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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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우리 삶이 성화와 복음화의 여정(삶이 바로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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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2-03 ㅣ No.1367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우리 삶이 성화와 복음화의 여정(삶이 바로 사명)

 

 

지나온 생의 시간을 돌아보면,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와 부끄러움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저 견디고 버티면서, 생의 여정 속에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 그저 본능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반응하면서 살아온 것이 아닌지,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자주 있습니다. 지나온 생의 시간, 앞으로 남은 생의 시간들, 그 모든 생의 여정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제 머리 안으로 문득문득 다가옵니다. 우리의 생은 주님을 향한 순례의 여정이라고 말하며 살아왔지만, 정작 실제로는 별다른 의식없이 그냥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에 서늘해질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온 생애를 하나의 사명으로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삶의 매순간에 또 여러분이 해야 하는 모든 선택의 순간에 예수님께서 나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늘 성령께 여쭈어 보십시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23항)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 말씀이 갑자기 뭔가 통렬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말씀도 아니고, 알지 못했던 새로운 말씀도 아닙니다. 매우 단순한 말씀이고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씀이 강하게 와 닿습니다. 사실, 우리 생의 진리는 그리 복잡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세속의 번잡함에 휩싸여 잊고 있었거나, 아니면 말로는 늘 표현했지만 습관적인 말의 반복이어서 그 깊은 의미를 놓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할 때 삶의 거룩함과 신비가 드러납니다

 

우리의 생은 그 자체로서 소중하고 신비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수행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결합하고 일치할 때, 우리의 생은 진정으로 거룩하고 신비한 특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이승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한다는 것은 곧 자기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오늘날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반영할 수 있는 인격적인 신비를 형성”(24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과 지향은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여줄 수 있고 증거할 수 있는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신비입니다.

 

신앙인의 전 생애 여정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고 완수하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 하느님의 신비,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성사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그 신비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분명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 자신을 변모시켜 주시고 새롭게 해 주시도록 스스로를 내어 맡기십시오.” “빛을 비추어 주시는 그분의 초자연적 은총에 언제나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24항) 내어 맡기는 태도, 열려 있는 자세가 요청됩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과 그분께 활짝 열려 있는 것을 세속적 맥락에서 설명하면, 겸손과 개방성입니다. 즉, 언제나 신앙인에게 필요한 태도와 자세는 겸손함과 개방성입니다. 참된 신앙은 완고함과 엄격함이 아닙니다. 최근 성탄절 강론에서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완고하고 엄격한 신앙이 그리스도교를 점점 쇠퇴하게 하고 있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겸손하고 열린 태도로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 생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으며, 우리의 생은 신앙의 신비로 변해갈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하느님 나라 건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그를 이루기 위해 당신의 온 삶을 투신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그분을 세상에서 반영해야 하는 우리 신앙인 역시 당연히 하느님 나라 건설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임무에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거룩한 사람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25항) 그 임무는 “만민을 향한 사랑과 정의와 평화”(25항)를 위해 노력하는 일이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리를 전하고 신학적 지식을 가르치는 일이 아닙니다.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은 교세를 확장해서 성사 생활에 많은 사람이 참여하게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물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 안에는 교리를 전하고 신학을 가르치고 많은 이들이 성사의 은총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은 단순히 종교의 영역 안으로만 좁혀질 수는 없습니다. 전례와 성사 생활이라는 좁은 의미의 종교적 행위를 넘어섭니다.

 

전례와 성사생활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와 정의가 흘러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와 정의를 실천하는 일에는 때때로 모함과 왜곡이 따르고 분열과 갈등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거기서 발생하는 불편함과 힘듦과 어려움 때문에 우리는 종교의 영역에서만 안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종교와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실현되어야 할 과제이며 사명입니다.

 

 

성화와 복음화는 서로 다른 길이 아닙니다

 

미사 때 신자들의 기도에서 숱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가 숱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정작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말의 차원에서 끝나고 있는 현실을 자주 목격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아마도 삶의 본질과 사명을 분리하고, 신앙 행위 안에서의 기도와 사목적 헌신을 분리하는 경향 때문에 그렇습니다. “침묵을 사랑하지만 다른 이들과 교류는 회피하는 자세, 휴식만 취하려 들고 활동을 거부하는 자세, 기도를 추구하지만 봉사는 폄하하는” “건강하지 않은 자세” 때문입니다.(26항) “사목적 헌신이나 세상 속에 투신하는 일이 마치 성화와 내적 평화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분심거리’인 것 마냥 이를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싶은 유혹”(27항)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태도가 사명을 수행하는데 걸림돌과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관상과 행동, 둘 다 중요하다고 말은 합니다. 하지만 정작 실제에서는 그 둘을 자꾸만 분리하고 어느 한쪽을 더 중요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 관상, 성화, 내적 평화, 침묵, 영성 체험, 이런 것들이 신앙에서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봉사, 활동, 헌신, 투신, 사명 수행, 등은 중요하지만 본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도와 사목적 헌신이 분리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성덕의 정신이란 혼자 있는 시간만큼 봉사에 헌신하고, 사생활만큼 복음화활동에 투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은 성화의 길을 따라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31항)

 

신앙인은 무엇보다 내적 성숙과 영적 성장을 통해 자신을 성화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성화와 세상의 복음화는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성화가 먼저이고, 세상의 복음화는 그 다음이라는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성화와 세상의 복음화는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화와 복음화의 여정이 우리의 삶이며 사명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2월호, 정희완 사도요한 신부(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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