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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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이스라엘4: 비운의 왕, 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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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3 ㅣ No.1008

[이스라엘 성지 길라잡이] 비운의 왕, 사울


- 가운데 구릉 뒤쪽으로 보이는 길보아 산.


사무엘을 마지막으로 판관기가 막을 내린 뒤, 사울은 거룩한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 왕정 시대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사울은 하느님께 죄를 지어 왕위를 잃어야 했던 비운의 왕이다.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던 사무엘은 아마 죽는 날까지 사울을 위해 슬퍼했을 것 같다. 필자가 사울을 생각하면서 동정하듯이 말이다.

사울은 벤야민 지파 키스의 아들로,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한 기브아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유적터로 남아있지만 기브아를 지날 때마다 사울을 생각해 본다.

많은 왕비와 후궁을 거느렸던 역대 왕들과 달리 아히노암이라는 아내만을 두어 슬하에 6명의 자녀를 두었고(네 아들 요나탄, 아비나답, 말키수아, 이스 보셋과 두 딸 메랍과 미칼: 1사무 14,49-50), 첩이었던 리츠파에게서 두 아들을 얻었다(아르모니와 므피보셋: 2사무 21,8).

그러나 사울 자손들의 운명은 그다지 녹녹하지 않아 세 아들 요나탄, 아비나답, 말키수아는 길보아 산 전투에서 전사하고(1사무 31,2), 둘째 딸 미칼은 처음에는 다윗의 아내가 되었다가 나중에 다윗이 왕권을 두고 사울의 강력한 라이벌로 바뀌자 사울에 의해 라이스의 아들 팔티에게 주어졌으며(1사무 25,44), 리츠파의 아들들은 나중에 기드온 사람들에 의해 숙청되었다(2사무 21,8).

사울은 이스라엘 역사상 중요했던 위기의 시대를 살았다. 특히 군사력 면에서 주변 국가를 상대해야 했던 이스라엘은 구심점을 잃어 몰락을 앞둔 상태였다.

카리스마적 판관 체제를 유지하느냐 아니면 안정적인 왕정을 선택하느냐…. 300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아도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지속적인 구심점을 얻으려면 왕정이 불가피했으나 더불어 따라오는 폐해와 부작용은 이스라엘을 내부적으로 무너뜨리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필요악이라고나 할까! 평등사회에 계급제도가 들어오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왜 없었으랴. 종국에 가서는 귀족층이 빈민을 수탈하다가(아모 2,6-16; 이사 1,21-28) 이스라엘은 내적으로 몰락하면서 독립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북 이스라엘 기원전 722년, 남 유다 기원전 586년 몰락).

당시 왕정의 경험이 없었던 이스라엘에게 인간의 왕을 세운다는 것은 매우 시험적인 경우였을 것이고, 사실 사울이 암몬 족을 꺾기 전까지 그를 임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투에서 이긴 다음에야 사울은 비로소 왕으로 인정받았고, 길갈에 올라온 백성들이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사무엘이 공식적으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1사무 11,15).

당시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었던 필리스티아가 지중해 연안에 살면서 이스라엘 땅을 넘보던 시대였고, 그들에게는 구릉지대에 사는 이스라엘인들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특히 아펙 근처 에벤 에제르 지역의 패배는 심각한 타격이었다(1사무 4,1).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아에게 패하면서 이웃 나라들의 위협에 무력화되어 이스라엘 동쪽에 위치한 암몬은 야베스라는 마을을 노략질했고(1사무 4,11), 이때 사울이 야베스 사람들을 구하고 암몬 족을 무찌르면서 확고한 구심점을 만드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끝까지 완벽하지는 못했나 보다. 필리스티아와의 전투를 앞둔 당시 사무엘이 오기 전에 번제를 바치고(1사무 13장) 오랜 숙적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느님의 명령에 불복함으로써(1사무 15장) 결정적으로 버림을 받아, 라이벌로 등장한 다윗을 미워하면서 평생을 쫓아다녔다.

더욱더 비극이었던 것은 아마도 자신의 아들 요나탄과 딸 미칼이 다윗과 함께했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로서 자식에 대한 배신감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 엔 도르 근처 이즈르엘 평야.


고독한 리더…. 마지막 필리스티아와의 전쟁을 앞두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울은 이즈르엘 평야 엔 도르에 혼령 불러일으키는 여인을 찾아가 사무엘의 혼령을 불러 올린다. 하느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너무 강해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은 아니었을까? 그때 사무엘은 사울이 다음 날 자신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 예언한다.

그날 이후 사울은 길보아(118쪽 사진 참조) 전투에서 심하게 부상을 입었고, 필리스티아 손에 죽는 치욕은 견딜 수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1사무 31,3-6) 사무엘의 예언은 이루어졌다. 벳 산 성문에 치욕스럽게 그 시체가 널렸다가 나중에는 벤야민 지파 영토인 첼라에 묻혔다(2사무 21,14).

역사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다윗에 비해 고독한 인생을 마감한 사울이 필자에게는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고독한 비운의 왕 사울. 그래서 다윗은 그를 미워하여 따라다닌 사울의 끈질긴 추적에도 아랑곳없이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편을 바쳤나 보다.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살해되어 언덕 위에 누워있구나.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졌는가? …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 그 비옥한 밭에 이슬도 비도 내리지 마라. 거기에서 용사들의 방패가 더럽혀지고 사울의 방패가 기름칠도 않은 채 버려졌다. …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생각하며 울어라. 그는 너희에게 장식 달린 진홍색 옷을 입혀주고 너희 예복에 금붙이를 달아주었다…”(2사무 1,19-27).

* 김명숙 소피아 - 부산교구 우정본당 신자로 이스라엘에서 성지순례 안내자로 일하며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구약학 석사를 마치고, 박사학위 취득을 앞두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4월호,
글 · 사진 김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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