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0일 (목)
(녹)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간추린 사회교리: 교회의 사명과 사회교리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2-07 ㅣ No.905

[간추린 사회교리] 교회의 사명과 사회교리


개인의 생각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교회’와 ‘세상’이라는 두 단어를 접할 때면, 무엇인가 서로 상반되고 대립되는 의미가 떠오를 수 있다. 곧 교회와 세상은 서로 다른 영역이며, 세상은 죄와 악이 흘러넘치고 인간의 부조리와 부정이 뒤엉킨 아수라장 같은 곳으로, 교회는 성스럽고 거룩하며 죄 많은 인간에게는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신적인 영역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동양적인 종교심성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회와 세상이라는 성(聖)과 속(俗)은 동전의 양면 또는 손등과 손바닥이라는 의미보다는 공존할 수 없는 극단적 이분법의 논리로 받아들여 극과 극이라는 결코 합치될 수 없는 영역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과연 ‘교회’와 ‘세상’을 그렇게만 받아들여야 하는가? 교회는 죄 많은 세상 사람들의 탈출구이며 영원함과 거룩함의 갈망을 채워주는 세속 사람들의 도피처로만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신학적인 의미로 볼 때 교회가 ‘거룩’한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총 때문이며, 성서적인 의미로 볼 때는 교회 또한 ‘세상’이며, 교회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그것이 열매 맺는 곳으로 지정된 세상의 한 부분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 어디서 신국(神國, Civitas Dei), 곧 하느님의 도시가 아니라 죄악의 세계에서 벗어나 거룩함에로 나아가도록 하느님께 부름을 받고(ekklesia) 있는 공동체이다. 이 부르심과 은총 때문에 교회 안의 죄는 더욱 죄스러워질 수도 있다.

그래서 교회만이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없으며,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도 바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죄 많은 인간들이며 교회 또한 바로 그들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문제는 당연히 이 공동체, 곧 교회의 문제와 연결된다.


교회와 세상 - 이 세상 안에서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서 삶

이러한 교회의 정체성 때문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상에 대한 교회의 시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공의회는 인간의 세계를, 곧 인류 가족 전체와 인간이 살아가는 온갖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인류 역사의 무대인 이 세계에는 인간의 노력과 실패와 승리가 새겨져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가 창조주의 사랑으로 창조되고 보존된다고 믿는다. (이 세계는) 죄의 노예상태에 떨어졌으나, … 그리스도께서 해방시키셨다”(사목헌장, 2항).

이러한 맥락에서 세상의 의미를 보면 예수께서도 성부께로부터 바로 이 세상에 파견된 분이셨고, 그분 역시 이 세상에 당신의 제자들을 파견하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신앙과 구원에로 부름 받은 사람들의 세상이며 제자들은 이 세상에 일치와 사랑을 보여주는 말씀을 선포해야 하며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야 하는 흙이 바로 이 세상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경은 세상과 구원 사이의 절대적 이원론을 말하지 않으며 구원이란 것도 현실 세계 바깥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말한다.

그래서 비오 12세 교황은 “인간들을 천상 세계로 이끌어가라는 위임을 받고 있는 교회는 구원이란 바로 세속생활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여하한 경우에라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1956년 9월 23일, 이탈리아 베르가모에서 개최된 제29차 가톨릭 사회주간에 비오 12세 교황의 위임에 따라, 교황청 국무장관 A. 델라쿠아 추기경이 보낸 서한, Arthur Fridolin Utz O.P / Joseph Fulko Groner O.P, Aufbauund Entfaltung des gesellschaftlichen Lebens. Soziale Summe Pius XII, Freiburg/Schweiz 1954-1961년, 6089항).

따라서 교회가 가져야 하는 본연의 삶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나 죄악에 떨어졌으며 그분의 끊임없는 사랑의 대상인 역설 속의 세상, 혼란한 가운데 은혜를 모르는 세상, 바로 “이 세상”(요한 13,1; 17,11; 1코린 5,10 참조) 안에서의 삶이므로, ‘죄스러운 세상의 사람’(요한 15,18 이하; 17,14.18 참조)들이 아닌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서의 삶인 것이다.

하지만 그 삶은 스스로의 힘으로써나 이 세속의 어떤 지혜로써가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힘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이를 통해 온 인류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이기적이고 교만한 세상이 멸시하는 사람들도 사랑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할 가장 으뜸가는 근본적인 길”(「인간의 구원자」, 14항)이며, “우리가 다루는 것은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역사적’인 인간”(「인간의 구원자」, 13항)이므로 교회는 인간을 위해 세상에 무언가 말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교회의 삶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죄악의 소용돌이로 몰아가는 영속화된 실재들과 새로운 죄악들을 불러일으키는 죄스러운 실재들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를 원하시고 이 일에 교회가 앞장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비오 12세 교황은 “가톨릭교회는 성당의 네 벽 안에 꼼짝 않고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종교와 일상생활의 분리, 교회와 세계의 분리는 그리스도교답지도 않으며 가톨릭 사상과도 상치됩니다.”(1946년 3월 16일, 로마 시내 본당신부들과 사순절 설교자들에게 한 연설, Arthur Fridolin Utz O.P / Joseph Fulko Groner O.P, 앞의 책, 2805항)라며 세상에 대한 교회의 사명을 밝힌다.

이런 의미를 바탕으로 기쁜 소식을 설파하는 교회는 개인적 회개를 사회의 쇄신으로부터 결코 분리시켜서는 안 되며 바로 여기로부터 세상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인 사회교리가 출발하는 것이다.


사회교리 - 교회는 세상과 인간을 위한 생명을 다하려고 파견되었다

요한 23세 교황은 회칙 「어머니와 교사」 3항에서 이렇게 사회교리의 의미를 요약하셨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회는 그 무엇보다도 영혼을 성화하여 천상 은총에 참여하도록 이끌어야 하지만, 또한 인간의 일상생활의 요구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것은 생계나 교육만이 아니라 어느 시대이든 그 어떠한 것이든 인간의 모든 복지와 번영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질서정연하고 인권과 정의에 근거한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관계가 자동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약속된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을 실현하는 전제 조건으로 요청될 수는 있으며 적어도 구원 도정에 가로놓여 있게 되는 불필요한 장애물을 걷어내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다.

따라서 왜 그리스도 교회가 교회 초창기부터 인류의 현세적인 행복에 관심을 기울여왔고 지금도 계속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가톨릭 사회교리는 아주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그 뿌리가 교회의 역사와 신학의 과거 속에 깊숙이 닿아있다. 실제로 신약성경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창조 계획 안에 기본적으로 들어있는 세속적인 사회질서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국가, 결혼과 가정, 사유 재산 등의 제도가 바로 신약성경 안에서 인간 구원에 당연한 사회 질서로 여겨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세속 사회의 여건들이 인간의 구원을 도와주기도 하고 훼방하기도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세기 교회사를 보면, 교부들의 가르침 속에서 물질적인 재화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그리고 사유 재산, 자선사업, 고리대금, 상인의 품성 등에 관해서도 많은 언급을 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 사상에 따른 국가론을 체계적으로 최초로 언급한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神國論, De Civitate Dei)」은 그리스도교 국가론의 대헌장과 같아서, 중세의 ‘신성왕국’ 사상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신학의 전성기는 그리스도교 사회교리의 발전에서도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사회의 여러 분야에 관한 문제들을 조직적으로 취급하려고 시도했으며, 특히 15세기 이탈리아의 ‘사백인(Quattro Cento)’으로 불리는 위대한 설교가들과 고해 사제들은 사회 문제에 대한 혜안을 갖추고 있었다.

이와 같은 토대를 통해 교회가 사회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게 된 것은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이른바 자본주의의 후유증이 나타나면서부터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와 그 시대 상황을 극복하려면 제대로 구성된 탄탄한 사회교리에 의지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인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레오 13세 교황의 첫 번째 사회 회칙인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가 1891년 반포된 이래로 가톨릭교회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하여 고유한 가르침을 한 단계 한 단계 발전시켜 나왔으며, 가톨릭 사회교리의 기본 개념은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서 적용된다. 그 바탕은 실제적인 인간 이해, 흔들림이 없는 기본 사상 그리고 적응력, 곧 가톨릭 사회교리의 역동성에 근거한다.

이와 같이 사회교리는 세상과 구원의 문제에서 구원의 질서와 세속의 질서가 밀접히 연관됨을 밝히는 것이며, 교회가 세상과 인간을 위한 사명을 다하려고 세상에 파견된 실체임을 밝히는 확고부동한 신앙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 김정우 요한 - 대구대교구 신부. 1992년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교에서 윤리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윤리신학 교수이며 대구관구 대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1월호, 김정우 요한]


1,26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