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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대 그레고리오: 하느님의 집정관, 교회쇄신에 한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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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9 ㅣ No.91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 교황편 (3) 대 그레고리오


‘하느님의 집정관’… 교회쇄신 한몫

 

 

영원한 도시 로마, 찬란한 문명을 이룩하고 서구 사회의 핵심적 도시였던 로마는 410년경 게르만 부족인 서 고트인들에 의해 약탈된다. 이후 서로마 제국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민족들이 수시로 서방을 침략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들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등불의 역할은 교회에 맡겨졌다. 

 

특히 빼어난 능력을 지닌 교황들이 등장해 교회와 세상 안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으며 그 중에서도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의 업적은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 있는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묘비에는 라틴어로 「Consul Dei」라고 적혀있다. 「하느님의 집정관」이라는 이 호칭은 그가 사회와 교회 안에서 수행한 이중적인 역할을 함축적으로 묘사한다.

 

교황으로서 그는 혼란한 시대가 요구하는 소명을 뛰어나게 완수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교회 역사에서 몇몇 인물에게만 부여되는 「대」(Magnus)라는 칭호를 얻었고, 암브로시오, 예로니모,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서방의 위대한 네 명의 교회 학자』로 칭송받았다.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540년경 로마에서, 펠릭스 3세(483~492)와 아가페토 1세(535~536) 등 두 명의 교황을 배출한 부유한 원로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귀족 계층의 고등 교육을 받았고 573년경에 로마 시장이 된 그는 575년 부친이 사망한 뒤 부모의 저택을 성 베네딕도 규율을 따르는 성 안드레아 수도원으로 만들어 수도생활을 시작했고 시칠리아에 있는 가족 소유의 토지에도 5개의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는 그러나 당시 교회가 자신의 능력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기에 더 이상 수도원에 머물지 못하고 교황으로부터 불리움을 받는다. 교황 베네딕도 1세(575~579)는 578년 그를 부제로 서품하고 이듬해 교황 펠라지오 2세는 그를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궁정에 교황사절로 파견하게 됐다. 그는 제국의 수도에 머물며 외교적, 정치적, 교회정치적 경험을 쌓아, 수많은 저명한 인물들과 평생 동안 관계를 맺었다.

 

586년경 로마로 돌아온 그는 교황 펠라지오 2세의 측근에서 교회 일을 하다가 590년 교황이 사망하자 수도자로서는 최초이며 유례없는 만장일치로 교황에 선출된다. 이때 그레고리오는 교황직을 맡기를 사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여전히 수도생활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는 교황이라는 무거운 직책이 자신의 영성생활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신심이 깊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론보다는 실천적이었고 매우 좋지 못한 건강에도 불구하고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로 불리울 만큼 활동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레고리오의 업적은 우선 로마와 「베드로의 세습령」에 대한 통치에서 나타난다. 교황청과 방대한 영역의 로마교회 소유지역에 대한 행정 업무를 재구성해 여기서 나오는 자산들을 난민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했다. 특별히 교황청의 부동산 재정비는 후일 교황령의 기초가 됐고 중세 때 교황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동로마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거의 문제가 없었지만 595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전(全) 교회의 총대주교」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해 심각한 긴장 관계에 있었고, 이에 대해 그는 오늘날까지 교황들이 사용하는 「종들의 종」이라는 소박한 칭호를 사용했다.

 

당시 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입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대부분의 이민족은 여전히 이교인이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이에 롬바르드족과 평화적인 합의를 이루려고 노력했고 동시에 그들을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시키려고 했다.

 

영국에 선교사들을 파견한 일은 가장 뛰어난 업적 중의 하나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후대에 쓰여진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어느날 시장에서 깨끗한 피부와 금발에 얼굴이 잘 생긴 소년들을 보았다. 그레고리오는 이들의 용모에 감탄한 나머지, 그들을 영국인(Angli)이 아니라 천사들(Angeli)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곧 개인적으로 영국에 선교사로 가려 했으나 주교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교황이 된 뒤 그는 비로소 596년 안드레아 수도원의 원장과 함께 40여명의 수도자들을 영국으로 파견했다. 

 

많은 저서를 남긴 그레고리오 교황은 교회 쇄신에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전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성직자들의 생활을 개혁하기 위한 「사목지침서」(Liber Regulae Past oralis) 4권은 사목 직무를 받는 동기, 덕목, 가르치는 방법 등을 다뤄 실제로 주교와 사제들의 영성과 사목에 대한 기초적인 각론서가 됐다. 그 외에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욥의 윤리」나 모든 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활과 기적에 관한 대화집」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그레고리오 교황은 전례와 관련해 우리들에게도 매우 잘 알려져 있다. 물론 그레고리오 성가 이전에 이미 교회의 미사전례와 수도원들의 성무일도에서 오늘날과 거의 같은 내용의 미사곡을 비롯한 전례성가들이 불리웠다. 하지만 지방마다 제각각이던 미사전례곡들과 성무일도에 사용되던 시편, 응송, 찬미가들을 전례력에 맞춰 다시 정리함으로써 그레고리오 성가집을 편찬했고, 그로써 교회의 전례음악이 그처럼 오랫 동안 교회 안에 살아있게 된 것이다.

 

신심 깊은 영성가이자 탁월한 행정가, 정치가였던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재위 14년은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오는 역사적 전환기에 교회의 중흥을 이룩한 위대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04년 1월 18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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