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미술ㅣ교회건축

전례공간: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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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9 ㅣ No.13

전례공간 (1) : 제대 (1)

 

 

교회 건축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비의 표지라면, 제대는 교회의 원천이요 머리이며 중심인 그리스도의 신비의 표지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그리스도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제대 없이 그리스도를 언급할 수 없다」고 데살로니카의 시메온은 말한다. 이처럼 제대는 전례 거행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시대를 거쳐 오면서 제대는 여러 형태로 변천 되어 왔다.

 

 

초창기 제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제대의 형태는 식탁, 무덤, 그리고 제대라는 독특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 식탁으로서의 그리스도교 제대의 출발점은 성 목요일 이층방에서의 최후의 만찬이었다. 예수께서 새롭고도 놀라운 의미를 부여하신 유일한 파스카 만찬이 거행된 것은 바로 나무로 만든 식탁에서였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개인집에서 계속해서 성찬례를 거행하였으며 성찬례를 거행한 것과 친교의 식사를 연결시켰다. 초기시대까지만 해도 제대는 전례 용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식탁 중의 한 목적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식탁 주위에서 신자들은 아가페 음식을 먹었으며, 그 식탁에서 주교는 사제들과 함께 성체를 축성하였다.

 

이처럼 초기시대에는 이교인들을 이해시킬만한 참되고 고유한 제대가 없었다. 때문에 이교인들은 제사용 식탁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즉시 아가페 식사와 구분해서 성찬 신비가 더 강조됨으로써 축성 예식은 고유한 식탁에서 거행되었다. 그 고유 식탁은 사도 바오로가 언급한 것처럼 "주님의 식탁"(Mensa Domini)이라 불렸는데 아마도 귀족 집안에 있는 가구 가운데 흔히 볼 수 있는 다리가 3개로 된 그런 식탁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부제들은 적절한 순간에 그 식탁을 지정된 장소에 배치하여 그 위에 빵과 포도주를 올려놓았으며 주례자는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였다.

 

초기의 성찬 아가페 식탁에서 발전한 3세기의 제대는 원이나 사각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재질은 목재로 되어 있다. 이러한 나무 제대들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4세기말부터 나무로 만든 제대가 적지 않게 불편하다는 것이 제시되면서 점차적으로 돌로 대치되었다.

 

 

순교자의 유해와 관련된 고정된 석제(石制) 제대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출현으로 제대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면서 3가지 주요한 성격을 드러나게 되었다. 첫째, 나무 제대는 사라지고 견고한 재료인 돌이나 대리석, 값어치 있는 금속으로 제대를 이루게 되었다. 둘째로, 제대가 지면(땅)에 고정되었다. 셋째, 제대는 순교자들의 유해와 연결되었다.

 

제대에 대한 이러한 변화의 이유는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가 종교의 자유를 얻음으로써 박해의 위험이 사라지게 되어 옮겨다닐 필요가 없어졌으며, 또한 바실리카(Basilica) 건물도 처음부터 교회의 전례 집회를 위한 건물로 세워지게 됨으로써 회중의 중앙에 준비했던 나무 제대 대신에 바실리카의 토대를 쌓을 때 이미 제대를 돌로 만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건물 전체의 중심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라 여겼기에 이제 제대는 그리스도의 영적 건물을 상징하는 돌로 쌓아올린 건축 양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돌 제대를 가지는 관습은 곧 순교자들에 대한 의식과 연결되었다. 그래서 제대 위의 한 부분을 파고 그 안에 유해를 모셔 두거나 제대 안에 순서대로 모셔 놓은 값비싼 상자 안에 안치하기도 하였다. [가톨릭신문, 2004년 10월 17일, 정의철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장)]

 

 

전례공간 (2) : 제대 (2)

 

 

닫집형태(天蓋)로 덮인 제대(Ciborium)

 

4세기에 이르러 제대 주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제대 상단 모두를 덮는 닫집 형태의 구조물이 세워졌다는 증거를 처음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대개 돌, 대리석, 나무 또는 금속으로 제작되었는데 나무로 된 것들은 대개 금속으로 씌워졌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란 대성전에 봉헌한 닫집처럼 은으로 만들어진 예도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재료는 돌이나 대리석이었다.

 

14세기 이후로 닫집 형태의 치보리움(Ciborium)은 제대를 벽이나 큰 창문이 있는 동쪽 벽에 위치시키는 변화된 조건에 적응해야만 하였다. 채광을 고려했던 북 유럽에서는 크고 넓은 창문을 동쪽에 설치하는 형태가 발전하였다. 이처럼 특이한 조건들 속에서 무거운 기둥들 위에 놓여져 있는 닫집 형태의 치보리움(Ciborium)은 하나의 장애물로 여겨졌기에, 이 상황에 맞게끔 적용시켜야 했다. 제대 주변의 기둥들은 존속되었지만, 이제 그 기둥들은 닫집이 아닌 커튼을 지탱하는 기둥으로서 보다 가느다란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반면, 성당에 자연광을 최대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 원래 있던 닫집은 창문 위로 올라가 지붕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형태는 원래의 정방형 형태를 계속 지녔고 제대 상단과 제대 모두를 덮었다.

 

이처럼 크고 정교한 상부 구조물에 대한 열광의 결과로서 희생제사의 식탁인 제대 자체는 알아보기 힘들게 되었으며, 본래의 의미를 모두 상실하게 되었고 교회의 중심점이 되지도 못하게 되었다.

 

 

감실제대(제대 변형의 마지막 단계)

 

베로나 주교 마테오 질베르티(1524~1543)는 『심장이 가슴 가운데 있고 머리가 정신 가운데 있듯이』 감실을 제대 중심에 놓을 것을 강조하였다. 질베르티(Gilberti)의 이러한 영성에 힘입어 밀라노에서도 감실을 제의실에서 제대로 옮겼다. 그리고 로마에서는 바울로 4세 교황이 이에 적극 찬성하고, 바울로 5세 교황(1614)은 로마 교구의 규정으로 감실을 제대 위에 놓을 것을 명하였다. 그런데 그 제대 위에 놓인 감실이 제 나름대로 거창한 구조물이 되면서 제대에 의당 종속해야 할 위치와 비중을 벗어나 제대가 오히려 받침대 역할을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제대에 대한 규정

 

빵과 포도주를 그 위에 놓고 감사기도를 올리고, 빵을 나누는 제대는 동시에 제헌의 자리이자 형제적 애찬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그 위치는 모두를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이라야 하며, 둘레는 시원스럽게 돌 수 있어야 한다. 새로 짓는 성당에는 제대 하나만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 백성의 집회에서 하나의 제대가 한 분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성찬이 하나라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제대의 형태나 자료에는 별로 규정이 없으나 건물 전체와의 관계, 미적 고려, 관습을 참작하되 그 문화권에서는 품위 있고 귀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며, 너무 거추장스럽게 커서는 안된다. 제대는 고정 또는 이동용 일 수 있으며 주교 예식서의 규정대로 축성하는 것이 상례이나 이동 제대일 경우 축복만 해도 된다. 그리고 제대를 너무 편의 위주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면 안된다.

 

[가톨릭신문, 2004년 10월 24일, 정의철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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