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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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가톨릭 신학6-7: 하느님을 믿나이다 - 하느님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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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3-13 ㅣ No.4003

[가톨릭 신학06] “하느님을 믿나이다” : 하느님의 이름 (1)

 

 

2022년 12월 24일 우리나라의 첫 달 궤도선인 ‘다누리’가 지구 영상을 찍어 보내왔습니다. 이 사진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달나라의 토끼를 상상하듯, 달에서는 지구나라의 무언가를 상상할 것 같기도 합니다. 반지름이 6400km인 이 지구에서 우리가 디디고 있는 땅은 해양지각이 5km, 대륙지각의 가장 두꺼운 곳이 70km 정도 됩니다. 그러니 이 지구에서 100년을 산다 해도 우리는 광대한 우주 안 46억 년의 나이를 먹은 지구라는 아주 작은 행성에서 마치 동그란 빵의 얇은 껍데기 같은 데에 ‘잠깐’ 붙었다가 사라지는 셈입니다. 이런 자연과학적 사실을 직시하는 것은,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에 방해가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나는 어떤 하느님을 믿고 있는 걸까요? 성경은 지구는 평평하고, 해와 달과 별이 지구를 돌고 있다는 우주관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고에서 표현되는 하느님이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의미 있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성경이 단순한 자연과학 서적이 아니라 신앙고백서라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말이 성경에 쓰여진 것이 모두 거짓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 역사적 사건의 어떤 핵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다만 성경의 일차적 목적은 신문기사와 같은 사실 전달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일을 하셨고, 그 일 안에서 어떤 분으로 드러났는지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증명 가능한 과학 지식을 믿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어떤 하느님을 믿는가와 관련해서 하느님 이름의 계시를 살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느님은 “나는 있는 나다.(YHWH)”라고 답하십니다. 이를 철학적 용어로 ‘자존자’, 즉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나는 있는 나다.’라고 번역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이 말씀은 질문에 대한 응답의 거부입니다. 당신 이름을 묻는 마노아에게 하느님은 “내 이름은 무엇 때문에 묻느냐? 그것은 신비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판관 13,18) 성경에서 이름이란 그 존재의 실존을 규정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규정하는 순간 그 존재는 경계선, 한계를 갖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볼 때 하느님은 당시 다른 이방인들의 신들과 같은 수준의 신이 아니며, 본질적으로 참 하느님으로, 신비로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YHWH를 직접 발음하지 않고 ‘아도나이’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한편 신학자들은 이 이름이 적극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고 봅니다. 이 단어가 ‘~을 위한 존재’인 하느님을 표현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의 이름은 ‘너와 함께 있는, 있는 나’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있는 나’로서 계시는데, 동시에 미래에도 나와 함께 계신 분임을 당신 이름 안에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체험한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과거에도 나와 함께 있는 ‘있는 나’이신 분이며,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나와 함께 계시는 ‘있는 나’”이신 분입니다. 내가 언제 어떤 상황에 있든 함께 계시는 하느님, 이 하느님이 구약성경이 고백하는 가장 근본적인 신앙의 하느님입니다. [2023년 3월 12일(가해) 사순 제3주일 서울주보 4면, 최현순 데레사(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

 

 

[가톨릭 신학07] “하느님을 믿나이다” : 하느님의 이름 (2)

 

 

‘야훼(YHWH)’라는 하느님의 이름에 ‘~을 위해 함께 계신 하느님’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말은 이 이름에 대한 하느님 자신의 설명을 전하는 구약성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탈출기 34장 4-9절을 보면 하느님은 모세에게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하신다.” 신학자들은 이 말씀이 바로 하느님 이름에 대한 설명이라고 봅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추상적이고, 인간의 삶과 무관하신 분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고 너그럽고 자애로운신 분으로 체험됩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함께 계신 하느님입니다.

 

이런 하느님이 인간 역사 안에 결정적으로 들어오시는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서 7장 14절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를 인용하면서 임마누엘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마태 1,23) 예수님은 “인간 역사 안에 함께 계시는 ‘있는 나’”라는 하느님의 이름이 사람이 되신 분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이 말은 하느님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삶의 기쁨과 고뇌, 슬픔을 맛보신 그런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셨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대사제가 되셨습니다.(히브 2,17 참조)

 

한편 ‘하느님의 이름’이라는 말은 주님의 기도에도 등장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는 기도를 알려주신 주님은 하느님의 이름이 사람들 속에서 오남용될 수도, 그래서 더럽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아셨던 것 같습니다. 특이한 것은 ‘거룩해지다’라는 수동태가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나자렛 예수>라는 책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이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하느님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도록, 곧 ‘우리와 함께 계신 그분’을 드러내시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실수록 그분의 거룩한 이름은 빛납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언급된 또 다른 기도는 우리가 장엄축복을 받을 때 듣게 되는데 시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우리의 도움은 주님의 이름에 있으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로다.”(시편 124,8) 우리는 살면서 많은, 그리고 다양한 어려움을 마주하고, 그럴 때 도움을 구합니다. 그 도움은 사람일 수도, 물질적 또는 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고, 당연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기도는 여기에 우리가 잊으면 안 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즉 우리의 궁극적 도움은 ‘주님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함께 계신 하느님이요,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 어떤 것도 하느님보다 더 크진 않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성모님의 노래 첫마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루카 1,46)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찬송하다’로 번역한 이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크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겪는 그 어떤 것보다도 하느님이 ‘항상 더 크신 분’임을 내 영혼이 고백하는 것이지요. 성경이 고백하는 ‘하느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힘이요 희망입니다. [2023년 3월 19일(가해) 사순 제4주일 서울주보 4면, 최현순 데레사(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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