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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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성독지남: 중세 유럽 사회에 퍼지는 렉시오 디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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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1-25 ㅣ No.538

[聖讀指南] 중세 유럽 사회에 퍼지는 렉시오 디비나



얼마 전 교회의 가장 큰 기둥인 베네딕도 16세 교황께서 스스로 사임을 발표하시어 교회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분은 평소에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교황으로서 직무 수행에 어려움이 있을 때는 주저하지 않고 사임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깊은 기도 안에서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직시하셨고 또한 그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스스로 확신하셨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그분의 용기와 결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오늘날 교회나 수도회는 계속 고령화로 치닫고 있고, 교회나 수도회의 메시지가 신선하지도 않으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있음을 여러 사건들과 자료들을 통해서 우리는 접하고 있다. 시대는 계속 발전하고 변화하고 있는데, 교회나 수도회가 이러한 것들을 감지하지 못하고 계속 예전의 사고와 방식에만 집착한다면, 교회나 수도회는 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게 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새롭게 선출된 교황을 중심으로 교회는 더욱 일치하여 새로운 세대를 지혜롭게 맞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간략히 베네딕도 규칙서(RB)에 나타난 렉시오 디비나(성독)에 대한 중요한 개념들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베네딕도 성인 이후에 어떻게 렉시오 디비나가 유럽 사회에 퍼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540년경 로마 원로원 가문에서 태어나 32세의 젊은 나이에 로마 집정관이 되었던 그레고리우스 대교황(Gregorius Magnus, 540-604)은 부친이 세상을 뜨자마자 사회적인 모든 지위를 버리고, 유산으로 받은 집터에 일곱 개의 수도원을 세워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후에 그는 베네딕도 1세(574-579) 교황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고, 586년에 자기가 세운 수도원의 장상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590년에 교황 펠라지오 2세의 뒤를 이어 그는 새 교황으로 선출되어 604년까지 정열을 다해서 교회를 위해 봉사하며 헌신하였다. 수도승으로서 최초의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은 교황직을 수행하면서도 수도생활에 대한 이상을 늘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특별히 이탈리아의 여러 성인들에 관한 이야기인 『대화집』(Dialogorum Gregorii Papae Libri Quatuor, De Miraculis Patrum Italicorum) 4권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제2권 전체는 오직 베네딕도 성인에게 할애하여 그분에 관한 일화를 전해주고 있다. 교황으로서 그는 베네딕도 성인을 특별히 칭송하며 높이 평가하여 그의 영향력 아래 수세기 동안 서방 교회 안에서 베네딕도 규칙서가 널리 확산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성경독서의 중요성을 직시하여, “복음적인 독서”(Evangelica Lectio)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서방 교회에 렉시오 디비나의 중요성을 일깨웠고 동시에 그것이 교회 안에서 지속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후 서방 수도 전통은 6세기까지 다양한 수도 규칙서들이 난무했던 혼합 규칙서 시대였다. 그러나 7세기를 거치면서 베네딕도 규칙서와 골롬바노 규칙서가 우뚝 서게 되고, 그외 다른 규칙서들은 점차 흡수, 통합 혹은 도태되었다. 한편으로 골롬바노의 『수도승들의 규칙서』(Regula Monachorum)는 너무 엄격하였고 세세한 것까지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어, 골롬바노회 수도자들조차도 좀 완화된 유럽의 수도원으로 옮기거나 아니면 수도원의 관례가 더 온건한 베네딕도 규칙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로써 베네딕도 규칙서가 유럽 사회에 더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말은 베네딕도 규칙서에서 제시된 렉시오 디비나 수행이 베네딕도 수도자들에 의해서 더 넓게 퍼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특별히 샤를 대제(Charlemagne, 742-814)가 768년에 왕위에 오르면서 유럽을 평화적으로 통일하였는데, 이때 수도원은 교회의 쇄신과 개혁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별히 그는 제국 내 모든 수도원들의 일치를 위해서 베네딕도 규칙서를 지키도록 적극 권장하기도 하였다. 샤를 대제가 교회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교회를 내외적으로 간섭하고 세속화한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그는 수도원을 통치 구조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였고, 아빠스를 자신이 직접 임명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에 그의 아들 경건자 루이(Louis the Pious, 814-840)는 부친의 정책을 이어받아 교회에 특별한 공헌을 하였다. 특히 그는 프랑크 제국 내의 모든 수도원을 단일한 지배하에 두려고 아니아네의 베네딕도(Benedictus Anianensis, 750-821) 아빠스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수도생활의 통합과 쇄신을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주도하게 하였다.

아니아네의 베네딕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수도원들이 베네딕도 규칙서를 철저히 지킬 것을 강조하면서, 세속적인 모든 것을 거부하고 성무일도를 더 열심히 바치도록 권고하였다. 그는 일반적인 수도자들의 관습이나 규칙들을 더 엄격히 준수하도록 요구하면서, 816년과 817년 아켄(Aachen)에서 열렸던 수도생활에 관한 교회회의에서 시찰을 위해 모든 수도원들을 정기
적으로 방문할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아니아네의 베네딕도 역시 렉시오 디비나의 중요성을 간파하였고 그것을 수도자들에게 계속 강조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렉시오 디비나의 구체적인 자료로써 성경뿐 아니라 그 폭을 더 확대하여 오리게네스, 성 히에로니무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그레고리우스 1세 교황과 같은 분들의 다양한 저서들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고대의 수도승들에게 렉시오 디비나의 자료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이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렉시오 디비나의 자료들은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더 광범위한 자료와 책들을 포함하였다. 아무튼 아니아네의 베네딕도가 아켄 교회회의에서 베네딕도 규칙서를 유럽의 수도 생활의 기본 규칙으로 정함으로써, 그 이후 클뤼니 수도원을 거쳐 12세기까지 유럽의 거의 모든 수도자들은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되었다. 이 말은 베네딕도 수도자들에 의해 베네딕도 규칙서에서 강조되었던 렉시오 디비나 수행이 많은 수도자들에게 공유되고 퍼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분도, 2013년 봄호(제21호), 글 허성준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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