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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도미니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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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3-05 ㅣ No.97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도미니코 수도회 (상)

 

 

도미니코 수도회의 본질적인 수도 생활 요소는 초대 교회 사도들의 생활을 모범으로 삼으면서 관상생활과 연구생활, 공동체 생활 및 복음삼덕, 사도직 활동 등두하는 것이다.

 

 

설교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사명에 따라 일명 '설교자들의 수도회' (설교자회, 라틴어: ORDO FRATRUM PRAEDICATORUM [O.P.] )라고도 불리는 도미니코회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요약대로 "진리를 관상하라 그리고 전한다"(contemplari et contemplata aliis tradere)를 모토로 한다. 밤낮으로 하느님의 계시된 진리를 공부와 기도로 알게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설교와 가르침으로 전한다는 뜻이다.

 

도미니코회 창설자인 도미니코(1170~1221)는 12~13세기 교회 쇄신에 특별히 많은 업적을 남긴 성인인데 도미니코회 설립도 그러한 성인의 노력과 무관치 않다.

 

그는 당시 교회안에 뜨거운 감자로 등장해 있던 알비파 이단의 오류에 맞서 이단을 대적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대 교회에서 처럼 청빈한 삶속에서 정통 교리를 적극적으로 전파하는 설교 수도회의 창립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런 맥락에서 도미니코는 1216년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회칙과 프레몽트레 수도회 규칙을 토대로 절대 청빈에 바탕을 두는 가운데 세속안에 살면서, 사람들의 회개와 개종을 촉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느곳이라도 달려 갈 수 있는 적극적인 도미니코회 수도회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스페인 북부 칼라루에가에서 태어나 수석 사제였던 삼촌으로부터 일찍부터 성직 교육을 받았던 도미니코는 10년여 동안 팔렌치아에서 문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오스마 대성당 참사회 회원을 거쳐 1198년경부터 공동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디에고 주교와 함께 외교 사절로도 활동했던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알현을 계기로 알비파 이단을 막기위한 시토회 설교 선교회에 합류하게 됐고 9년여 동안의 활동을 통해 설교자회 창립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1215년 툴루즈에서 첫 회원을 모집하고 교구내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설교를 시작했던 도미니코는 마침내 1216년 교황 호노리오 3세때 세계적인 설교자들의 수도회로 도미니코 수도회의 공식 승인을 받았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본질적인 수도 생활 요소는 초대 교회 사도들의 생활을 모범으로 삼으면서 관상생활과 연구생활, 공동체 생활 및 복음삼덕, 그리고 규칙 준수와 사도직 활동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 요소들은 세상 모든 영혼들의 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도미니코 수도회만의 독특함을 형성해 왔다.

 

회원들에게 연구는 의무이며 그 목적은 복음화다. 또 '설교자회'라고 하는 만큼 설교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중요 목표와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데 여기서 설교의 의미는 관상적 체험과 기도에서 비롯되는 설교, 그리스도교의 교의적 성격을 보존하기 위한 진리탐구에서 비롯되는 설교, 믿음을 지켜주는 개인적 공동체적 가난에서 비롯되는 설교 등이다.

 

도미니코 성인은 수도회 공식 설립후 파리 대학에서 설교사 수도원을 설립하는 등 대학의 신학 연구에 큰 틀을 제공했으며 특히 대도시와 교육 중심 도시에 수도원을 세움으로써 수도회가 지향하는 이념을 실현시켰다.

 

그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도미니코는 선종하던 해에 서유럽 8개 관구에 500여명의 수사들과 60여개의 수도원을 지켜볼 수 있었으며 1300년 경에는 500여 수도원에서 1만여명의 수도회원이 활동하는 비약적인 성장세가 이어졌다. 도미니코는 1234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됐다. [가톨릭신문, 2004년 11월 7일, 이주연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도미니코 수도회 (하)

 

 

현재 한국 도미니코회의 활동은 각 본당 미사집전 및 강론, 영성지도, 피정지도 등이며 1475년 창립된 평신도 신심단체 「로사리오회」와 「토마스 아퀴나스 청년회」 지도 등을 맡고 있다.

 

 

1216년 교황 호노리노 3세에 의해 공식 수도회 인정을 받은 도미니코회는 창설자 성 도미니코가 살아있을 때는 물론 사후에도 수세기를 거치며 세계 곳곳에 진리 수호와 설교를 통한 복음화 사업에 헌신했다.

 

'정통 신앙의 파수꾼'이라는 명칭을 얻었던 도미니코회는 십자군 원정시 군인들에 대한 격려 설교로부터 교회내 도서 검열까지 그만큼 여러 역대 교황들로부터 다방면의 협조 요청과 임무를 부여 받았다. 종교 재판이라 불리는 이단 심문 재판의 재판관도 도미니코회 회원들이 맡은 경우가 많았다.

 

성인들이 많이 배출된 수도회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는 도미니코회는 토마스 아퀴나스, 대(大)알베르토, 교황 비오 2세 등과 함께 일본에서 순교한 16명의 회원과 베트남서 순교한 60명 회원이 각각 시성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인디안의 수호자'로 전해지고 있는 바르톨로메 데 카사스도 도미니코회 출신이다.

 

1587년 도미니코회는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성 로사리오 관구'를 설립,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하였거나 교회가 뿌리 내리지 못한 지역의 복음화에 매진하게 된다. 처음부터 선교를 지향했던 창설자의 이념이 구체화된 사례이기도 했다.

 

성 로사리오 관구가 주 활동 대상 지역을 필리핀 및 동양으로 삼았던 점에서 한국 교회와의 인연도 여기서 비롯됐다. 조선 선교를 위해 일본에서 준비중이던 복자 성 도미니코의 요한이 조선 땅을 밟지 못하고 순교한 것. 이후 재불 화가로도 유명한 김인중 신부가 도미니코회에 입회하게 됨으로써 한국과의 끈이 재개됐다.

 

한국 교회 진출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82년 개최된 도미니코 수도회 아시아 총회를 통해서였다. 성 로사리오 관구를 통해 한국 진출에 대한 관심이 표명되자 로마본부 책임자가 3개월여에 걸쳐 한국을 순방했고 1987년 열린 아시아 총회에서 한국 선교가 성 로사리오 관구에 공식 위임됐다.

 

이후 한국 진출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서울대교구의 초청을 받아 1990년 한국 교회에 첫 선교사를 파견한 도미니코회는 1992년부터 한국인 지원자를 모집하게 되었고 1994년 서울 미아리에서 수도원 축복식을 가졌다.

 

현재 한국 도미니코회의 활동은 각 본당 미사집전 및 강론, 영성지도, 피정지도 등이며 1475년 창립된 평신도 신심단체 '로사리오회' 지도와 '토마스 아퀴나스 청년회' 지도 등을 맡고 있다.

 

특히 로사리오 신심회는 성 도미니코가 성모 마리아께 대한 특별한 사랑을 말과 모범으로 가르쳤던 것을 모범 삼아 회원 알라노 드 루페(1428~1478)가 1475년 설립한 평신도 신심단체이며 토마스 아퀴나스 청년회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라 참된 진리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생긴 청년회다.

 

한국 도미니코회는 앞으로 순회설교, 기도 모임, 평신도 지도자 양성, 소공동체 모임 활성화 등에 주력할 예정이며 도미니코 가족 형성과 로사리오 신심 보급을 주된 활동으로 펼쳐나갈 계획이다.

 

한편 도미니코 수도회 가족들로는 1206년 도미니코 성인이 여성들을 위해 설립한 관상수도회와 1280년 설립된 재속회 등이 있다. 도미니코 수도회 전체 회원수는 80여개국 7000여명 정도다. [가톨릭신문, 2004년 11월 14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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