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강론자료

2013-1124...그리스도왕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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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3-11-23 ㅣ No.1419

그리스도 왕 대축일(연중 34 주일-다해)

2사무엘 5,1-3       콜로사이 1,12-20       루카 23,35-43

2013. 11. 24. 등촌3

주제 : 예수님이 왕으로서 보여주신 뜻을 실천하기

오늘은 그리스도예수님을 세상의 왕이요 우리의 임금으로 고백하고 기억하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며, ‘전례력으로 한해의 마지막 주간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오늘 미사에서 우리는 신앙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고백하는 의미를 생각해보고, 그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어야 하는지 묵상하는 날입니다.

신앙의 내용을 묵상하자는 얘기는, 묵상한 내용을 세상에서는 내가 몸으로 실천하지 않을 요량(料量,=앞일을 잘 생각하여 헤아림)으로 그저 시간을 사용하고, 때우자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가 묵상하기는 하되, 이런 경우처럼 행동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간낭비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왕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전례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가 갖고, 드러내야 할 올바른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복잡한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신앙인들로 오늘 전례에 참여하면서, ‘신앙인으로 기억하는 왕, 신앙인으로서 그 본보기를 보여준 분을 기억하고 따르는 사람들로서, 세상에서는 과연 무슨 일을 어떻게 할 사람들인지 먼저 결정해야 합니다.

 

세상의 일과 신앙에서 가르치는 것이 부딪힐 때, 우리는 어떤 것을 따라야 할까요? 민감한 문제입니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내가 선택하지 않은 다른 쪽을 향하여 반발하고, 반항하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도 있을 문제입니다. 세상의 현실에서 이런 문제에 부딪히면, 우리는 정교분리의 원칙에 대한 얘기를 듣기도 하고, 그런 원칙을 내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인으로 잘 살아갈 생각이나 해야지, 신앙은 세상의 일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앙이 희생하거나 양보해야 한다는 뜻이고, 그 소리는 세상이 신앙보다 올바르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신앙인으로 살면서 예수님의 본보기를 왜 배우는지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신앙의 임금이나 그 본보기를 따르는 사람은 세상의 임금이 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인정한 범위 안에서만 움직여야 할까요? 듣자마자 대답할 질문으로 생각하지 말고, 잠시라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대답해야 할 문제입니다. 여러분에게 대답을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내가 대답하는 표현들이 정말로 내 존재를 담을 만큼 진지한 반성의 결과인지, 내가 만사를 제쳐놓고 그렇게 따라야 한다고 결정한 것인지 판단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왕대축일에 읽고 들은 루카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비난과 조롱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자기 힘으로 끝내지 못하는 존재라면 너는 메시아도 아니고, 유대인의 임금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가 진짜 메시아라면 네 목숨도 구하고 십자가에 함께 달려있는 우리들의 목숨도 구하라는 좌도의 얘기도 듣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렇게 말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고, 자기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기를 기대했다가 실망한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세상에 대하여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혈통으로는 자기들과 같은 유대인이었을 예수님을 대하면서, 자기들은 철저하게 이민족에 속한 사람들로서 움직인 것입니다. 유대인이니까, 무조건 유대인을 편들어야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예수님도 동족들의 이런 비난을 듣고, 그 순간 십자가의 고통을 한 순간에 해결하거나 없애버리면서 놀라운 일을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랬으니, 신앙에서 말하는 그 임금은 세상의 임금이 허락하는 일만 해야 한다는 소리 외에 다른 어떤 일도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이겠습니까?

이런 일은 요즘세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5년이면 세상의 권좌에서 내려와야 할 사람들이 세상과 그 안에 모든 것들에 대하여 무엇이든 맘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것처럼 행동합니다. 실제로 그들이 가진 힘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렇게 자기만 알고 자신만 생각하면서 일을 벌인 사람들이 그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준 상처는 생각하지 않고,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는 말 몇 마디이면 모든 잘못이 사라질 것처럼 행동합니다.

 

예수님의 오른쪽에 있었던 죄수(?) 하나처럼, 재빨리 자신의 삶에 이익이 될 일을 찾아서 움직여야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신앙인이라고 생각하거나 신앙에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움직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옳은 길을 버리고 반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반복해서 하는 질문입니다만, 신앙을 따라 산다는 사람들이 세상의 정치가 허락하는 범위와 정치가가 옳다고 인정한 범주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세상이 신앙보다 더 옳은 자세로 살고 있다는 소리가 될 터인데, 애석하게도 세상의 나라는 같은 이름과 같은 사상, 같은 정신으로 영원히 살지도 않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떠나 찾아왔던 히브리백성들이 하는 말만을 듣고 그대로 따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시작이었을 뿐이고, 다윗은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성전의 제단으로 나아가서, 제단위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성되는 성유를 머리에 들쓰고 나서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고 실천하는 임금이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본보기를 따라 산 것이 예수님이었는데, 그 예수님은 오늘 루카가 전하는 복음내용에서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이런 불협화음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

 

오늘 들은 두 번째 독서, 콜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신, 예수님에 대한 찬미가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어 실천하신 일은 사람들이 바라고 세상이 허락한 기준을 따라 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기에 만물의 으뜸이 되었고, 하느님의 충만함이 그 안에 머물게 되었다고 그분의 행위를 찬미합니다. 세상에서 사제직, 예언직과 더불어 왕직을 사명으로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옳은 것이겠습니까? 연중34주간, 성서주간을 지내면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고 실천해야 하겠는지 잠시 돌아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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