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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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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3 ㅣ No.321

[레지오 영성]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



우리나라는 5년에 한 번씩 인구센서스를 통해서 사회 전반을 진단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기초자료를 만들고 있습니다. 특별히 10년마다 한 번씩은 종교부분 조사를 추가하게 되는데 지난 2005년 인구센서스 종교부분 결과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1995년 이후 10년 만에 실시한 종교 인구 조사에서 10년 동안 전체 종교 인구가 237만 3천명 늘어났는데 그중 천주교 신자가 219만 5천명이나 된다는 통계였습니다.

즉 새로이 늘어난 종교 인구는 거의 대부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템플스테이를 통한 불교문화의 체험이나 동양문화나 수행 등에 대한 관심 증대로 새로운 부흥기가 도래했다고 흐뭇해하던 불교에서는 신도수가 기대보다 크게 늘지 않아 천주교 신자 증가율의 20% 정도 밖에 되지 않는 40만 명 정도의 증가가 있었으며, 개신교의 경우에는 일부 보수교단에서 주장했던 1300만 신도 수는 그야말로 바램에 불과했으며 오히려 14만 4천명의 신자가 떠나서 3대 종교 중 유일하게 교세가 하락한 종교가 되었다는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2005년의 인구센서스 종교부분 결과를 두고 많은 토론과 연구가 행해졌으며, 천주교의 급성장의 이유로 2000년 대희년을 전후로 전개된 선교운동이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나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호감, 종교관련 비리와 얽힌 사회적 문제가 천주교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했기 때문에 반사이익을 보았다거나 다종교 사회인 한국에서 다른 종교에 대해 열린 입장을 취하여 젊은 층으로부터 호감을 샀다는 등 여러 요인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103위 성인의 탄생은 신앙이 꽃피는 계기

물론 위와 같은 여러 요인들이 천주교의 급성장에 많은 영향을 끼쳤겠지만 저는 또 다른 요인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선조들의 모범이 큰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테르툴리아누스 성인의 말씀 그대로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이 되어 한국 사회에서 꽃피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1909년 7만 명에서 1949년 15만 명,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190년인 1974년 백만 명의 신자수를 달성하였는데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아 교황 요한바오로 2세 방한과 103위 성인 탄생 등을 계기로 급성장을 거듭하여 1986년 신자수가 200만 명을 넘었고, 1992년 300만 명, 2000년 400만 명으로 그 수가 증가하였으며, 2008년에는 인구 500만 명을 넘어선 것입니다. 1984년의 한국 순교 성인 103위의 탄생은 100여년 박해의 역사에 뿌려진 신앙의 씨앗이 꽃피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사실 103위 성인의 탄생은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자 현양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103위 성인의 탄생은 우리 교회의 노력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은총이요, 각 나라 교회는 자신의 나라의 성인을 가져야 한다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신념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유로 한국 성인의 탄생은 순교자 현양의 결과가 아니며 오히려 한국 천주교회는 103위 성인의 탄생을 계기로 순교자 현양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소문 성지는 44분의 성인이 순교한 곳

그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장소가 서소문 성지입니다. 서소문 성지는 103위 성인들 중 44분이 순교한 거룩한 장소입니다. 하지만 1984년 103위 성인의 시성 때까지 서소문 밖 처형장의 정확한 위치를 교회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서소문 밖을 내려다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조 고딕성당인 중림동 약현성당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한국 교회는 1984년 12월 22일 임송자(리타) 작가님의 현양탑을 처형장으로 추정되는 서소문 공원의 한편에 세웠습니다.

이러한 시도들이 본격적인 순교자 현양 사업이 궤도에 오르게 된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잊혔던 서소문 성지를 기억하고, 잊고 있었던 우리의 순교 선조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103위 성인의 시성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순교자와 관련된 흔적들을 찾고 돌아보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한국교회의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한국 교회의 남다른 출발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부심과 기억이 많은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그 열매 중 가장 큰 열매가 복음화인 것입니다.

서소문 성지는 조선 시대 공식 사형 집행터입니다. 조선 시대 사형수의 사형죄목은 크게 모반죄와 일반 범죄로 나뉘었는데, 그중 모반죄의 경우는 형장이 일정치 않았지만, 나머지 사형수들은 주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형이 집행되었던 것입니다.

서소문 밖이 처형장으로 사용된 가장 큰 이유는 유교 경전인 오경 중 하나인 "예기(禮記)"에서 말한 "형장은 사직단 우측에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른 것입니다. 또한 전통적 사상에 따라 방위를 논할 때 서쪽은 오행(五行)으로 쇠금(金)에 해당되고, 오상(五常)으로는 의(義)에 적용되었기에 서쪽은 ‘쇠로써 의를 행하는’ 형정(刑政)과 관계를 맺게 된다고 해석했던 것이며, 또한 서향(西向)은 가을을 상징하며 인생의 노쇠기 및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소문과 숭례문에 걸쳐 칠패시장이 형성돼 있었고, 대륙으로 향하는 의주로와 바다로 향하는 애오개(아현고개)길이 교차되는 사거리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참수형을 행하는 데 용이한 백사장, 즉 만초천이 있었기에 사형을 집행하는 또 다른 목적인 경각심을 주기에 적당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희생어린 활동이 세상을 향한 증언

바로 이러한 서소문 밖 처형장에서 103위 성인 중 평신도 대표인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비롯하여 효주 아녜스, 효임 골롬바 동정 자매 등이 순교하였으며, 한국 천주교회의 첫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 순교자를 비롯하여 유명한 백서의 주인공인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가 피 흘려 신앙을 증언하였습니다.

때때로 추종세력의 모반을 두려워 한 경우, 즉 신부님이나 주교님의 경우에는 새남터나 갈매못 군영에서 사형을 집행하고, 1839년 기해년의 박해 막바지에 서소문 밖 칠패 상인들이 “피 비린내 나는 처형”에 항의하자 장소를 옮겨 ‘당고개’에서 10명의 순교자의 처형을 집행하기도 했습니다.


병인박해와 같이 프랑스 선박의 침입이라는 특별한 상황으로 인해 절두산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1886년 한불수호통상 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을 때까지 서소문 성지는 우리 신앙 선조들이 목숨으로 하느님을 증언한 곳이며, 희광이의 칼이라는 쇠(金) 앞에서 하느님의 의(義)를 증언한 소중한 곳입니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피는 결국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씨앗이 되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 뿐 만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신앙의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순교자에 대한 관심, 그리고 순교 성지에 대한 사랑은 우리 신앙의 의미를 되새기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세상의 모든 유혹을 이겨내고 소중한 목숨까지 내어놓았던 순교자의 증언을 생각하면, 수많은 유혹 속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참으로 소중하게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줍니다.

세상 안에서 순교자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따라 사는 레지오 단원 여러분, 순교자를 기억하고 순교 성지를 방문하는 것은 그분들의 세상을 향한 증언을 듣는 일이며, 더 나아가서 우리도 그렇게 증언의 삶을 살아야 함을 결심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순교자의 피가 그리스도인의 씨앗’이 되었듯, ‘우리의 희생어린 활동이 세상을 향한 증언이며,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씨앗’이 됨을 기억합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11월호,
이준성 요셉(신부, 서울대교구 중림동 약현성당 주임, 서소문 성지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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