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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신앙] 신앙의 해: 저물지 않는 신앙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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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0-22 ㅣ No.525

[신앙의 해 특집] 저물지 않는 신앙의 해



교황청 국무원 통계처가 펴낸 ‘교회 통계연감’에 따르면 2011년 12월 31일 현재 전 세계 가톨릭 신자 총수는 12억 1359만 1000명으로, 전 세계 인구의 17.5%인 것으로 파악됐다. 개신교 신자수를 합치면 대략 전 세계 인구의 35% 정도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외적으로는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믿는 이들의 두 배에 이르고 인류 복음화의 길은 아직 멀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의 99.9%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도 이 세상에 참된 평화와 행복이 실현될 것 같지는 않다. 세상 곳곳에서는 그리스도인들끼리도 교파가 다르고, 지역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관심이 다르고, 사회적 목적이 다르고, 현실에서 얻어 누리고자 하는 것이 다르다는 이유에서 서로 죽기살기로 싸우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라고 선언하셨다. 이는 우리가 장차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권고가 아니라 지금 현재 소금이어야 한다는 선언이다. 바닷물의 염분 농도는 3-5% 정도라고 한다. 그 정도의 낮은 염분 농도만으로도 물이 썩지 않고 생명이 풍요로운 바다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소금인 그리스도인이 전 인류의 35%에 달하는 데도 아직 세상에는 어두운 구석이 많고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소금의 짠맛을 잃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하튼 이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은 숫자임에도 그들의 믿음과 사랑으로 이 세상이 눈에 띄게 변화되지 않고 오히려 어두운 면이 더 부각된다는 것은, 진지하게 우리의 신앙을 되짚어보고 참신앙을 바로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동일한 선상에서 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물질주의적 문화와 세속주의에서 오는 종교적 무관심과 무신론 등의 영향으로 신앙의 위기를 체험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 시대의 신앙 쇄신을 위한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지난해 10월 ‘제13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소집하고, ‘신앙의 해’를 제정하셨다(2012년 10월 11일에서 2013년 11월 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까지). 이제 얼마 후에 신앙의 해는 막을 내리지만, 신앙의 해가 지향하던 메시지는 우리의 삶에서 계속 이어져야 한다.

우리가 신앙의 해가 지향하던 바를 삶으로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머리로 생각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고 실천하는 신앙을 간직해야 한다.
 

듣고 보고 깨닫고 실천하는 신앙

믿음을 머리로 생각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상태에서만 머무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야고보 사도는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라고 선언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로마 3,28).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은총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 은총에 응답해야 하는데, 바로 이 ‘응답하는 믿음’이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실천하는 믿음’, 곧 신앙이다.

조선 시대 세종 임금 때 정승을 지낸 맹사성이라는 선비의 이야기는 우리의 신앙과는 무관한 것이지만,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 왜 꼭 필요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기에 여기 소개하고자 한다.

맹사성은 젊은 시절에 자신의 좋은 집안과 뛰어난 머리를 자랑하며 기고만장하고 안하무인이었다. 어느 날 맹사성은 파주의 어느 산골에 무명선사(無名禪師)라는 뛰어난 스님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제깟 중놈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내가 혼줄을 내줘야겠구나.” 하고 말하며 찾아갔다.

맹사성은 스님 앞에서 속마음을 감추고 자신이 평생 지녀야 할 좌우명을 달라고 거짓으로 간청했다. 그러자 스님은 미소를 지으며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하시지요.”라고 말했다. 맹사성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온갖 죄짓지 말고 착한 일 많이 하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인데, 그 따위 것을 장원급제한 나에게 좌우명이라고 가르쳐 주신단 말입니까!”라고 대꾸했다. 스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실천에 옮기자면 팔십 노인도 어려운 법입니다. 대관께서는 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 不如一見)을 아시지요? 그런데 한 경지 더 높이면 백견이 불여일각(百見而 不如一覺)이지요. 백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깨우치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또 한 경지 더 높이면 백각이 불여일행(百覺而 不如一行)이지요. 백 번 깨우치는 것보다 한 번 실천하는 것이 더 낫다는 뜻이 아닙니까?”

스님의 가르침에 정신이 아찔해진 맹사성은 자신의 경솔함과 교만을 뉘우치고 훌륭한 좌우명을 내려준 것에 감사하며 이를 평생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우리에게 듣고 보고 깨닫고 실천하는 신앙을 간직하도록 이끌어 주는 가장 좋은 길잡이는 성경이다. 하느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당신에 대해서뿐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시는 우리 인간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머리와 마음에 새기고 손과 발로 실천한다면, 맹사성 이야기에서 무명선사가 말한 ‘백각이 불여일행’이라는 가장 뛰어난 경지의 신앙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말씀을 변화시키는 삶이 아니라 말씀으로 변화되는 삶

성경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으로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면, 먼저 성경을 읽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이런 작업은 혼자 할 수도 있고 전주가톨릭신학원에서 운영하는 성경 공부 기초반이나 본당에서 실시하는 성서백주간, 사십주간, 거룩한 독서, 어버이 성경, 청년성서 등을 통해서도 실천할 수 있다. 그런데 혼자 하는 것이든, 함께하는 것이든 어떤 종류의 성경 공부나 그룹 나눔이든, 단순히 듣고 배우는 방식으로 지적인 호기심과 배움의 갈망을 충족시키는 차원의 성경 공부는 젊은 날의 맹사성처럼 머리를 키우고 신앙적 교만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향해 머리뿐 아니라 마음도 열고 손과 발도 개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마음에 깊이 와 닿는 성경 말씀을 외우면서 그 말씀이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곱씹어 새겨야 한다. 그리고 머리와 마음으로 깨달은 말씀을 의지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이 없으면,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속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또한 성경을 읽고 묵상하거나 공부하는 것이 실천하는 믿음, 곧 살아 있는 신앙과 무관하게 단순히 우리 자신의 나약하고 부족한 신앙을 근사하게 포장하고 스스로 위안을 받기 위한 행위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참 신앙은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거기서 솟구치는 말씀의 힘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이 말이 맞다고 동의한다면, 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이라는 단서를 붙이지 말고 곧바로 성경을 펼쳐 읽고 마음에 새기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용기를 내어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가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곧 우리 신앙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성경을 통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살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쉽게 우리 자신이 안주하고 좋아하는 방식으로 복음과 믿음마저 변질시키게 된다. 이는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고 자신의 삶으로 말씀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2013년 10월 20일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6-7면; 김정훈 스테파노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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