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미술ㅣ교회건축

성미술 이야기: 베드로의 순교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7-04 ㅣ No.32

[성미술 이야기] 베드로의 순교

 

 

카라바조의 ‘베드로의 순교’, 1600~1601년, 230x175cm, 로마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


- 카라바조의 ‘바오로의 개종’, 1600~1601년, 230x175cm, 로마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

 

 

『쿠오 바디스?』

 

어디로 가십니까? 라는 뜻이다. 베드로는 막 로마의 마메르티누스 감옥에서 탈옥한 참이었다. 발걸음을 재촉해서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데 마침 반대쪽에서 마주 오는 주님을 발견한다. 골고타 언덕에서 돌아가신 주님이 로마에 다시 나타나신 것이다. 성 이시도로의 계산에 따르면 서른 여섯 해 만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대경실색해서 뒤로 자빠지든지, 감격에 겨워 털썩 주저앉아야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주님더러 어디 가시는 길이시냐고 묻다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다. 주님의 대답은 이랬다.

 

『나는 로마로 간다. 가서 또 한 번 십자가에 달릴 테다』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던지 베드로는 재차 확인한다.

 

『주님, 정말로 십자가에 달리신다구요?』

 

그렇다는 주님의 대답을 들은 베드로는 이윽고 발길을 돌린다.

 

『그렇다면 저도 돌아가겠습니다. 가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겠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있었던 이 대화는 교황 레오와 리누스가 기록해둔 것을 「황금전설」(Legenda aurea)에서 다시 찾아 수록해 두었다.

 

베드로는 첫 주교이자 첫 교황이다. 마르코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꼽으면서 베드로부터 시작한다. 베드로는 제자들 가운데 믿음직스럽기도 으뜸, 속썩이기도 으뜸이었다. 변덕을 부리고 후회하는 것도 으뜸이었다. 예수님께서 반석이라는 뜻에서 「베드로」(게파)라는 이름을 붙여주시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신 일이나,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하늘 열쇠를 건네주신 것도 그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를 말한다(마태오 16,18~19).

 

그러나 예수님께 철석같이 약속을 하고도 제자였다는 사실을 세 차례나 부인한 것, 그리고나서 닭이 울자 주책 없이 눈물을 흘리며 후회한 것은 베드로의 순박한 영혼을 잘 드러내는 일화들이다. 그러나 물위를 걷겠다고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거나, 올리브 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말코스의 귀를 칼로 벤 것을 보면 그의 성격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것 같다.

 

교부 크리소스토모는 베드로의 불같은 성질로 미루어서 만약 주님을 배반한 자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 손에 때려죽였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한 술 더 떠서 베드로가 아예 생 이빨로 씹어서 죽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예수님께서 배반자의 이름을 짚어서 말씀하지 않으신 것도 다 그런 사태를 우려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군더더기 없는 그림

 

「베드로의 순교」는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가 로마의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에서 주문을 받고 그린 그림이다. 비슷한 크기로 그린 「바오로의 개종」과 함께 체라시 경당의 측면 제단화로 들어갈 작품이었다. 베드로는 허연 백발이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장가까지 갔다니까 순교할 당시에는 예순을 훌쩍 넘겼을 것이다. 손과 발에는 이미 쇠못이 박혔고, 인부 셋이 달려들어서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미리 파둔 구덩이에다 십자가 끝을 파묻고 땅을 다지면 집행이 완성된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종려가지를 든 천사도 없고, 몰려든 구경꾼의 탄식도 안 보인다. 처형을 집행하는 로마 장교와 그의 부하들도 죄다 생략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린 순교자의 표정에도 과장이 하나도 없다. 쇠못을 움켜쥔 손과 이마에 패인 몇 가닥의 주름이 견디기 힘든 고통을 말할 뿐이다. 이런 고통은 주님을 만나고 로마로 다시 돌아왔을 때부터 각오했을 것이다.

 

카라바조는 간결한 설득력과 사실적인 현장성을 통해서 종교화의 새로운 표현 영역을 넓힌다. 「베드로의 순교」에서도 보는 사람의 시선을 빼앗을 수 있는 미술의 불필요한 장식들을 다 걷어내고, 지극히 단순한 구성을 통해서 어떤 능변보다 힘있는 수사를 보여준다. 땅파는 인부의 흙때 묻은 발바닥, 차갑게 빛나는 삽날, 구덩이에서 방금 파낸 젖은 흙더미, 팽팽하게 당겨진 노끈, 인부들의 땀 냄새, 나무 십자가의 나이테,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상체를 일으키는 순교자와 그의 희미한 눈빛, 이런 것들이 보는 사람을 처형의 현장으로 이끌고 동참하게 한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로부터 십자가형을 선고받자 집행관들에게 이렇게 부탁했다고 한다. 「황금전설」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똑바로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영광을 입었으니 내 머리는 땅을 가리키고 다리는 하늘을 향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달릴 자격이 없으니, 십자가를 돌려서 내 머리가 아래로 오도록 매달아 주십시오』

 

베드로는 십자가에 달리고 나서도 입을 열어서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따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똑바로 달릴 수는 없었습니다. 당신은 홀로 바로 달리실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개를 떨구었던 아담의 자식들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 머리를 밑으로 하고 땅을 향해서 나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카라바조의 그림 앞쪽에는 큼직한 돌멩이가 하나 뒹굴고 있다. 이 돌은 베드로의 이름이 가리키는 바위, 또는 비유 말씀에 나오는 모퉁이의 머릿돌을 닮았다.

 

[가톨릭신문, 2003년 7월 6일, 노성두]



1,71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