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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사목헌장을 다시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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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1-25 ㅣ No.536

사목헌장을 다시 읽으며



1.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오래 전 신학교 시절, 『사목헌장』을 여는 이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받은 벼락같은 감동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딱딱한 교회문서(그것도 공의회 ‘헌장’의!) 벽두에 이런 “참으로 인간적인” 음성을 들려줄 줄 아는 교회 안에는 “기쁨과 희망”이 있을 수밖에 없으리란 생각은 고민 많던 한 신학생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이 순간의 기억은 근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늘 심금을 울린다. 『분도』의 원고청탁 취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을 맞고 있는 지금 교회와 수도회의 현실을 바로 이 문장(이 대표하고 있는 『사목헌장』 전체)의 빛으로 다시금 비추어 보면서 드는 생각을 적어 보라는 게 아닐까 싶다. 투박하고 간략하게, 그야말로 붓 가는 대로, 한 베네딕도회 수도자에게 드는 생각을 나누고 싶다.


제목의 ‘사목’  2. ‘사목헌장’이라는 제목 자체가 이전 공의회들의 전통에 비추어볼 때 낯설고 새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헌장은 머리말(1-4)을 통해 사목헌장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부터 먼저 해야 했던 것이다. 제목의 새로움은 내용과 기술방식의 새로움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우선 다루는 내용(주제)부터가 이전까지의 교회문헌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었다. 이른바 ‘시대의 표징’을 식별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학문과 문화, 가정과 사회, 노동과 경제, 평화와 전쟁에 이르기까지 현대 세계의 중요한 현안들을 거의 빠짐없이 다루고 있다. 그리고 발언의 기본태도 역시, 추상적인 원리로부터 시작해서 정리한 가르침을 일방적으로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혁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화적’이다.

나아가 이 문서는 신자들만이 아니라 “곧바로 인류 전체를 향하여 말하”고(2) 있다. 신앙과 교회 규율 등과 관련해서 ‘교회 안’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Ecclesia ad intra)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 곧 ‘교회 바깥’의 문제들을 다루었던 것이다(Ecclesia ad extra). 그러나 교회 ‘바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말도 엄밀히 따지면 어폐가 있다. 교회는 『사목헌장』을 통해 자신의 ‘바깥’인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세상 바깥에 있지도 않고, 세상이 교회 바깥에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과 깊이 연대된 상태(intima coniunctio, 1장의 제목)에서 세상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발터 카스퍼). 『현대 세계 안에 있는(in mundo)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이라는 제목 자체가 이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 ‘바깥에서’ 세상을 제 눈 앞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그 일부인 세상 ‘안에서’ 바로 그 세상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제목에 쓰인 ‘사목적(pastoralis)’이란 말은 세상과 교회의 관계에 대한 바로 이런 감수성을 잘 드러내는 말이라고 본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그 내용이나 문체, 그리고 기술방식에 있어서 실천지향적 태도를 일컫는 말일 터이다. 다시 말해 다른 교회 문헌들처럼 신학적 원리에서 출발하여 ‘교리(doctrina)’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에 관한 관심과 인식에서 출발하여 일상에서 실천과 적용을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지칭할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사목’은 무엇보다 교회가 세상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자기 것으로 삼는 태도를 일컫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사목은 타자와 일체감에서 솟아나는 따듯한 관심이며 환대(歡待)요, 보살핌이며 동행(同行)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교회의 관계  3. 바로 이 맥락에서 “종교 생활이란 다만 혼자서 하는 예배 행위와 어떤 도덕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뿐”이라고 여기는 데서 생기는 “일상생활과 신앙 사이의 저 괴리가 현대의 중대한 오류”라고 천명하는 것이다. 결국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오늘 우리 교회 안팎에서 교회가 오지랖 넓게도 왜 정치-경제 현실에 관여해야(43항의 표현으로는 “현세의 의무”) 하느냐는 볼멘소리를 내뱉는 분들은 “이웃은 물론 바로 하느님께 대한 자기 의무를 소홀히 하고 또 자신의 영원한 구원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는 것이다.”(43).

교회는 이른바 ‘세속화’한 세상에 대한 우려를 자주 표명해 왔으나, 시나브로 교회의 세속화가 더 염려스런 일이 되고 말았다.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더 염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은 개신교 형제자매들에게서 자주 들리는 탄식이지만, 그게 어디 남의 동네일로만 그치랴. 교회가 세상보다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의 보존과 확장에 더 깊은 관심을 둘 때, 암만 겉으로 세상 ‘바깥’ 어딘가 탈속(脫俗)한 지점에 있는 듯 보여도 사실은 지극히 속된 자리에 있는 것이다. 『사목헌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파스카를 기준으로 성(聖)과 속(俗)의 경계선을 다시 설정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외적 경계가 아니라 내적 경계이다. 더 깊이 세상 안으로 들어갈수록(plus in hoc mundo), 다시 말해 더 철저히 세상을 위해 존재하고 바쳐질수록, 교회는 세상을 지배하는 속물정신(俗物精神)에서 더 자유로워지며 정녕 세상과 ‘다르게’ 존재한다(minus de hoc mundo).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가 얻은 축복이 바로 이런 깨달음이 아닌가 한다. 세상이 교회를 위해 있는 게 아니라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있는 것이란 깨달음, 이것이야말로 정녕 사목적 깨달음이었다. 바로 이것이 공의회를 통해 벌어졌다는 이른바 ‘코페르니쿠스 전환’의 고갱이리라. 그렇다.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 그 신부요 제자인 교회 역시 ‘세상을-위한-존재’(본 회퍼)로 살아야 한다. 소금과(마태 5,13) 누룩처럼(마태 13,33), 밀알과(요한 12,24) 비처럼(신명 32,1-3), 교회는 세상 안에 스며들고 배어들어 죽고 없어지면 그게 참으로 사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로마 교회는, “세상의 영혼”(『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이 된다(40). 과연 교회는, 외적으로는 세상 ‘안으로’ 더 침투해 들어가야 하고, 그러면서 내적으로는 세상과 더 ‘다르게’ 되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만 덜 세속적으로(minus de hoc mundo) 될 수 있는 것이니, 교회의 거룩함도 종국에는 이런 방식으로만 증언되는 것이다.


대화의 정신  4. 『사목헌장』이 그 내용이나 기술방식에 있어서 일방통행식의 가르침이 아니라 ‘대화’의 정신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자(사실 ‘대화 colloquium’란 말은 이 문서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 중 하나다.).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설정했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에 대한 이전의 배타적이며 의심 어린 시선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자족(自足)적이며 폐쇄적이고, 방어적이며 대결적인 자세를 내려놓게 되었다. 그리하여 타자 앞에서 가르치고 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배우고 경청하는 자세 (3; 44; 92 등), 도움을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을 줄도 아는 겸손한 자세(44)를 갖추게 되었다. 나아가 타자의 ‘다름(他者性)’에 대해 존중과 사랑으로 있는 그대로 수용할 줄 아는 자세를 갖추게 되었으니(36; 41; 56; 71 등), 바로 이런 맥락에서 공의회는 종교자유에 관한 선언인 『인간 존엄성』이라는 기념비적 문서를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여러 교황들이 종교나 양심의 자유를 명백히 단죄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런 변화는 실로 놀랍기 그지없다. 진리란 자유로써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라고 천명하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유는 가치 없고 단죄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이전의 관점을 폐기해버린 것이다. 이처럼 경청과 겸손, 타자의 타자성 - 그 자율과 자유에 대한 인정과 포용, 이 모든 것이 대화, 즉 참된 관계를 위해 필수적인 바탕이 되는 자세지만, 이 모든 것을 완결하는 한 가지가 더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바로 자기 책임(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세다. 놀랍게도 『사목헌장』은 이런 면에서도, 희미하나마 2000년 대희년에 있었던 교회의 공적 죄고백의 선구가 된다(43; 21). 지도자들이 무슨 큰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잘못과 책임을 인정하고 고백할 줄을 몰라서,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들)이 극심한 고통과 상처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질 줄 아는 데서 출발하는 일이 어디 지도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랴. 우리가 교회공동체나 시민사회공동체를 막론하고 형제자매들과 덜 고통스런 동거(同居)의 삶을 영위하려면 『동의보감』에 나오는 말마따나 서로 ‘통(通)’해야만 할 터인데(通卽不痛), 서로 통하기 위해 우리 각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세들의 모범을 『사목헌장』이 어느 정도는 미리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이 될까.


… 그리고 그 증언  5. 물론 타자와 맺는 이런 참된 친교(koinonia, 通)의 근간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사목헌장』은 다양한 방식으로 강조하고 있다(3; 22; 32; 39; 45; 93 등). 특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더 인간답게 된다”(41)는 구절은 이 대목에서 인용할 만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 인간이 되어나간다는 것이요, 이 참 인간의 길이야말로 동시에 바로 하느님의 길, 하느님이 되어가는(theosis) 길이 아닐 수 없다. 참 인간이요 참 하느님인 예수님의 길이 바로 그런 길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구원자』에서 이를 “인간은 교회의 길”이란 유명한 표현으로 요약했다.

오늘 우리가 교회의 아들딸로서 걸어가야 할 길도 결국은 바로 이런 길인데, 갈 길이 아직 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공의회는 이런 ‘대화’의 정신, 다시 말해 “다양성의 인정”과 “상호존중과 존경과 화합”이 무엇보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먼저 ‘증언’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92; 43도 이런 맥락에서 함께 읽을 수 있다). 특히 베네딕도회 수도자로서, 『사목헌장』의 정신에 비추어 우리 수도생활을 어떤 쪽으로 방향 잡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면, 우리야말로 ‘대화’와 친교의 살아있는 ‘비유’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거듭 그리고 새삼 하게 된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형제애의 상징”(92)이 되는 일에 혹은 더 거창하게 말해보자면, 삼위일체의 저 친교를 지상에서 희미하게나마 드러내 보여주는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a Trinitatis)’이 되는 일에 수도승 생활의 여타 핵심요소들이(opus Dei, 렉시오 디비나, 노동, 손님환대 등) 통합되어야 할 것이다. 맨 마지막 93항이 인용하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라는 성경구절은 이런 맥락에서, 복음에 따라 “함께 살기”가 어렵긴 해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때로 죽을 만큼 고통스럽긴 해도 눈물겹게 아름답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수도자들이 증언해 달라는 호소처럼 읽힌다. 오늘 교회(특히 수도회)에 요구되는 것은 어떤 가치관을 제시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복음이 끊임없이 육화되는 장소로서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분도, 2012년 겨울호(제20호), 이연학 요나 수사(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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