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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희년]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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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63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인간

 

 

1. 머리말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고유한 인간 이해와 그에 따른 이상적 인간상이 있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그 시대의 정신을 가장 잘 재현하고 구현하는 인간상을 반영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표상 안에는 또한 그 시대의 이념을 성취해 가는 지향성이 담겨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지닌 인간에 대한 이해와 표상은 언제나 그 시대 정신과 관련해서 거듭 새롭게 해석되고 다시금 주어진다. 새로운 이해와 사유의 패러다임이 제시될 때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인간상을 표상하고, 이로써 그 시대 정신을 재현1)하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의 축은 '지금 이 곳'에 현존하는 인간에게 현재로 집약되기에, 따라서 우리는 시대의 흐름을 현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이러한 인간상을 중심으로 구분 지어 볼 수 있다. 이제 새로운 세기의 인간상을 위한 해석학적 지평을 마련하기 위해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따른 인간 이해를 해명하여 보기로 하자.

 

 

2. 시대의 흐름에 따른 인간 이해

 

고대 신화적 세계에서 전형적 인간은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신적인 세계에 숙명적으로 종속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시대에서 이상적인 인간은 한편으로 신의 세계와 가장 잘 소통하는 인간이거나 또는 그에 맞서 과감히 자신의 삶과 의지를 펼쳐 가는 영웅의 모습으로 제시된다. 예를 들어 고대 민족의 신화나 설화에 나타나는 건국 시조, 영웅이나 전사들, 그리스 신화와 호머의 서사시에 보이는 영웅들의 신화적 모습이 이러한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이에 비해 인간의 힘을 절대적으로 초월하는 세계에 지배되고 운명 지어진 나약한 인간의 모습 역시 또 다른 한편의 인간상을 보여 주고 있다. 운명의 여신(Moira)에게 지배되는 인간, 숙명 지어진 외디푸스나 소포클레스의 비극시에 드러나는 인간상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보듯이, 이데아의 세계를 회상하며, 본질을 직관하기에 동굴을 벗어나 다시 동굴로 돌아오는 지혜로운 존재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성서적 인간관은 하느님의 형상(Imago Dei)에 따라 창조된 인간이라는 표상을 지닌다. 신에게 창조된 귀중한 존재인 인간은 그럼에도 흙에서 주어진 존재이다. 이렇게 이중 모습을 지닌 인간은 영원한 고향을 찾아갈 때만이 존재 의미와 충족을 얻을 수 있는 미완성품이며, 덧없는 지상을 벗어나야 하는 보잘것없는 존재이다. 지상의 나그네(Homo viator)인 인간은 하느님 말씀을 들음으로써만이 자신을 일깨울 수 있는 존재,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인간이며, 신에게서 벗어날 때에는 쓰러질 수도 있는 다윗과 솔로몬, 삼손과 같은 존재이다. 하느님을 따를 때 인간은 진리를 얻고 진실한 인간이 되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전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기에 인간은 그 말씀을 듣고 그를 전하는 이사야나 그 말씀 때문에 고뇌하는 예레미야이기도 하며, 그 말씀을 피해 달아나지만 결국 다시 그 품으로 돌아가는 요나와 같은 존재이다. 이러한 고대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헬레니즘의 철학과 문화가 유다-그리스도교 전통과 만남으로써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유럽 정신의 두 축인 이러한 전통이 매우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희랍 교부 오리게네스는 이를 종합하여 하느님께 영원히 교육받는 인간상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모든 진리와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찾아가는 영원한 교육 과정에 놓여 있는 존재로, 마침내 신적인 존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이끌어 가는 존재이다.2) 중세적 인간관에서 인간은 하느님 말씀을 듣는 존재로 진리의 근원, 신의 존재 안에 머물 때까지 불안해하며 방황하지만, 그 안에서 참다운 삶의 근원을 찾는 존재로 이해된다.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 데 아퀴노가 제시한 인간은 이러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와 함께 신의 창조물인 이 자연과의 연관 안에서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이끌어 가는 것 역시 인간의 참된 모습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로고스 중심적이며 플라톤적인 인간 이해의 표상과는 달리 존재의 진리를 몸으로 드러내는 또 다른 흐름의 인간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이해를 아주 잘 드러내는 전형적인 인간상이다. 그의 '평화의 기도'는 물론이고 자연의 존재, 다른 생명체와 나눈 인격적 대화는 중세뿐 아니라 근대 이후를 이야기하는 지금 이 순간까지 이성과 감성, 자연과 문화의 세계가 이룩한 조화와 일치를 가장 잘 표현하는 이상적인 모습이다.

 

고대와 중세의 인간상에 비해 근대에 와서는 진보와 계몽의 인간, 지식인, 시민이라는 새로운 인간 이해가 형성된다. 중세 세계가 해체된 후 그를 대신하는 근대는 이성 중심주의와 인간 중심주의, 진보와 계몽, 기계론적 세계관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이제 세계와 역사,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이러한 원리에 따라 해석되고 수용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시대의 이상적 인간은 이성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며 계몽 정신을 실천하는 존재이다. 근대의 인간인 시민은 고대의 운명 지어진 인간도 아니며, 중세의 '하느님 나라의 백성'도 아닌 자신의 이성으로 세계 안에 홀로 자신을 이끌어 가는 계몽되고 문명화된 존재로 나타난다.3) 근대의 많은 선교사들과 이른바 탐험가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러한 이상을 '비계몽된 지역'에 전파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근대의 정신으로 무장하여 자연을 정복하여 인간화하며, 무한한 진보의 이상과 인간 이성의 궁극적 승리를 한치도 의심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여기에 뉴턴적 고전 과학과 다윈의 진화설, 프로이트의 심리적 구조에 따른 인간 이해와 진보주의는 잘 상응하면서 근대의 전형적인 인간형을 창출하였다.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위엄을 잃지 않으면서 자신이 지닌 이성의 힘으로 새로운 세기를 열어 가는 위대한 인간이 불투명한 안개 속 저 너머의 세계를 응시하며 멋진 신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근대의 이상적 인간형이었다.4) 이들은 헤겔이 지적했듯이 존재의 주인으로서 세계와 자연, 인간과 다른 모든 생명체를 대상으로 다루면서, 자신이 이 모든 존재의 지배자로서 군림하는 인간 중심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이 때쯤 해서 이러한 이성과 사물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지닌 인간으로 '지성인'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기에 이른다.5) 1800년대 중엽 러시아의 작가 투르게네프(I. S. Turgenev)가 만들어 낸 이 개념은 지식 계층을 뜻하는 말로 초기에는 회의적인 모습을 포함하는 부정적 의미가 있었으나 서구에 유입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지성인 개념으로 수용되었다.

 

후기 근대에 이르러 이러한 근대 인간상은 근대성의 절정에 이르게 된다. 과학, 기술이 모든 진리의 준거점이 되고 자본주의적 세계관이 무한히 확대된 후기 근대라는 시대는 근대가 만든 이러한 사상이 형식으로 분명히 구현된 시기이다. 따라서 이 때의 이상적인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이거나 완성을 향한 존재가 아닌, 계몽주의적 시민이 근대성으로 구현된 과학주의와 자본주의 원리를 실현하는 존재로 이해된다. 자신이 지닌 기술을 이용하여 자본을 창출하고 세계를 그 기술에 따라 이해하는 기술인, 자본주의의 이념에 가장 충실한 경영인들과 디지털 시대와 정보화 시대에 정보를 소유하고 창출하는 정보인6)이 이 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재현한다.

 

 

3. '새로운 세기'에 대한 올바른 이해

 

'새로운 세기'란 사실 인위적인 시대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의 해'(Anno Domini)라 불리는 서력 기원은 구체적 시간 안에 살았던 지상 '예수'의 사건이 신앙의 '그리스도'로 선포되면서 이루어진 시대 구분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탄생에 따른 구분도 아니며, 단군의 해에 따른 것도 아닌 그리스도교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유럽의 문화적 세례에 따라 이루어진 시대 구분이다. 결국 인간의 궁극적 구원과 해방을 선언한 '예수 사건'과 그 의미 지평과의 연관에 따라서만이 새로운 시대의 의미는 올바르게 주어질 것이다. 유럽의 역사에서 이러한 '시간'(kairos)이 지니는 의미에도 '근대성'(Modernity)이라 이름하는 특정한 시대의 정신은 이와 같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 구원과 해방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지난 16세기 이래 이성 중심주의와 인간 중심주의, 무한한 진보라는 사상으로 특징지어져 왔던 유럽 근대의 정신은 과학·기술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사회, 경제, 정치 체계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자신의 이념을 확장해 갔다. 현대는 이렇게 규정된 시간이었다. 그것이 19세기 말엽 제국주의의 이름으로 이땅에 밀려오면서 우리 역시 서구 근대의 정신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고, 이것이 개항 이후 우리의 역사였다. 이렇게 우리는 근대의 정신이 오늘날 우리 삶과 사회, 학문과 예술, 경제와 문화 전반에 걸쳐 절대적 힘을 행사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세기를 이야기할 때, 그것은 단순히 숫자상의 2000년이 아니라 이러한 근대의 한계와 근대를 벗어나기 위한 담론을 새로운 시대의 담론, '탈근대'의 담론과 연관하여 논의할 때 새로운 세기의 의미가 올바르게 주어질 것이다. 그럴 때 이러한 논의들은 모든 인류의 구세사와 '주님의 해'가 지니는 올바른 의미가 드러남으로써 역사의 흐름에 정당한 인간학적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이 시대에는 이 시대에 필요한 인간 이해가 요구된다. 이를 위해 인류 사상의 흐름 안에 있었던 여러 인간 이해에 담긴 보편적 특성을 간략히 정리해 보기로 한다.

 

 

4. 보편적인 인간 이해

 

1) 인간은 일차적으로 사이 존재(中間子的 存在)로 이해된다.7) 인간은 신적인 존재는 아니면서도 동물보다는 뛰어난 중간자적 존재이다(시편, 8장 등). 그는 우주보다 위대하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인간적 조건 때문에 몸부림치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모순된 존재이다. 이러한 이해는 사실 매우 일반화된 인간상이기도 하다. 인간은 시간적으로 시작과 끝 사이, 시작과 완성 사이, 공간적으로 우주와 이 곳 사이, 육체적으로 욕망과 이상 사이, 감성과 이성 사이에 있는 존재이다. 그의 정신과 의식은 생명의 첫 시작에 근거하면서도 또한 신적인 영성을 향하여 가는, 그 사이에 머물러 있는 존재이다. 여기서 나아가 우리는 인간을 그 사이 안에서 관련을 맺는 관계적 존재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기에 이러한 인간은 결국 길 위에 있는 존재, 과정 중에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존재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역사와 그 의미에 대한 해석과 성찰이다.

 

2) 한편 인간은 실존적으로 불안하고 허무한 존재이면서 존재론적으로 의미를 찾아가며 이를 구현하는 충만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 존재이다. 따라서 세계의 모든 문제, 모든 학문은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문제가 된다. 세계는 의미를 추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이 있기에 이 우주 안에서 역사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자연과 우주의 역사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존재인 인간이 없이는 단순히 현전(現前)하는 사물일 뿐일 것이다. 모든 우주와 자연, 세계와 역사, 인간과 모든 생명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초월적 존재인 인간이 지닌 의미 지평이라는 근본적 숙명 안에 자리잡고 있다.

 

3) 이러한 보편적 인간 이해를 우리는 이땅의 문화와 전통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이상적 인간형으로 흔히 제시되는 군자(君子)는 유럽의 근대적 인간상과는 달리 근본적으로 진리 추구와 의미 구현이 전형화된 존재이다. 군자는 안으로는 자신을 완성하고 밖으로는 천하를 평화롭게 만드는[內聖外王] 선비의 상을 지닌다. 그는 하늘의 소리[天命]를 듣는 사람이며, 성인의 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덕을 실현하는 인간이다. 그는 자연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밖으로 사람을 평안하게 하고 안으로 도를 닦는 사람이다.

 

그러나 유럽의 근대성이 이땅에 밀려온 이래 이러한 선비의 모습은 우리에게는 전(前)시대적인 모습으로 여겨졌다. 개항 이래 이땅의 지성인은 선비의 모습을 대신하여 서구적인 계몽된 '지성인'상을 이상적 인간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지만 지성인에 대한 전통적인 군자상, 선비 정신과 그 덕목을 바라는 향수에 젖은 생각들은 유럽에 대한 반발의 형태로든 또는 전통에 대한 복고의 정신에 따른 것이든 계속해서 유지되어 왔다. 이러한 이중적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에 대한 분열된 사고 방식이다. 세계화와 경쟁 논리에 따라 학문과 대학에 대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기여를 요구하면서도 한편으로 지식인들을 이러한 논의에 뒤쳐진 사람 또는 시대의 발전을 가로막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왜곡된 표상이 만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풍토에서는 결코 학문과 지성의 성숙 또는 인간의 이상적 모습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전통적 선비의 모습을 이상적 인간으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선비 문화에 대한 해석학적 반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선비의 모습을 세우려면 먼저 선비 정신이 싹트고 자랐던 그 삶의 자리에 대한 해석학적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해 없이 단순히 전통적인 선비 정신으로 돌아가려는 바람은 공허한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현시대의 자본과 과학적 기술의 논리만이 정당성을 입증받는 시대에서 선비 정신이나 그 시대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어떠한 유용한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근대의 끝자락에 선 이땅에서 자신의 지식을 이용하여 자본과 사회적 지위를 창출하는 사람은 '신지식인'으로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지성의 측면에서는 반역의 지성인, 일그러진 지성의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만 물질적 풍요로움 정도이다. 지성인의 역할을 비판과 성찰, 한 시대와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으로 이해한다면 결코 근대성의 논리를 극대화하려는 논의 안에서 지성의 올바른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다.

 

 

5.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이상적 인간의 특성

 

1) 인간은 희망하는 존재로서 근본적으로 영성의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분열된 지성과 감성을 통합하는 초월적 영성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이다. 성스러움이란 달리 말해 모든 있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드러내고, 또한 그 드러냄 안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차이와 동일성에 따라 모든 개체적 차이성을 하나로 엮어 가는 존재이다. 그는 물질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가 엮어져 서로 어우러지는 생명체이며, 이성과 감성, 우주와 생명의 역사를 통합적으로 유지해 나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통합의 원리는 인간이 지닌 의미와 진리에 대한 근본적 결단에 달려 있다. 그것은 초월적 존재론에서 주어지는 의미성, 초월성에 좌우된다. 그것은 차이와 모순이 그 자체로 갈등과 대립을 빚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존재의 정당성을 유지하면서 더 높은 단계에서 화합하고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N. Cusanus, Coincidentia oppositorum). 또한 인간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형성되고 자신을 이루어 가는 역사적 존재이기에 이러한 인간의 관계성과 역사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나아갈 방향, 지향성을 결정하는 존재이다. 그것은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선험적인 존재론적 초월론으로 올바르게 주어질 것이다. 시대의 표징을 읽고 그에 따라 이 시대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이러한 인간의 고유한 과제이다. 그것을 우리는 '예언'이라 이름한다. 새로운 세기에 필요한 예언은 점술적인 미리 말함[豫言]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과 그 말씀을 맡아 전하는 예언(預言)이다. 이렇게 인간은 근본적으로 시대의 징표를 읽고 예언의 기능을 담당하는 의미 부여자이다. 따라서 세계와 우주, 인간의 역사와 미래는 인간의 의미 실현과 의미 구현의 노력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2)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른 생명체와 타자, 우주와 역사에 대하여 책임을 지닌 존재이다. 그것은 근본적인 규범(Norm) 안에서 제시될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 도덕 규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을 의미한다. 오늘날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팽배한 크나큰 잘못은 인간이 지닌 타자에 대한, 다른 생명체와 자연, 역사에 대한 책임과 도덕률을 진부한 것 또는 버려야 할 것으로 보는 일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윤리적 존재이며 도덕률에 따라서만이 자신의 존재를 달성할 수 있다. 윤리와 규범, 자유와 책임, 진리와 도덕률은 인간으로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근본 조건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공동체의 문화와 나아갈 방향에서 주어진다. 여기에서 근본 문제는 초월적, 선험적 세계에 대한 결단과 그에 따른 인간 일반에 대한 믿음과 투신이다. 윤리는 한 사회의 관례적 측면(Ethos)과 개인의 실존적 열정(Pathos)을 조화시키면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함에 있다. 그것은 인간이 느끼는 근본적 아름다움과 충만함의 느낌 안에서 올바르게 주어질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미학적 존재(Homo aestheticus)이다. 세계 해석이 마치 새로운 틀을 짜는 레고 놀이와 같다면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은 이러한 규범으로서의 윤리성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3) 생명체가 공존의 원리에 자리잡고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생명체와 함께하는 삶의 원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더불어 삶'이란 원리를 의미한다. 이것을 위한 인간성의 특성은 인간이 지닌 생명 이성을 구현함으로써 생명의 다원성을 인정하고, 이로써 모든 생명체에 의미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갈 권리는 너에게 있는 삶의 권리로 가능하다는 전제와, 모든 생명이 지니는 동일한 근원을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삶의 원리를 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만이 나는 우리 모두와, 그리고 모든 생명체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상적 인간인 우리는 삶의 구체적 변화로 실천적 삶의 원리를 이루어 가야 한다.

 

새로운 세기는 흔히 경제와 환경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이 두 문제는 궁극적으로 근대의 인간이 초래한, 근대의 끝자락에 놓인 지난 세기가 남겨 준 문제이다. 또한 후기 근대의 담론 안에서 이 세기를 문화의 세기, 정보 통신 혁명의 세기, 심지어 생명 공학의 세기라고도 한다. 그런데도 이 모두는 결국 인간의 문제이며, 인간의 근본적 변화와 이해의 전환 없이 이루어지는 모든 논의는 맹목적이며 공허할 뿐이다. 인간은 궁극적 완성을 향한 존재이다. 이것은 증명의 문제나 지식의 문제가 아닌 선험적 결단의 문제이다.

 

4) 이에 덧붙여 한국의 지성은 새로운 규범을 창출하려고 고뇌하는 지성의 과제를 지닌다. 그것은 전통적 규범이 유럽의 세력과 근대성이 밀려온 이래 구시대의 유물로 여겨졌지만, 이를 대신할 새로운 규범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이중의 갈등에서 주어지는 시대적 소명이다. 이것은 유럽의 근대성에서 초래된 지식과 삶, 자연과 인간, 자연 과학과 인문 과학의 분열과 균열을 새롭게 만나게 하고 일치시킬 수 있는 이 시대 이땅의 새로운 규범을 이끌어 내는 작업을 의미한다. 이는 서구의 좁은 합리적 이성을 넘어서 새로운 생명의 이성을 이끌어 내고, 다원적 실재의 정당성을 유지하면서도 그 모두를 함께 엮을 수 있는 통합의 존재론적 원리를 창출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원리는 결코 구분과 차이를 폐지하는 일원론적 통합이 아니라 이를 유지하는 두 원리의 상호 어우러짐, 존재론적 역동성을 의미한다.

 

이제 근대를 벗어난 새로운 세기가 후기 근대가 아닌 서력 기원의 근본적 의미에 따른 새로운 세기라면, 이에 걸맞은 인간은 책임 있게 세계와 시대를 바라보는 생명성의 인간일 것이다. 그는 세계를 해석하면서도 존재론적 의미 부여와 함께, 생명체적 책임과 '더불어 삶'의 원리를 구현하는 사람이다. 진정 나와 이웃, 역사와 세계, 인간과 생명체 모두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생명성을 지니는 인간은 이러한 생명성을 삶의 이성과 감성 안에서 말씀을 맡아 전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 그것은 초월 영성에서 올바르게 이해된다. 그러한 사람은 시대의 무게에 짓눌려 미치거나 현란한 욕망의 문화에 현혹되어 시대의 부름에 눈감지도 않는 사유의 고뇌함과 실천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인간이다. 미래는 언제나 근원에서 유래하기에 근원을 잊지 않으면서 미래를 바라보는 인간은 이 모두를 현재에 응축시켜 새로운 탈바꿈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상을 이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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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현(representation)이란 일차적으로 정치적 의미에서 이해된다. 왕의 권위를 대변하는 관리나 국민의 권리를 대표하는 의원들 등. 또한 여기에는 신적인 현존을 재현하는 종교 의식, 나아가 진 선 미나 성스러움을 재현하는 지식, 축제, 의식, 이미지 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2) Origenes, Werke, I-XII, 1899-1955년, Vier Bucher von den Prinzipien 참조.

3) I. Kant, Ideen zu einer allgemeinen Geschichte in weltburgerlicher Absicht, 1784년.

4) 카스파르 D. 프리드리히, [짙은 안개 위에 서 있는 나그네], 1818년 참조.

5) 지성의 개념과 Intelligencija의 의미에 대해 J. Rittter u.a. (Hg.), Historisches Woterbuch der Philosophie, 4권, Basel-Stuttgart, 1976년, 445-461면 참조.

6) Alvin Toffler, [제3의 물결], 정해근 옮김, 서울 경제 신문, 1989년 참조.

7) 이기상, [존재의 바람, 사람의 길], 철학과 현실사, 1999년, 397-402면 참조: 그는 인간을 '빔-사이', '사람-사이', '때-사이', '하늘과 땅-사이'의 '사이에 있는 존재'로 이해한다.

 

[사목, 2000년 1월호, 신승환(가톨릭 대학교 교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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