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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순교자 성월에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삶의 진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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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0 ㅣ No.256

[레지오의 영성] 순교자 성월에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삶의 진지함’



우리는 한국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자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지낸다. 우리가 현양하는 순교자들은 주교, 사제, 신학생, 궁녀, 과부, 동정녀, 소년, 가장, 노인, 정부 관리, 양반, 백정 등 참으로 다양한 계층의 분들이다. 그분들이 지금은 영광을 받고 계시지만, 순교 당시의 상황은 그 고통과 처절함이 얼마나 컸을까 상상되지 않는다. 무엇이 이렇게 다양한 계층의 신자들을 순교로 이끌었을까? 어떻게 신앙을 위해서 부모를 버리고, 믿음을 지키려고 자식까지 외면한 채 목숨을 바칠 수 있었을까? 이분들을 순교에 이르게 한 공통점은 무엇일까? 우리들의 신앙과 그분들이 지닌 신앙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순교자 성월에 물어본다.

우리 시대의 뛰어난 신학자인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H. U. von Balthasar 추기경은 동서고금의 순교자들의 신앙을 면밀히 분석한 후 모든 순교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 신앙의 특성을 발견하여,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삶의 진지함이 순교자들의 특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즉 모든 순교자들의 신앙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가장 큰 특징은 사람이 무엇을 위해 세상에 났는가 하는 “창조 목적에의 충실성”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진지하지 못할 때,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진정성이 없을 때 인간관계가 힘들어진다.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이 힘든 까닭은 해야 할 일들이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진실하지 못한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서 느끼는 실망감과 피곤함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진정성이 없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삶은 임시로 제 한 몸 편할지 모르지만 결국 자신과 주변 사람들 모두를 무의미와 실망의 늪에 빠지게 한다. 정치인이 말이나 행동에 진정성이 없을 때 정치는 희망을 주지 못하고 불안과 혐오를 가져다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순교에 이르는 태도의 바탕에는 공통적으로 진지함, 즉 진정성이 있었던 것이다. 순교자들이야말로 목숨을 바치기까지 진지하게 산 분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진지함의 내용이다. 순교자들이 보인 공통된 진지함은 “창조 목적, 곧 하느님께서 나를 만드신 목적, 내가 세상을 살아갈 이유”에 대한 진지함이었다. 그 내용은 그분들이 신앙에 대해 맨 처음 배운 교리문답 1번(1600년대 이래의 로마 교리서로서 한국 천주교 박해 시대를 거쳐 1950년대까지 사용되었다)에 들어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 교리서 첫 머리에 이 문답이 있는 이유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기 때문이요, 인간 창조 목적을 분명히 하지 않고는 삶에 의미를 지닐 수 없고, 삶의 원리를 떠난 상태에서의 여타 활동은 무질서와 혼동을 초래할 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을 관통한 원리와 기초가 바로 이 문답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김대건 신부가 최후 편지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천주께서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창조주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라는 호소가 바로 그 내용이다. 순교자들은 당신들이 배운 교리문답 1번대로 창조 목적에 진지하고 충실한 가운데 삶의 주인을 만났고, 그 사랑의 체험에서 나온 응답은 기쁨과 확신에 찼을 것이다. 이 점에서 순교는 분명 인간의 일이 아닌 하느님의 은총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은 영신수련 23번 ‘원리와 기초’에서 있는 “사람이 창조된 것은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하고 섬기며 또 이로써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다”라고 가르치신다. 이냐시오 성인에 따르면 이 원리와 기초를 근간으로 여타의 선택을 할 때 창조 목적을 이루게 된다. 즉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그것을 사용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버릴 것이다.”

너무 많은 가치들이 충돌하여 무엇을 선택해야 될지 혼동될 때 참 귀한 가르침이다. 굳이 목숨을 바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심각한 순교 상황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성당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친구를 만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술을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지갑을 열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갈등의 순간, 그 일이 무엇이든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도움이 되면 선뜻 행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면 즉시 멈추라는 식별규범이다. 창조주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도움이 되면 그만큼 열심히 하고 아니면 멀리할 때 비로소 삶의 질서가 잡히게 된다. 그렇게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삶이 반복될 때 우리는 비록 목숨은 바치지 못할지라도 순교자와 한가지로 하느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된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이르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3-24)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순간순간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자기를 버림이고, 우리가 만들어진 목적에 한 걸음이라도 더 진지하게 나아감이 곧 제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순교자들이 보여 주었다.

“모든 창문이 열려있는 빈 방(R. Jurado)" - 현대인의 마음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아무 것이나 다 들어와 뒤죽박죽 섞여서 무엇이 좋은 것인지 무엇이 나쁜 것인지 모르는 상태, 주인도 없고 중심도 없기에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고, 진지함과 진정성 없이 신앙까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우리는 아닌가? 무거운 것보다 가벼운 것이 좋다고들 한다. 심각한 것보다 편하고 쉬운 것을 선호한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쉽고 가볍고 편할 수는 없다. 세상에 태어난 목적과 세상을 살아갈 이유까지 장난하듯 가볍게 흘려보내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김대건 신부는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 호소한다.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지 않겠는가?”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1년 9월호, 글 남
궁민 루카 신부(원주 R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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