비유로 설명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당시에 사회풍습을 반영하여 양치는 일에 관련된 일을 소재로 삼아 풀어주시는 말씀입니다. 양들에게 도둑이나 강도가 필요한 사람인지, 아니면 목자가 필요한 사람인지를 묻는 말씀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선택의 문제가 우리 삶과 관련되는 것으로 바뀌어왔을 때, 과연 우리가 얼마나 쉽게 또 얼마나 정확하게 대답하고 행동하느냐는 것입니다.
 
도둑이나 강도로 살든지 아니면 목자로 살든지, 이러거나 저러거나 사람의 삶인 것은 분명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만 달라진다는 것이고,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들었던 사람으로서 어떤 모양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 옳으냐는 것뿐입니다.
 
내가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니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 옳겠습니까? 내 행동으로 세상에 생명을 가져오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에 멸망의 결과가 다가오는데 협력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주 쉬운 대답을 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는 선택이 세상에서 어떤 결실을 맺도록 협력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일들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신앙에 관련된 대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만 관련된 것보다도, 신앙에 관련된 것들이 세상 삶에 더 큰 역할을 하고 더 큰 영향을 남깁니다. 사도행전에서 들은 베드로 사도의 선언과 그가 한 일의 결과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할 때, 하루에 3천명도 세례를 받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노력과 행동만으로 무작정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 얼마나 잘 살려고 노력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얘깁니다.
 
하느님은 세상에 심판의 위협을 던지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세상에 하느님의 심판은 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것은 아닌데도 그분의 심판이 온다면, 이 말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 세상에 다가오는 하느님의 심판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벌하시기 위해서 하느님이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그 심판을 불러들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같은 세상에서, 같은 신앙인으로 살면서도 그 삶을 기쁘게 지내며 감사드리는 사람이 있고, 세상의 그 삶이 힘겹다고 짜증을 내면서 신앙을 숨기거나 뒤로 무작정 미루는 사람이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기억하고, 내 삶이 그 뜻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되새기는 성소주일입니다. 하느님 앞에 내 삶을 내놓아야 할 순간에 앞서서, 미리 그 모습을 살필 수 있다면 좀 더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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