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강론자료

2013-0915...하느님앞의 올바른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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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3-09-15 ㅣ No.1408

연중 24 주일 (다해)

탈출기 32,7-11.13-14.     1티모테오 1,12-17      루카 15,1-10 (또는 1-32)

2013. 9. 15. 등촌3.

주제 : 하느님의 앞의 올바른 자세

추석이 가까워졌습니다. 올해는 예전보다 추석이 빨라져서 과일의 맛이 떨어진다는 소리가 있기는 합니다만, 내가 추석 날짜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는 이상,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 듯합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우리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우리가 드러내는 행동의 변화를 묻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내가 귀로 질문을 들었으니, 입으로 대답하면 충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정도의 질문과 응답은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답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대답하는 것을 충분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의 삶에 달라질 모습은 아무것도 없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삶에 바쁜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기를 아주 어려워합니다. 어쩌면 먼저 내 앞에 떨어진 세상의 일들을 다 정리하고 난 다음에, 그래도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그때에 가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다르게 드러내는 자세에 하느님은 우리를 어떻게 판단하실까요? 제가 하는 질문이지만, 실제로 하느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실지 제가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우리들 각자가 드러내는 자세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질 테지만, 독서와 복음의 말씀을 대하면서 생각한 주제였습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공경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동물의 하나요, 더더구나 사람이 알아줄 때라야만 귀중한 것이 될법한 금을 써서 송아지의 형상으로 하느님을 낮추어놓았던, 히브리백성들을 향하여 하느님은 잔뜩 화를 내셨습니다. 세상에서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없어져야 할 대상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하느님은 치명적인 실수를 하신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 실현하려던 계획을 모세라는 사람에게 먼저 털어놓은 것이고, 그 소리에 당황한 모세가 몇 마디 기도를 봉헌하자, 하느님은 그 계획을 수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산다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일까요? 세상을 바라볼 때,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하는 질문일 뿐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나 혼자 좋은 생각을 갖고 실천한다고 해서 세상의 모습이 달라질까 하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만, 정말로 그렇게 초지일관한 자세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하느님을 아주 두려운 분으로 여기고 삽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하느님께서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벌을 내리시는 얘기에 너무나 민감하게 또 과도하게 걱정을 많이 해서 그렇지는 않을까요?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바오로사도는 아주 다른 하느님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하느님을 무조건 두려워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 올바르지 못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정말로 혹시라도 여러분에게 그러한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버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가아니라, 바로 각자 자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마음을 돌이켜 돌아설 자세를 갖춘 죄인(!)을 대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예수님은 3가지 비유를 통하여 설명하십니다. 하느님은 들판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양치기와 같은 분이시며, 하느님은 잃어버린 은전 한 개를 찾기 위하여 집안을 온통 쓸며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는 여인과 같은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아직 세상의 삶을 마치지도 않은 아버지를 죽은 자로 여겨, 자기 몫의 재산이라고 틀어쥐고 떠났던 못된 아들도 내치지 않고 기다리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모습을 세상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서 볼 수 있겠습니까?

 

바오로사도는 좀 더 극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따르며 형성된 공동체였던 교회마저도 박해하던 사람이었는데,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그러한 잘못을 모두 잊어주시고,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셨다고 말입니다.

 

모세의 기도에 따라, 받을 벌을 피했던 히브리백성들은 자기들의 발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한때는 교회와 신앙에 대한 박해자였다가 복음선포자가 된 바오로사도였지만, 그는 자기 생애의 30년이 넘는 시간을 5000킬로미터가 넘는 아주 먼 거리를 죽을 고비를 겪으면서 복음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대해야 하겠습니까? 남들은 몰라도 내 행동은 내가 잘 알 법한데, 각자가 한 행동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지 심기일전의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화답송으로 읽은 시편에 나오는 것처럼, “(3)하느님,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주소서. (4)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 순간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마음을 다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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