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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신앙의 해와 우리의 복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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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1 ㅣ No.290

[레지오 영성] ‘신앙의 해’와 우리의 복음화



우리는 주님의 은총 가운데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인사말은 거두절미하고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에게는 묵은 ‘나’를 내보내고 ‘주님’을 맞이하는 신앙의 송구영신(送舊迎新)이 ‘신앙의 해’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활기차게 일어나길 기원해본다.

새해 벽두에 ‘왜 신앙의 해인가?’라는 물음을 새삼 던져보고 싶다. ‘신앙의 해’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 50주년을 맞이하여 선포되었다면, 또 다시 ‘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던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 ‘신앙의 해’ 이해에 가장 유익할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를 선언하신 교황 요한 23세께는 ‘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인가?’라는 질문에 “교회의 aggiornamento를 위해서”라고 천명하셨다.

Aggiornamento라는 말은 ‘오늘에 맞게’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오늘이 겨울이라면 무슨 옷을 입겠는가? 오늘에 맞게 겨울옷을 입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지난겨울 한 번 겨울옷을 입었다 해서 여름이 되어 찜통더위인 오늘에도 겨울옷을 입겠는가? 여름인 오늘은 오늘에 맞게 여름옷을 입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aggiornamento이다.

교회의 aggiornamento는 교회가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해선 오늘의 시대징표를 읽고 오늘의 시대에 맞게 오늘(현대)화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표어로 삼은  aggiornamento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말씀이 사람이 되신”(요한 1, 14) 강생의 신비가 교회를 통하여 ‘오늘에 맞게’ 지속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화와 소통’을 통한 세상 복음화

사실 교회가 그 시대의 징표를 정확히 읽고 ‘오늘에 맞게’를 등한히 함으로써 ‘교회 따로, 세상 따로’, ‘신앙 따로, 생활 따로’라는 신앙의 쇠퇴의 길로 치닫고 있었음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크게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따로, 세상 따로’를 극복하고 ‘~과 함께’(대화와 소통)를 위해 교회가 ‘오늘에 맞게’ 강생의 신비를 실현하고, 또 교회가 끊임없이 쇄신되어야 한다는 방향을 전 세계 교회에 제시하였다.

이렇게 보면 “왜 신앙의 해인가?”라는 물음은 “왜 또 바티칸 공의회인가?”라는 물음의 다른 표현이라 하겠다. 이 물음은 한국 가톨릭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물음이다. ‘~따로, ~따로’를 극복하여 ‘대화와 소통’을 통한 세상 복음화를 꾀하고자 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고뇌가 지금 한국 가톨릭교회의 고뇌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는 절실히 “왜 ‘신앙의 해’인가?”를 묻고 또 물어야 할 것이다.

한국 가톨릭교회가 지난 반세기동안 양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거세게 진행되던 지난 시절 우리 교회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참되게 수행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진리와 정의의 증언자’라는 감동을 주었다. 그 당시 우리 교회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따로, ~따로’의 모습이 아니라, 고통과 고뇌에 찬 사람들과 세상에 ‘함께’로 강생하시는 ‘주님 강생의 신비의 실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 교회의 사목현실은 “냉담자 급증, 예비자 급감”이라는 어두운 현실로 추락하고 있다. 밀물처럼 교회의 문을 두드리던 입교자들이 바깥세상에서 아주 강하게 느꼈던 ‘교회는 자신들과 함께’(교회는 지금 여기에 주님 강생의 신비의 지속적 실현)라는 그 감동을 교회 내부에 들어와서는 피부로 느낄 수가 없어 그렇게 빨리 세상의 다른 감동을 찾아 썰물처럼 교회를 떠나갔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교회가 그 입교자들을 교회가 지닌 신비, 즉 주님 강생의 신비의 실현이라는 용광로 속에 녹여 신앙의 내면화를 시켜주는 데는 상당 부분 실패하였다 하겠다.

강생의 신비라는 용광로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내면화란, 껍데기만 포장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존재가 속속들이 ‘말씀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 안에 강생의 신비가 충만하게 실현되는 것이다. 사실 세례성사가 바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온전한 신앙의 내면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 27). 하지만 여전히 우리 자신은 아직도 속속들이 말씀으로 변화되는 신앙의 내면화를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


“매일 매일 말씀 한 줄이라도 제대로 읽자!”

신앙의 내면화를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강생하여 살아계셔야 한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 17)라고 하셨고, 또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히브 4, 12)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만 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켜 신앙의 내면화를 반드시 이루어줄 것이다. 우리 자신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 14)는, 강생의 신비의 지속적 실현이 되는 바로 그것이 『신앙의 해』해 선포의 의의라 하겠다.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들은 여전히 우리와 우리 삶 안에도 많고, 우리 밖에도 참으로 많다. 통 안의 물이 아무리 더럽다 해도 맑은 물을 지속적으로 집어넣으면 통 안의 물은 맑아지게 마련이다. 우리 안에, 우리의 삶 안에 말씀을 자꾸 집어넣으면 언젠가 우리가, 우리의 삶이 말씀이 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온전히 말씀이 된 우리와 우리의 삶이 세상 안에 지속적으로 주입되면 세상은 언젠가 말씀으로 변화될 것인데, 이것이 ‘강생의 신비의 지속적 실현’의 원리이고, 세상 복음화의 원리이다.

‘신앙의 해’ 선포 목적은 ‘신앙 유산의 효과적 전수’와 ‘신앙 정체성 회복’이라고 압축된다. 신앙 유산의 전수란 인기 상품처럼 대량으로 생산 보급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갈라 3, 27) 나의 삶에서 너의 삶으로 전수되는 것이다. 교회의 구성원인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참되게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그리스도화’가 되지 못하면 ‘신앙 정체성 회복’도 구호에 그칠 뿐이고, 또한 교회를 찾는 이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그리스도’를 전수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신앙의 해’, 이 은총의 한 해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매일 매일 말씀 한 줄이라도 제대로 읽자!”고 거듭 거듭 강조하고 싶다. 그것이 우리가 aggiornamento의 삶을 살아가는 정도(正道)이고, ‘신앙의 해’를 제대로 살아가는 기초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1월호, 
하성호 요한(신부, 대구대교구 1대리구 주교대리, 대구 S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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