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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2-06 ㅣ No.1233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 공소의 탄생
 
조광
 
 
교회는 신앙 공동체이다. 이 신앙 공동체는 공동의 전례를 통해서 신앙의 보화를 나누고 그 결속을 다진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례를 거행하는 장소를 마련하고자 노력해 왔다. 오늘날 교회는 공동체적 전례의 거행에 필요한 여러 시설을 갖춘 교회, 성당 등 독립 건물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박해시대 교회는 이와 같은 공간을 가질 수 없었다. 신앙 행위 자체가 비합법적으로 여겨지던 때에 신앙 행위를 할 수 있는 건물을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해시대 조선교회에서는 신앙 공동체로서 우의를 다지는 ‘공소(公所)’가 있었다. 여기서는 이 공소가 탄생하는 과정을 주목해 보고자 한다.
 
 
‘공소’란 낱말의 의미
 
우리나라에 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교리를 토론하고 기도를 공동으로 드렸던 곳들이 있다. 예를 들면, 1784년 이승훈이 이벽에게 세례성사를 주었던 서울 수표교 부근 이벽의 집은 공동으로 기도를 드렸을 곳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785년 가톨릭 신앙 집회가 열렸던 명례방 김범우(金範禹)의 집도 바로 이와 같은 기능을 담당하였다. 교회 창설 직후인 1780년대 후반기에 잠시 시행된 가성직제도 아래에서도 전례를 행하던 장소가 있었음에 분명하다. 이러한 장소는 박해시대를 통해서 계속 확인된다.
 
신앙 집회를 위한 장소의 출현은 교우촌의 형성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신앙 전파 초기 일부 지역에서는 거의 온 마을이 집단 개종하는 움직임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렇게 기존의 촌락에 살던 사람들이 입교함에 따라 형성된 교우촌도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교우촌’은 조상제사 문제로 말미암아 불거진 1791년의 박해를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계속되는 박해를 피해 자신의 향리를 떠나 흩어진 신자들이 모여서 교우촌을 본격적으로 이루어나갔다.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이 교우촌을 대상으로 하여 선교여행을 다녔다. 이 과정에서 ‘공소’의 원형이 형성되었다. 먼저 ‘공소’는 사제가 상주하지는 않지만 사제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전례를 집전하는 건물인 작은 강당[oratorium, oratoire, 經堂]을 뜻했다. 뒷날 프랑스 선교사들은 이 건물이 전례를 위한 독자적 시설로 꾸며졌을 경우에는 이를 ‘공소집’이라 하거나 ‘공소방(chapelle)’이라 하기도 했다. 간혹 공소집을 ‘성당’이라고도 했지만, 뒷날 성당이란 단어는 대체적으로 성직자가 상주하는 전례용 건물을 뜻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소의 의미는 특정 건물을 말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건물이 있는 장소인 교우촌(christianitas)과 동일시되어 갔다. 예를 들어 ‘되재공소’라 하면 되재에 있는 교우촌과 같은 의미였다. 또한 공소란 단어는 그곳에서 진행되던 판공(判功)을 포함한 일련의 ‘전례행위나 선교(mission)’까지도 함축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공소를 본다.”는 말은 곧 ‘판공’을 뜻하기도 했다. 판공이란 단어는 “신자들이 이룩한 교리학습이나 신앙생활의 정도를 사제가 헤아려 판단한다.”는 의미를 가진 조선 교회의 고유 용어였다. 이 판공이 “성교사규”에 규정된 의무적 성사와 함께 진행되어 오던 관행에서 ‘판공성사(mission)’라는 단어가 나왔다.
 
한편 공소는 교회의 촉수와도 같은 말단 행정단위(station)를 뜻하기도 했다. 교회 행정의 입장에서 볼 때, 공소는 사제가 상주하는 성당(eglise)의 하위기구로서 선교의 최말단 근거지(station)로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선교의 근거지 또는 선교 거점이란 뜻으로 ‘공소(mission station)’가 사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공소는 여러 복합적 의미를 지닌 조선 교회의 고유한 말이 되어갔다.
 
프랑스 선교사 다블뤼 신부는 여러 의미가 함축된 이 단어를 프랑스어로 직접 옮기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그는 1862년에 작성한 편지에서 이 조선어 단어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를 포기하고 조선어의 음을 그대로 옮겨‘공소(kongso)’라는 말로 직접 표기했다. “한국 천주교회사”를 편찬한 달레는 이 ‘공소’라는 단어에 “선교사가 마을에 도착하면 경당(oratoire)으로 바뀌어 성사를 집행하는 집”이라는 주석을 달아주었다. 그러나 달레 신부의 이 주석은 공소의 복합적 의미를 설명해 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공소의 발전 과정
 
‘공소’에 해당하는 여러 서양어 단어들은 1830년대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의 편지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들이 도회와는 멀리 떨어진 한적한 지방의 교우촌을 순회하며 전례를 집전하다가 지친 몸을 누일 수 있던 곳이 바로 공소였다. 이러한 사정은 1860년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발송한 편지에서 확인된다. 이 편지에서 그는 대부분의 교우촌에는 공소를 지낼 수 있는 별도의 건물이 없고, 선교사들이 방문하기에 앞서 교우촌의 회장들이 판공을 할 건물을 정해주면 그곳에서 선교사들이 머물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공소는 교우촌의 중심이 되는 회장의 집에서 주로 열렸다.
 
이리하여 1850년에 이르러서는 185개소가 넘는 공소(stations)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성사를 준 바 있다. 우리나라 교회사에서 두 번째로 서품된 최양업 신부는 1859년 당시 그의 관할구역이 5개도에 산재해 있었고, 공소만 해도 127개나 되어 1년에 7천여 리를 두루 다녀야 했다. 그리고 1865년 말에 베르뇌 주교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에 순회 선교를 하면서 몇 주일 동안 4개의 공소(stations)에서만도 8백 명 이상의 성인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처럼 박해 아래에서도 공소의 규모는 점차 커졌고, 조선의 신앙 공동체는 공소를 거점으로 하여 성장해 갔다.
 
박해시대 신자들은 공소를 자신이 받들던 하느님의 집으로 생각했다. 하느님의 집은 아직 별도로 마련하지 못했지만, 그 집에 들고자 하는 사람은 더욱 늘어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느님을 좀 더 잘 받들고, 공소를 보던 선교사들의 업무를 좀 더 잘 돕고자 별도의 공소집이나 공소방을 마련해 보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이러한 시도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몰래 입국하여 활동하던 1830년대 후반기 이래 줄곧 계속되었다.
 
우리는 그 예를 경기도 광주고을 구산마을에서 먼저 찾을 수 있다. 이곳에 살던 김성우(안토니오)는 영세 입교한 다음 교회 일을 도우려고 자신의 집에 작은 강당 또는 공소방(oratoire)을 마련한 바 있었다. 프랑스 선교사 모방(Maubant) 신부는 한여름철의 장마와 무더위를 피하여 이 공소방에서 지내기도 했다.
 
한편 최양업 신부는 1859년에 작성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간월이라는 교우촌(christianitas)에는 교우들이 상당히 많았으나 모두 가난하고 공소집(oratorium)도 너무 초라했습니다. 어떤 외교인이 와서 보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집이 이래서야 쓰겠는가?’ 하며 자신이 더 좋은 공소집 하나를 지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작년에 그 외교인은 자기 비용으로 훌륭한 공소집을 지어주었고, 장식품으로 화려한 촛대까지 사주었습니다. 저의 관할 구역뿐만 아니라 조선 전국적으로도 이곳만큼 훌륭한 공소집은 없을 것입니다.”
 
1850년대 철종 연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도처에서는 이와 같은 독립적인 교회 건물로 ‘공소집’이 세워지거나 적어도 ‘공소방’이 따로 마련된 듯하다. 이러한 사실은 1857년 베르뇌 주교가 신자들에게 보낸 사목교서인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베르뇌 주교는 이 사목교서에서 “평시에도 공소에 있는 때는 노는 때가 아니다. 영혼을 다스릴 땐 주를 생각하여라. 신부[神師] 앞에 오는 교우가 마땅히 버선 신고 망건 쓰고, 소창옷 입고, 몸 두기와 말하는 법은 나라 풍속대로 하여, 그 앞에 교우끼리 절하고 마구 수작하지 못하며, 공소 아랫방이라도 모여 놀지 못할 것이오, 수렴하고 조용히 있어 온전히 각각 신공에 힘쓸 때니라.”고 권고했다.
 
 
남은 말

이 교서에 나오는 ‘소창옷’은 소매가 좁은 두루마기로서 당시 서민들이 갖추어 입던 남성용 정장이었다. 베르뇌 주교는 이와 같이 공소에서 지켜야 할 복장이나 행동에 대한 규범을 제시하면서 공소방은 성사가 집전되는 특별한 곳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선교사가 방문하지 않은 평시에도 공소는 노는 곳이 아니므로 각별히 몸가짐에 조심하도록 일깨웠다. 여기에서 그는 선교사의 판공 찰고가 없는 평시에도 공소방은 별도로 비워져 있었음을 넌지시 제시해 준다.
 
그러나 전례를 위한 독립적 공간들은 곧이어 불어닥친 박해로 말미암아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우리 교회가 전례를 위한 독립적 건물을 가지게 된 것은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1890년대 이후부터였다. 당시 교회당을 합법적으로 건축하는 일은 신앙 자유의 큰 상징이었다.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의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9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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