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강론자료

2011-0403.....사순 4 주일 가해

스크랩 인쇄

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1-04-02 ㅣ No.1030

사순 4 주일(가해)
1사무엘 16.1.6-7.10-13ㄱ        에페 5,8-14        요한 9.1-41
2011. 4. 3. 등촌3
주제 : 죄 있는(?) 사람
세상살이에서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질문하면, 우리는 퍼뜩(=어떤 생각이 갑자기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모양) 돈과 건강에 연결된 조건을 먼저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돈과 건강도 행복을 이루는 기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만족할 만큼의 돈과 건강이 어느 정도인지는 다르지만, 이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기를 원할 것이고, 건강에 대한 것도 사정은 비슷할 것입니다. 즉 돈과 건강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참 어렵다는 것입니다. 혹시 다른 기준은 없을까요?
 
지난 38, 8구역부터 시작하여 엊그제 6구역까지 ‘7개 구역의 가정을 하면서 생각 외로 들었던 말의 하나가 저는 죄가 많아서.......’라고 생각하며 말끝을 흐리며 그 말로 성당에 나오지 않는 핑계를 대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표현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말하는 죄가 있고 없음에 대한 것도 행복의 기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행복할 확률이 낮다고 말할 수는 있지는 않을까요?
 
오늘 사순 4 주일, 복음말씀은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면서 많이 부딪히는 이 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부활성야미사에서 노래하는 부활찬송에도 들어있는 아담의 죄가 세상에 구원을 불러들였다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도 있기는 합니다만, 일부러 하느님의 은총이 내 삶에 오게 하려고 없는 죄도 있다고 말하고, 적은 죄도 많다고 말하며, 죄를 치우거나 없앨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내 삶을 바꾸어주실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행동을 할 생각도 없이 말만하면 그래도 옳은 자세일까요? 세상 모든 사람이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나를 설득한다면, 나는 과연 그들의 말에 따라 바뀌는 사람이 될까요?
 
사람의 눈이 멀었다는 것이 어째서 죄와 연결되어야 하는지 복잡한 신학적인 문제는 덮어두고, 우리가 과연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심판의 자세로 대하고 살아도 좋은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이 멀었던 사람을 보시면서, ‘하느님의 영광이 그 사람을 통해서 드러나기 위해서라고 우리가 생각할 법한 자세와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내 귀를 울린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 참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눈으로 잘 보는 사람으로 살고 있으니, 구약성경의 율법에 따르면, 죄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이 자기 삶을 돌이켜, 죄가 없는 사람처럼 살지도 않고, 죄가 없는 사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살고 있지도 않는다면, 말로는 죄가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우길지 몰라도, 실제로는 죄와 아주 친숙하게 사는 사람일 거고, 사실은 죄를 내 삶에서 떼어버리고 남다른 자세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인의 삶과 죄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 모습뿐만이 아니라, 말이나 생각으로서도 그렇게 사는 것은 옳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내가 내 삶에 적용하는 규정을 다른 사람을 대하면서도 같게 적용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어떠하겠습니까?
 
사람들의 눈에 훤칠한 키와 시원스런 용모를 가진 사람을 보면, 뭔가 좋은 사람으로 보기 쉽습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에, 애써 벌어들인 상당히 많은 금액의 돈을 쓰면서 예쁘고 멋있게 보이도록 모습을 바꾸려고 하고, 겉을 꾸미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겉모양이 달라지는 것 못지않게,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푼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서 상권, 첫 번째 독서는 이스라엘, 히브리민족의 두 번째 임금이 선택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임금이었던 사울은 끼끗하고 훤칠한 사람으로서, 남들보다 머리 하나 만큼은 키가 더 큰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그렇게 훌륭한 용모를 갖춘 사울이 임금으로서 마음이 따르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되자, 사람의 기준을 벗어나서 새로운 기준이 적용되는 사람을 선택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로 살아왔던 사무엘마저도 겉모습이나 키가 컸던 엘리압을 보고, 하느님께서 그를 선택하신 줄 알았다가 헛다리짚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히브리 민족의 두 번째 임금으로 선택된 사람은 아직 어린나이였던, 이사이 집안의 일곱 형제 중 막내였고, 사무엘 예언자가 벌인 잔치에 참여할 자격도 얻지 못한 소년으로 그 순간에는 양을 치고 있었다는 것이, 사람의 기준과 하느님의 기준이 달랐다는 것을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현실에서 죄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말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자세를 가진 사람이냐에 따라, 같은 말을 해도 평가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가 세상일이 하도 바빠서, 하느님의 뜻을 기억하거나 실천하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면 안 될까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고해성사를 한번만 하기만 죄가 모두 없어진다고 하는데, 지금은 내가 편한 대로 살고 나중에 한꺼번에 몰아서 죄를 용서받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말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정방문을 하고, 가족들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묻고 본당신부로서 이러저러한 해결책을 말을 하는 것은 제가 말하는 대로 완벽하게 실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실천하면서 살고 있는 기준을 좀 더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고, 죄 가운데서 살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람도 다른 삶의 방법이 있음을 알려주는데 목적이 있는 것뿐입니다.
 
몸뚱어리의 눈이 먼 것만을 탓하면서 마음의 눈이 먼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빛을 따라 살겠다고 말하면서 빛을 향하여 몸을 돌릴 생각은 하지 않고, 내 앞에는 어째서 어둠만이 가득하냐고 묻는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빛으로 오신 분을 우리는 어찌 대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세상에서 죄를 가까이에 두면서도 다르게 사는 방법이 되겠습니까?


94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