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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대사7: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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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3 ㅣ No.116

[격동의 현대사 - 교회와 세상] (7)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


교회 한목소리, 노동인권 신장에 한 획

 

 

1967년 5월 14일. 한 무리 청년 노동자들이 팍팍한 노동 현실과 마주선다. 인천교구 강화본당에서 활동하던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들과 직물공장 노동자들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견직(絹織, 비단)산업 본거지였던 강화도에서 종업원이 1200명이나 되는 큰 공장이던 심도직물에 노동조합을 설립, 힘겨운 노동현실 개선에 나선 것이다. 그해 2월부터 노조 설립에 들어간 지 3개월 만의 난산이었다.

 

"가는 곳마다 십자가를 지고 생의 모든 고통과 고난을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

 

JOC 정신에 기반해 이뤄진 심도직물 노조 설립은 곧 큰 난관에 부닥친다. 이에 한국천주교회는 교구를 넘어 국내 가톨릭 사상 최초로 사회정의를 위해 함께 연대한다. 1965년 12월 8일 마무리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사회정의를 위한 투신'의 비전을 열어놓은 데 따른 결과였다.

 

 

'공장 걸레'로 불린 여성 노동자들

 

- 강화본당 주임으로 1965~69년 사이에 재임한 브란스필드 신부 등 사제단이 본당 JOC팀 회원 및 견직공장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60년대 중반, 강화도 견직 노동자들의 현실은 황폐했다. 아직 강화대교가 준공(1997년)되기 이전이어서 '섬'이라는 격리된 공간인데도 21개나 되는 직물회사들이 들어차 있었고,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공휴일 전날 야간조는 24시간) 노동에 열악한 환경에서 격무에 시달렸다. '노동자'나 '근로자'라는 단어도 사치였다. 심지어 '공장 걸레'라고 불리며 멸시를 감수해야 했다.

 

5~6년차 숙련공이 5000~6000원밖에 월급을 받지 못하는 데다 제때 식사를 하지 못해 노동자의 60%가 위장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고, 대부분 무좀에 걸려 있었으며, 위생시설도 엉망이었다. 당시 메리놀수녀회에서 운영하는 병원(그리스도왕 의원)에 드나드는 직물공장 노동자 결핵환자 중 20%는 2기 중환자였다. 24시간 밤샘 노동이 노동학대라는 인식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하던 강화도에 JOC 팀이 만들어진다. 1965년의 일이다. 강화본당 주임이던 메리놀외방전교회 선교사 브란스필드(Michael Bransfield, 1929~89) 신부는 공장 소녀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JOC 서울대교구 북부연합회 송옥자(고레티) 여성회장을 초청, 여직공들 인권의식을 일깨운다.

 

브란스필드 신부는 당시 미국 메리놀회 본부에 보낸 서한에서 그 상황을 이렇게 술회한다.

 

"미국에서 노동조합이 생기기 이전보다 이곳 조건은 더 열악합니다. 10대 소녀들이 1주일에 7일 전부, 하루 12시간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한 달에 쉴 수 있는 날은 고작 이틀뿐입니다. 하루 24시간 노동도 여기선 비상식적인 게 아니고 폐결핵과 과로 또한 흔합니다.… 이곳 한 공장에선 뉴욕 시장에 100만 달러 상당 실크를 팔고 있습니다. 그 옷을 입는 이들이 이곳 상황을 본다면, 한국에서 왜 노동조합이 필요한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브란스필드 신부가 방경복 베드로씨 등과 함께 집필, 가톨릭출판사에서 출간한 사회교리서 「구원의 빛」(1974년판). 이 책은 당시 공안 당국에 압수됐다가 1980년대 들어 정부측에 공식 반환을 요구해 돌려받은 희귀본이다.

 

 

JOC 팀은 이옥수(체칠리아), 윤기준(베아타)씨 등 심도직물 노동자들과 함께하며, '우리는 왜 노동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교육을 통해 노동자들이 스스로 인식을 넓히도록 돕는다. 팀 모임은 갈수록 활발해졌고, 견직 노동자들은 노조 설립의 꿈을 꾼다.

 

협박과 회유가 잇따랐지만 꿈은 이뤄졌다. JOC가 강화에 진출한 지 1년 9개월 만인 1967년 5월 강화성당 구내 그리스도왕 의원에서 '전국섬유노조 심도직할분회(분회장 함덕주)'가 설립된 것.

 

노조가 설립되자 공장측은 단체협약 체결을 거부하고 함 분회장에게 온갖 압력을 가해 휴직하게 한 뒤 자신들이 요구하는 박부양을 분회장으로 선출했으나, 박 분회장은 곧 노조원들의 참된 대표로 일하겠다며 마음을 바꾼다. 당시 배후조종자로 지목된 송 회장은 한동안 이들의 폭력이 무서워 성당 밖으로 나설 엄두를 내지도 못했을 지경이었다.

 

그해 12월엔 JOC 회원들이 불법적으로 해고되고 1968년 1월엔 박 분회장도 해고를 당한다. 또 그해 1월 7일 심도직물이 무기 휴업했고, 1월 8일에는 강화도 내 21개 직물공장 대표들이 모여 JOC 회원들을 취업시키지 않을 것을 결의했다. 이와 더불어 회사 사주를 받은 노동자들은 성당으로 몰려와 시위를 벌였고, 브란스필드 신부가 강화본당을 떠날 것을 요구했다.

 

 

노동자들과 함께한 천주교회

 

1967년 5월 제2대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로 취임한 김수환(당시 마산교구장) 주교도 당시 심도직물에 노조가 결성되자 강화도를 방문, 외국인 사제단과 리차드(성공회) 신부, 조승혁(도시산업선교회, 감리교) 목사, JOC 회원 등과 함께하며 좌담회를 갖고 대책을 강구한다. 하지만 직물공장 관계자들은 좌담회에 난입, JOC회원들에게 거리낌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또 이른바 '강화도를 사랑한다는 청년들' 12명은 다음날 전등사에서 열린 야유회에까지 몰려와 행패를 부렸다.

 

이런 상황을 목격한 김 총재주교는 당시 미사를 통해 이렇게 심경을 털어놓은 바 있다.

 

"억눌리고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위해 그리스도 사랑을 실행하느라 스스로 십자가를 진 연약한 소녀들과 JOC 회원들에게 존경을 표할 뿐입니다. 여러분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교회 역사가 증명합니다."

 

몇 달이 흘렀음에도 사태가 브란스필드 신부와 JOC, 노조 등에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오도되자 1968년 1월 11일 JOC전국본부와 인천교구는 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한다.

 

당시 심도직물측은 브란스필드 신부가 강화도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으나 인천교구장 나 굴리엘모 주교는 이를 강력히 거부하고 1968년 1월 18일자로 발표한 특별메시지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 임무를 이해할 때에, 또 그들이 노동자들의 기본적 권리를 존중할 때에 비로소 하느님의 뜻대로 나라가 번영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 여러 신자들이 현재 상황을 위해 기도를 바치고 △ 교회가 사회에 대한 가르침을 더 잘 파악하는 기회로 삼고 △ 하느님에게 강화사건에 대해 정의로운 해결을 내려 주시도록 간청해줄 것을 당부하고, 경기도 경찰국장실에서 사측 대표와 만나 협상하는 등 최선을 다했으나 시원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음 달인 2월 한국천주교회 주교단은 새로 부임하는 교황대사 환영미사를 위해 대사관에 모일 계획이었다. 김 총재주교는 이에 나 굴리엘모 주교와 함께 주교단에 임시 주교회의 개최를 건의했다. 교회가 심도직물 사태에 대한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는 게 김 주교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 1965년 9월 강화본당에 부임, 1969년 5월까지 재임한 브란스 필드(맞은편 가운데) 신부가 강화본당 가톨릭노동청년회(JOC)팀과 모임을 갖고 있다.

 

 

마침내 2월 9일 임시 주교회의를 통해 주교단은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한다.

 

성명서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국 주교단은 옳지 못한 일을 당하면서도 침묵을 지킨다면 큰 잘못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대 교황께서 가르치신 원리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적 사회정의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특히 노동자 권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목자로서 신부는 이러한 정의와 권리를 가르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노동자의 기본적 존엄성과 권리를 존중하고 이 존엄성과 권리를 강화하는 데 능동적으로 관여할 때 비로소 하느님 뜻에 따라 국가가 발전할 것입니다."

 

이 성명서가 발표되고 나서야 정부는 사태 수습에 나선다. 그리고 6일 뒤인 15일부터 그해 7월까지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됐다.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됐지만, 심도직물 노조 사건은 우리나라 사회정의와 노동자 인권 신장에 획기적인 계기가 된다. 이 사건은 이후 전개된 교회 노동사목활동은 물론 민주화와 인권 운동, 현실 참여와 문제 해결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 한국천주교회는 또 교회 안팎에 '적응과 쇄신'의 교회상을 보여주고 복음화에 사회정의를 위한 투신 비전을 통합하며 새로운 선교 시대를 열게 된다.

 

[평화신문, 2008년 8월 17일, 오세택 기자, 사진제공=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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