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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성경 속 생명 이야기7: 자유에 대한 그릇된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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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3-25 ㅣ No.1134

[성경 속 생명 이야기] (7) 자유에 대한 그릇된 개념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넬슨 만델라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옥에서 백인에 대한 내 분노는 서서히 줄어 갔지만, 이 시스템에 대한 증오는 커 갔다. 나는 우리를 서로 적으로 만들어 버린 이 시스템을 증오하는 반면에 적들마저 사랑한다는 사실을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알기를 바랐다"(「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이처럼 전체를 악화시키는 시스템에 대한 저항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구별하려는 자유의지의 실천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개인의 권리주장에만 갇혀 사적 자유로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해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뜻에서 카인은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는 하느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모릅니다"라는 카인의 진술은 타인과의 연대로부터 고립되길 선택하는 자유의 표방입니다만, 결국 그의 자유는 복종 외에 별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약자를 임의대로 다루는 강자의 자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말하는데, 여기서 '지키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동사 '샤마르'는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뒤 사람에게 에덴동산을 '지키도록' 맡기실 때(창세 2,15) 사용한 단어와 동일합니다. 카인은 '지키라'는 하느님 명령을 따르기보다 그에 반대되는 행위를 했을 뿐 아니라, 하느님 명령대로 '지키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강한 자유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따라서 카인이 아벨과 아무 상관을 갖지 않으려 한 자유란, 결국 개인의 자유에 그릇되고 사악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타인과의 연대를 끊고 스스로 고립됨으로써, 실제로는 타인에 대항하는 절대적 힘을 자신에게 부여한 것입니다. 이는 진짜 자유의 죽음입니다(「생명의 복음」 20항 참조).

이렇듯 자유를 개인주의적 방식으로 절대화할 때 그 본래 내용은 사라지며, 그 의미와 존엄성도 모순에 처하게 됩니다. 또한 개인의 자유가 진리에 부합한 것인지를 살피지 않거나 아예 무시하는 자유는 진리 자체를 무효화하고 파괴하며 타인을 파멸로 이끄는 요소로 변질되고 맙니다(「생명의 복음」 19항 참조).

이런 일은 정치와 통치의 차원에서도 일어납니다. 근원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생명에 대한 권리가, 가령 낙태ㆍ유아살해ㆍ안락사에 대한 법률적 허용이 의회 표결이나 국민 일부(그 일부가 다수라 할지라도)의 의지에 입각해 이뤄질 때, 그때는 합법성을 엄격하게 존중한다는 외관만 유지될 뿐입니다. 모든 사람의 인격이 지닌 존엄성을 인정하고 보호할 때만 참된 것일 수 있는 민주주의의 이상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생명의 복음」 20항 참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좋든 싫든, 협력하든 경쟁하든, 형제ㆍ자매와 한데 어울려 사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카인과 아벨 외에 야곱과 에사우, 요셉과 형제들, 암논과 압살롬 등 형제지간의 냉혹한 현실을 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시편 133편에서는 "보라,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신약성경 역시 우리 삶이 종종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형제지간에 갈등을 겪음을 이야기합니다. 루카복음 15장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큰아들은 카인처럼 살인자는 아니지만, 방탕한 짓을 하다 돌아온 동생을 환영하는 소식을 듣고 분개했으며, 그 역시 카인의 경우와 비슷하게 아버지의 보호로부터 떨어진 '들판'에 나가 있었습니다(루카 15,25 참조). 그에게도 죄가 그를 삼키려고 도사리고 있는 형세가 그려지는데, 창세기 4장과 다른 점은 아버지가 몸소 들에 나가 그를 달랜다는 점입니다. 또 마태오복음 5,21-26에서 예수님은 형제 살인에 대한 금지명령의 배후를 캐고 들어가 창세기 4장에 가까이 나아가십니다. 곧 카인과 아벨의 제사 때처럼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 하다가 원한 품은 형제가 생각나면 즉시 화해부터 하고 제단에 예물을 바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일한 대안은 화해에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사람들을 증오하는 법을 배웠다면 사랑하는 법 또한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만델라,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평화신문, 2014년 3월 23일, 이명기 수녀(가톨릭대 ELP학부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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