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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세례대와 성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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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11

세례대와 성수대

 

 

사람은 간혹 그리고 때가 되면 고향을 찾는다. 명절이 되면 고향으로 향한다. 고향을 향하는 귀소 본능이 얼마나 큰지 민족 대이동이 일어난다. 고향에 가면 가족이 모이고 친지들이 함께 자리를 갖는다. 그리고 자신들의 뿌리를 찾는다. 먼저 떠나가신 어른들에 대해 제사를 지낸다. 그래서 고향은 자신의 뿌리, 자신의 삶의 근거, 자신의 유래를 되새기는 일이 된다. 그래서 어떤 유명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더 잘 기억하기 위해 태어나고 살았던 소위 '생가'를 복원하고 그 유명한 사람을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이 찾아 더 잘 기억하도록 '표지'를 남겨 놓는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다. 물과 성령을 통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지난 삶과 내가 모두 죽은 것이다. 하느님을 모르고 지냈던 모든 삶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것이다. 내가 새로 태어난 사실은 곧 내 삶의 뿌리이며 근거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늘 초심의 마음으로 돌아가도록 노력한다. 처음 그 일을 시작할 때 가졌던 순수한 마음이 살아가면서 퇴색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신앙도 그럴 때가 있다. 하느님을 향한 마음,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위하는 마음을 세례 때에 가슴 속에 깊이 새겼다. 하지만 처음 가졌던 그 깊은 신앙심은 퇴색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을 항상 돌이키고 새롭게 자신을 쇄신하는 생활을 통해 처음 신앙에 입문하였을 때 가졌던 초심을 되찾기도 한다.

 

'세례대', 그것은 우리가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던 그 사건, 그 사실을 기억하게 해 준다. 하지만 오른날 많은 본당들은 이 세례대를 갖추고 있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단순히 주일 집회를 위한 공간으로 주로 꾸몄기에 세례대를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짙다. 수많은 입교자들이 생겨나지만, 정작 세례는 주전자에 물을 담아 제대 앞에 나와 받는 것으로 끝이다. 그렇게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그 성사는 내적 인호는 있지만, 외적 표지는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세례대는 성전 내 시설물들 가운데 매우 중요하고 고유한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가장 중요한 고유한 것들을 들자면, 제대, 독서대, 그리고 세례대이다. 그리고 성당 입구에 비치하는 성수대를 들 수 있다. 그럼 다른 것들은? 감실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다. 성전 안에서 약간 외진 곳에 위치한다. 전례가 거행되는 공간에는 제대가 중심이 되고 감실은 부차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성찬 전례의 영성체를 보충하거나 남겨두는 수준이다. 그 외에도 성체조배, 봉성체 등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본래의 위치에 더 적합한 것이다. 그렇다면 14처는? 그것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 신심을 북돋우는 기도를 위한 것이다. 어떤 본당은 성당을 지으면 14처를 매우 관심있게 설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것에 앞서 설치하는 것을 볼 때 앞뒤가 뒤바뀐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제대, 독서대, 그리고 세 번째가 세례대이다. 세례대는 기능면에서 볼 때 일년에 몇 차례 사용하지 않는 매우 드물게 사용하는 시설물이다. 실용면에서 보면 안 된다. 전례적이고 신학적인 관점에서 봐야 한다. 역사를 보자. 초세기 교회 때부터 성전 입구나 측면에 세례당을 별도로 지었다. 그것은 교회에 입문하기 위해 '세례'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강한 표지로 말해 주는 것이었다. 곧 예비신자들은 성당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밖에서 교리를 했으며, 성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전례, 곧 성찬례에는 참여할 수가 없었다. 세례를 받아야 정상적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의 기도도 바치고 성찬례에 완전하게 참여하였던 것이다. 또 침례를 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세례를 받을 때에 완전히 잠겼다가 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새로 태어난 표시로 흰옷을 새로 입었으며, 크리스마 기름을 바르고, 손에 촛불을 들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었다. 그래서 세례당이나 세례대를 흔히 성당 입구에 시설하였었다.

 

하지만 현대와 오늘날에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예비신자들도 미사에 충분히 참여하고 성찬례도 같이 참여한다. 다만 영성체만 하지 않을 뿐이다. 또 대부분의 입교 예식도 성당 입구나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당 안에서 거행한다. 그래서 세례대를 성당 앞쪽에 배치시킨다. 세례식을 거행하기도 편리하고 언제나 성당 안에 들어왔을 때 눈에 띄는 곳에 위치하도록 하고 있다. 세례대는 그만큼 중요하다. 우리가 때가 되면 고향을 찾듯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을 기억하고 되새기게 해주는 매우 중요하고 고유한 시설물인 것이다. 주전자물로 세례를 받으니 세례를 받은 것은 기억하지만 표지는 남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고향이 댐 공사로 수몰하고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세례를 기억하게 하는 여러 형태의 준성사와 예식을 거행하도록 적극 권장하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성당 입구에 시설하는 '성수대'이다. 성수는 세례 때 사용하는 세례수와 다른 것이다. 세례수는 세례라는 성사를 위한 재료이지만, 성수는 동일한 축복된 물이지만 그 물을 사용하는 것은 '준성사'에 해당된다. 그래서 성수대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성당에 들어오면서 성수를 찍어 십자성호를 긋는다. 그리고 기도한다. 악을 멀리하고 하느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신이 받았던 세례를 기억하는 일이다. 하느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며 하느님과 만나 대화(기도)를 나누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수대도 세례대에 버금가는 만큼이나 중요하다. 또 있다. 주일 미사에서는 시작 예식 가운데 '참회 예식'을 대신하여 성수 예절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거룩한 신비를 거행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미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구원된 공동체 안에 살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예식이기 때문이다. 평일 미사처럼 간단한 경우는 참회 예식을 하지만, 매주 특히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인 주일날에 그렇게 하면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권장한다. 또 연중 그렇게 한다. 부활 성야 때에 세례수나 성수를 축복한 다음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세례 때의 서약을 갱신한다. 이 예식을 통해 자신이 받은 세례를 주님 부활의 이 거룩한 밤에 새롭게 쇄신하며 기억을 새롭게 다지고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만큼 세례대는 성수대와 더불어 우리 신앙 생활과 전례 안에서 중요한 시설물이다. 본당에 가면 흔히 성수대는 볼 수 있다. 하지만 성수대에서 성수를 찍어 기도하면서 세례를 기억하기보다는 기도하는 집인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분심과 사심을 없애고 깨끗한 마음으로 들어가려는 표지쯤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다. 물론 성수이고 세례를 기억하는 일이기에 정화의 의미도 있다. 하지만 더 크고 근본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 태어난 그 거룩한 세례를 기억하고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자각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세례대는 성수대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설물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성수대가 준성사를 위한 것이라면, 세례대는 성사를 위한 한 단계 더 중요한 시설물이기 때문이다.

 

세례대를 설치하는 일은 좀 신경을 써야 한다. 그냥 찜통 같은 커다란 그릇을 단을 만들어 올려놓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물이 흘러나오는 샘의 모양으로 세례대를 만들면 더 좋을 것 같다. 일단 한 부분에서 물이 솟아 나오고 그것이 약간 낮은 곳으로 흘러 넘치도록 시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물이 솟아 나오는 곳에서 바가지 같은 것으로 물을 퍼서 약간 낮은 아래쪽에서 세례를 주면 된다. 적당한 높이와 넓이 등을 고려하여 잘 만들어 시설을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세례대에는 세례의 샘, 부활, 새 생명의 탄생 등 세례와 관련된 성서의 표지들을 문양으로 새겨 넣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세례대. 성수대와 함께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초심을 되찾아주는 우리에게 살아 있는 표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전례생활, 제8호(2002년 5월 1일), 나기정 다니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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