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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한 선교사의 눈에 비친 파라다이스 파푸아뉴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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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5 ㅣ No.152

한 선교사의 눈에 비친 파라다이스 파푸아뉴기니

 

 

1. 시작하면서

 

한국 천주교회 설정 200주년 기념 행사를 몇 년 앞둔 1981년 11월 8일 명동 대성당에서는 한국 교회 역사에 큰 획을 긋는 하나의 중요한 행사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국 천주교회 사상 처음으로 파푸아뉴기니에 4명의 선교사를 파견하는 행사였다.

 

선교사 파견! 이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꿈만 같던 기적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훌쩍 지난 오늘 이 말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파푸아뉴기니라고 하면 아프리카 어디에 있는 나라인 줄 알고 필자에게 열악한 환경과 가난으로 대변되는 대륙 아프리카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고 안타까워한다. 첫 선교사 파견 후 여러 차례 TV와 교회 신문을 통해 소개되었는데도 아프리카의 기니로 착각하는 것 같다. 실제로 파푸아뉴기니에서 선교 생활을 할 때 가끔 유럽이나 한국에서 발송된 우편물이 아프리카의 기니를 거쳐 무려 몇 개월에서 1년 만에 들어온 경우가 더러 있었으니, 이쯤이야 애교로 봐 줄만하다.

 

이제 소개하고자 하는 파푸아뉴기니는 아프리카 대륙이 아닌 오세아니아주의 남태평양에 위치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나라이다. 이곳은 한국외방선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의 외방선교차원에서도 큰 의미가 있는 곳인데, 필자의 짧은 견해와 경험으로 얼마나 잘 소개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풋내기 선교사로서 몇 년 동안 파푸아뉴기니에서 활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 곳의 자연과 사람들, 사회와 문화적 특성, 정치와 경제 생활, 그리고 교회의 선교 활동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2. 파푸아뉴기니의 자연과 사람들

 

한국의 지형을 호랑이 모습에 비유한다면 아마도 파푸아뉴기니는 남태평양에 떠 있는 한 마리의 거대한 악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란자야 섬의 동쪽(서쪽은 인도네시아령으로 현재 독립 운동을 펼치고 있다.) 부분과 크고 작은 주변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는 이 나라는 무려 남한 면적의 4배나 된다. 거의 대부분의 면적은 열대 자연림으로 형성되어 있고 석유, 금, 은, 동을 비롯하여 목재, 커피, 사탕수수, 야자수 등 자연 자원과 수자원이 풍부한 나라로서 세계에 몇 안 되는 자연의 보고(寶庫)이다. 반면에 경작지는 전체 면적의 0.1%에 불과하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와는 달리 연중 두 계절로 11월에서 3월까지의 우기와 4월에서 10월까지의 건기로 나뉘어 진다. 건기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아 대부분의 시내와 강은 바닥을 드러내고 악어 껍질처럼 땅바닥이 쩍쩍 갈라진다. 들판과 산의 초목들도 말라 마치 우리의 가을을 연상케 한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산과 들에 불을 질러 먹이를 구하고, 화전을 일군다. 부족의 거의 모든 젊은 남자들이 동원되어 공동으로 화전을 일구고,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야생돼지 몰이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아이들과 아낙들은 멀리까지 마실 물을 찾아 나서야 하는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이렇게 가뭄이 계속되면 빗물을 받아 탱크에 저장하여 사용하는 학교나 병원 등의 공공기관들이 물 부족으로 문을 닫는 경우가 자주 일어난다. 그리고 밭의 농작물이 타들어 가는 경우가 많아 먹을거리도 턱없이 부족하게 된다. 물론 그때마다 정부는 세계식량기구에 도움을 호소하여 주민들에게 약간의 식량을 배급하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이다. 이 건기 중에 단 한가지 좋은 점은 적어도 극성스럽게 달려드는 모기나 온갖 곤충으로부터 조금이나마 해방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우기가 되면 거의 매일 비가 내린다. 잦은 폭우는 지형을 바꾸어 놓을 정도이다. 사람들의 왕래를 어렵게 만드는가 하면 때때로 계곡과 바닷가에 형성된 마을을 덮쳐 적잖은 재산과 인명 피해를 가져다 준다. 예로부터 한 나라의 평화와 번영에 중요한 부분이 치수(治水)라고 했건만, 매번 반복되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대책 없이 그저 자연의 힘에 굴복하며 운명이려니 하고 산다. 물을 가두어 사용할 대책도, 홍수에 대비하여 피해를 줄일 능력도 없다. 대부분의 지역 주민들은 정부의 정책에 관심도 없고, 기대도 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파푸아뉴기니의 사람들은 대부분 자연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으며, 자연에 대한 감사와 두려움이 그대로 그들의 삶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학교나 종교 기관의 교육과는 달리 아직도 마을이나 부족 단위로 악운을 멀리하고 행운을 가져다 주기를 바라는 토템 사상에 바탕을 둔 종교 의식이나 축제가 연중 행해진다.

 

 

3. 파푸아뉴기니의 사회와 문화적 특성

 

세계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각기 그들만의 독특한 사회를 형성하여 살아가며 고유한 문화적 특성을 간직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파푸아뉴기니 또한 예외는 아니다. 파푸아뉴기니의 사회와 문화를 한마디로 소개한다면 마오리 끼끼1)의 저서 「끼끼」(부제목, -내가 겪은 일 만년-)에서 알 수 있듯이 일 만 년의 시간이 동시대에 살아 숨쉬는 곳이다. 돼지의 머리수가 아직도 부의 상징으로 결혼 예물이나 부족간의 거래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곳, ‘부아이’2)가 손님을 접대하고, 친교를 나누며, 화해를 시도하는 자리에서 그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는 매력과 힘이 살아 있는 사회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인을 알려면 먼저 한국인이 즐겨 먹는 된장과 김치, 누룽지 맛을 알아야 하듯이, 파푸아뉴기니 사람을 이해하려면 먼저 돼지와 ‘부아이’ 그리고 조개로 만든 각종 상징물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2-3만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서서히 고산지대에서 바닷가를 중심으로 정착하여 농경 사회를 이루고 살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1512년 두 명의 포르투갈 탐험가에 의해 처음으로 외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그 후 영국(동남 지역: 파푸아), 독일(동북 지역: 뉴기니), 네덜란드(서쪽 지역: 지금의 인도네시아령)에 의해 세 지역으로 분할 통치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령 파푸아와 독일령 뉴기니가 오스트레일리아령으로 넘어가 통합되어 통치되다가 1975년에 독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구는 현재 약 5백 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인구의 96%는 멜라네시안이고 나머지 4%는 여러 소수 민족들, 그리고 일찍 이민 온 중국인과 유럽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형이 험난한 관계로 대부분 한 지역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부족 단위(One Talk System)를 형성하여 정착한 결과 무려 750여 개의 서로 다른 부족 사회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도 도시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이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부족 단위의 공동 생활을 지켜 나가고 있다. 영어가 공식 언어로 채택되어 학교와 기타 공공기관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피진어(Pidgin English)와 모투어(Motu)가 공통 언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여전히 각 부족 단위의 언어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부족 단위의 생활 양식은 세련되고 품격 높은 문화는 아니라 하더라도 원초적 인간 공동체 삶과 깊이 관련된 다양한 문화를 보존하고 있다. 부족간의 분쟁과 평화를 위한 춤과 노래, 씨를 뿌리고 거두며 신께 감사 드리고 올리는 예식,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들은 춤과 노래로 이 모든 것을 승화시켜 나간다. 춤과 노래는 그들의 삶이다. 그것은 그들의 감사요, 애환이요, 신께 올리는 울부짖음이고 동시에 새롭게 태어나는 힘이다. 삶과 죽음이 함께 어우러져 공유하는 이러한 그들만의 삶의 양식에서 아직도 그들이 얼마나 자연에 부합되어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아직도 그들에게 이러한 문화적 요소는 삶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어울리겠다. 또한 이러한 그들의 의식과 문화는 그리스도교 전례 안에서도 고스란히 표현된다.

 

그래서 인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자주 파푸아뉴기니를 찾는다. 그들의 삶에 곧, 주거 형태, 식(食) 생활, 농사 방법, 자연과 동물에 대한 숭배 의식 등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석기시대의 생활 형태를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여인이 아이를 낳으면 부정한 상태이니 일정 기간 음식을 가려먹고, 바깥 출입이 통제된다. 또 사람이 죽으면 그 원인을 찾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 볼모가 되어 일정 기간 동안 마른 음식만 먹고 출입을 금하는 규정을 지켜야 한다. 그것은 한 죽음에 대한 인간적 잘못과 소홀함에 대한 보속이요, 그 죽음이 불러올 모든 불운을 막기 위한 것이라니 매우 종교적이라 하겠다. 한번은 부활 대축일을 앞두고 공소를 방문했는데 마을 젊은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농사철이라 모두 숲(bush) 속으로 들어갔단다. 그것은 특정 작물(Yam)3)을 심고 거둘 때 금기시 하는 행사였다. 이렇게 아직도 파푸아뉴기니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문화는 상품화된 하나의 생활 방편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녹아 있는 삶이라 하겠다. 그러나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자본주의의 세력이 부를 앞세워 그들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삶을 뒤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노래와 춤을 팔게 하고, 그들의 생활 근거지를 송두리째 앗아가 버리는 무자비한 상업주의의 행패가 날로 심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선교에서 중요시해야 할 부분이 바로 그들의 소중한 삶과 터전을 지켜 주는 것, 더 나아가서 이러한 소중한 문화가 복음에 비추어 올바로 인정받고 발전되어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 여겨진다.

 

 

4. 파푸아뉴기니의 정치와 경제적 현실

 

필자가 파푸아뉴기니에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키나’(Kina-파푸아뉴기니의 화폐 단위)는 미국의 달러보다 우세했다. 그러나 재정 적자가 증폭되자 키나의 변동 환율제를 채택하였고, 당시 세계적 문제가 되었던 환율 폭락과 겹치게 되자 키나의 가치는 사정없이 무너져 내림으로써 물가 상승과 임금 인상 등의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현재는 미화 1달러에 3키나 정도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이 직면한 문제이지만 정치인들의 부정 부패가 심각하며, 그 때문에 현직에서 퇴출되는 정치인도 적지 않다. 한국 정치인들이 고질적 지역주의와 연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면, 파푸아뉴기니의 정치인들은 부족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나라를 위한 정치인이기보다 자기 부족을 위한 정치인이라고 평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정치를 기대하는 것은 다 썩은 고목 나무에 기대는 격이 된다.

 

그래도 파푸아뉴기니는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향을 받아 민주적이고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추어진 정치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의식과 사회 저변을 형성하고 있는 부족 사회 제도의 병폐가 건전한 사회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파푸아뉴기니의 1인당 GNP는 미화 약 2천 5백 달러 정도로 추산된다. 그러나 이 수치는 10%의 사회 상위층 사람들이 50% 이상의 부를 소유할 정도로 빈부의 차가 크다고 보면 그 실상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러한 정치 경제적 문제는 학교와 병원 등을 운영하는 데에도 적잖은 차질을 가져다 주며, 교육받은 젊은이들의 고용 문제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예를 들면, 재정 부족으로 공무원들의 월급이 몇 개월씩 체불(滯拂)되는가 하면, 교육 자료와 약의 부족으로 학교와 병원이 폐쇄되고, 실업 상태의 젊은이들이 술, 마약, 강도 행위 등으로 사회 문제가 심각하다. 60-70년대의 한국이 그러했듯이 현재 파푸아뉴기니는 도시로 몰려드는 젊은이들로 심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때 이 나라의 수도(Port Moresby)에서는 일없이 길거리를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모두 잡아서 그들 부족에게 돌려보내는 웃지 못할 정책이 벌어진 적도 있었으니, 그 상황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직도 파푸아뉴기니는 국민의 85%가 농민으로 농촌 중심의 사회이지만 농작물의 가격 폭락으로, 국민의 대부분은 형편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도 그들 스스로 파라다이스라고 말하듯이 비교적 좋은 자연 환경 덕에 먹고 살기는 하지만 자녀 교육비, 병원 치료비, 생필품 구입 등은 농산물 판매 수입으로 턱없이 부족하다. 당연히 그들의 생활 환경은 열악하기만 하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더 잘 살아 보겠다는 도전 의식의 부족과 비교적 좋은 자연 환경으로 그리 노력하지 않아도 먹고 살기에 큰 어려움이 없어 자연스럽게 습성화된 생활 방식에도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오늘날 개발도상국들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불안정한 정치 경제 체제에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의 복음 선교는 우리 교회의 사회 교리에 따른 정치 경제 질서의 복음화, 곧 사회 제도 복음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5. 교회의 선교 활동

 

이곳에 그리스도교의 선교는 1848년 프랑스의 마리스타 수도회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 후 여러 종파의 선교사들이 선교 활동을 펼쳐온 결과 오늘날 파푸아뉴기니는 엄연한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다. 천주교 22%, 루터교 16%, 성공회 25%, 개신교 23%, 그 나머지는 토착 신앙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천주교회는 4개의 대교구와 14개의 교구를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 1960년대 이후 교구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필자가 몇 년 동안 선교 활동에 참여했던 마당(Madang) 대교구는 1896년 말씀의 선교 수도회(SVD) 회원들의 선교 활동으로 시작되었으며, 현재 이 대교구에는 30여 개의 본당과 300여 개의 공소를 중심으로 하는 직접 선교 활동과 학교(초등학교 약70개, 중고등학교 3개, 대학교 1개, 직업학교 6개, 소신학교)와 병원(진료소 약 10여 곳), 농장 및 상점 등을 통한 간접 선교 활동을 펼쳐 나가고 있다. 약 20여 개의 수도 선교 단체에서 파견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를 포함하여 200여 명의 선교사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고, 원주민 성직자, 수도자들의 양성과 평신도 봉사자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며 지역 교회의 성장과 사회의 복음화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한국외방선교회는 1981년부터 이곳 파푸아뉴기니의 마당 교구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활동해 오고 있으며, 4명의 첫 선교사에 이어 지금까지 9차례에 걸쳐 17명의 선교사를 파견하여 활동해 왔고, 현재 6명의 선교 사제들이 본당과 학교에서 선교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선교사 생활은 성사 집행과 교회 운영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제반 문제에 함께 해야 하는, 한마디로 족장 중의 족장, 종 중의 종이 되어야 한다. 자신을 위해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은 기본이고, 때로는 종지기와 성당 관리인으로서 전기, 수도, 목수 일까지 스스로 해야 한다. 나아가 언제나 대기 상태에서 환자가 생기면 병원까지 태워 가고 치료가 끝나면 집까지 모셔다 드려야 하는 구급차 기사가 되어야 한다. 또한 우편물 배달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생필품을 보급하는 일도 선교사의 몫이다. 이렇게 살다 보면 그야말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아마도 행복한 비명이리라. 그러나 늘 마음 아픈 것은 이렇게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녀도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육이 백년 대계(大計)라면 선교는 백년이 아니라 천년, 만년 대계라 하겠다.

 

필자가 처음 선교사로 파견되었을 때, 크신 하느님이 더 크신 분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이 더 큰사랑으로, 보잘것없는 나를 통해 자비로우신 분의 자비가 더 크게 드러나도록 살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게 느껴졌다. 산적해 있는 일 앞에서 하느님께 불평하고, 사람들에게 큰 소리를 치며 화를 내는 나 자신을 보게 된 것이다. 그 후, 이제 그만 불평하고 큰 소리 치지 말며 화내지 말자고 얼마나 나 자신에게 다짐했던가. 결국 나는 나를 변화시키고, 그들을 변화시키고, 우리 환경을 변화시켜 나가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나를 통해 일하시는 그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푸아뉴기니의 짧은 경험에서 선교는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선교는 더 이상 교회의 교세 확장이 아니라 사회와 개인의 복음화에 초점을 맞춰,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자신을 봉헌하는 삶이요, 그러한 삶을 통해 자신의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행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오늘의 복음 선교가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가장 힘있는 복음 선교는 증언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6. 마무리하면서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는 한 동료 선교사는 선교 자금이 빠듯해서 가끔씩 일주일 동안 먹고 살아야 할 자신의 양식을 포기하고 주일날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사탕을 산다고 했다. 사탕 하나에 기뻐하는 아이들의 그 소박한 기쁨을 뺏어 버리고 싶지 않아서 일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선교는 파견된 선교사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파푸아뉴기니의 경우, 선교지 본당의 사정은 참으로 가난하다. 본당과 공소를 모두 합쳐 일년 내내 모은 헌금이 고작 1000키나도 채 안 된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겨우 50-60십 만 원 정도이다. 그러니 선교사는 자신의 생활비와 선교 활동 자금을 가지고 가서 살아야 한다. 이것은 선교사를 파견한 모(母) 교회의 후원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 동안 기도와 후원을 아끼지 않으신 한국외방선교회와 한국 교회의 외방 선교 사업에 동참하신 모든 분들에게 이 지면을 통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더욱이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의 가계(家計)를 꾸려 가기에도 빠듯한 여건에서 기꺼운 마음으로 시간과 노력의 대가를 선뜻 봉헌한 것이기에 그 큰 관심과 사랑에 더욱 감사 드린다. 많은 분들의 기도와 희생이 선교사를 통해 지구 저편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열매 맺고 있음을 기억하고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리고 싶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알리는 선교는 바로 나의 관심과 작은 봉헌에서 시작된다. 얼마 안 되는 학비가 없어서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 병원 치료비는커녕 병원까지 가는 차비조차 없어 아픈 채 그대로 집에서 참아야 하는 사람들, 영양 실조와 질환으로 고생하는 아이들과 노인들, 등등을 보면서도 충분히 돌보아 줄 수 없었던 아픔을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함께 나누기를 바란다. 이제 우리는 우리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가는 이들과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하겠다. 십시일반! 나의 작은 정성과 기도가 선교사들을 통해 얼마나 큰사랑으로 변하여 선교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되는지를 기억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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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대 부수상을 역임하였고 1978년 한국을 방문하였음.

 

2) ‘부아이’(Buhai)는 쓴 열매(bitter-nut)와 ‘다카’(Daka)의 열매, 잎, 줄기 그리고 ‘깜방’(Kambang: 조개를 갈아 만든 가루)을 섞어서 만든 것으로 씹으면 붉은 색의 액체가 생기며 환각 증상을 일으킨다. 이것은 파푸아뉴기니 사람들이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 좋아하는 기호 식품이다. ‘부아이’는 한국의 술과 같은 역할을 한다.

 

3) ‘얌’(yam)은 열대성 뿌리 식물로서 고구마와 비슷하고, 파푸아뉴기니 사람들의 중요한 식량이다. 그들은 하늘이 자기들을 위해 내려 준 선물이라고 말한다.

 

[출처 : 교황청전교기구 한국지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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