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강론자료

2011-1124...목...하느님은 나를 알아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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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1-11-24 ㅣ No.1123

연중 34 주간 목요일 - 홀수 해

다니엘 6,12-28            루카 21,20-28

2011. 11. 24. 등촌3

주제 : 하느님은 과연 나를 알아주실까?

사람은 살면서 자기 삶에 관련된 여러 가지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질문을 한 것만큼 대답도 얻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은 했는데, 대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거나 대답을 들었는데 내가 기대하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대답으로 들려왔다면 어떨까요? 한두 번은 질문을 더 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그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다는 바람을 내던지지는 않을까요?

 

사람은 저마다 귀중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이 자신을 기억해주기를 바랍니다. 누구라도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에게 내가 귀중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알게 된다면, 내 스스로를 바라보는 삶이 아주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같을 질문을 신앙인의 삶에 적용하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하느님이 귀중하게 여기는 존재일까요? 그렇다면 하느님은 나에게 무엇을 베풀어주시는 분일까 하고 우리는 본말이 바뀐 질문을 할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귀중한 존재라면 그 대상은 나에게 무엇을 주는 존재일까 하고 생각할 거라는 얘깁니다. 우리말에 주고받는다는 표현은 있지만, 그 말의 앞뒤를 바꾸어서 받고 준다는 것을 먼저 생각할 때 나오는 현상입니다.

 

먼저 받으면 내가 받는 것의 가치를 계산하고, 줄 때도 그만큼을 계산할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아주 특수한 관계가 아니라면 내가 받았다고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은 이민족의 종교 안에서 목숨을 내놓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더 앞세우며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내 이야기가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이니까, 신앙에 대해서 뛰어난 본보기를 우리가 그냥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내가 신앙을 내 몸으로 증거하는 일 때문에, 사자의 아가리 앞에 떨어질 수도 있다면, 과연 그 일이 가능할까요? 이론으로 가능한 일과 실제로 가능한 일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에 충실하게 산다는 것이 현실 생활을 아주 행복하게 사는 조건이 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앞뒤관계를 따지기를 좋아하고, 손해보다는 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것이 대세가 된 자본주의 세상에서 목숨을 내놓아 신앙인의 올바른 삶을 증거한다는 것은 사실상 엄청난 도박입니다.

 

세상의 심판이 아니라, 완성을 말하는 예수님의 재림이 되면, 그 순간이 내게 기쁨이 될지, 슬픔이 될지 미리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순간이 나에게 갑작스레 다가오지 않고, 내가 미리 준비하고 대비한 일이 되게 하려면, 세상일에 바쁘다는 핑계와 사정을 대는 일도 가능하지만, 정말로 그래도 괜찮은지 하느님 앞에서 진지하게 성찰해야 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준비하고 살면, 내 앞에 다가올 미래가 두려운 것이 되지 않고, 반길 수 있는 일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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