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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간추린 사회교리: 인간에게 노동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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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6-04 ㅣ No.940

[간추린 사회교리] 인간에게 노동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노동’ 하면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일까? ‘생활의 안정’, ‘성취감’, ‘보람’, ‘자존감’ 등 긍정적인 생각인가, 아니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의무’, ‘피땀’, ‘힘겨움’ 등 부정적인 생각인가?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상반된 두 가지 생각을 모두 가지게 된다.

창세기 첫 부분도 노동에 대해서 상반된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 곧 노동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거룩한 사명(창세 1,28; 2,15 참조)이며 동시에 죄를 범한 인간의 고된 노역(창세 3,17-19 참조)인 것이다.

이처럼 현실에서 노동은 인간에게 축복이며 동시에 저주로서 다가온다. 과연 누가 그리고 무엇이 인간 노동을 축복으로, 아니면 저주로 만드는가? 모든 이에게 노동이 참된 축복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은 불가능한 것일까?


인간은 생계만을 위해 노동하지 않는다

난 오늘도
어김없이 배달을 한다
또 시작된 딸배1)
돈을 벌겠다고 시작한
알바가 직장이 되었다
배달을 가면서
이리저리 곡예를 부리며
차들을 제낀다
위험한 인생이다
그래도 난 돈을 벌 것이다
그것이 살길이다
(김남훈의 시 ‘딸배 인생’, 「내일도 담임은 울 삘2)이다 - 공고 학생들이 쓴 시」 김상희, 정윤혜, 조혜숙 공편, 2012년, 휴머니스트).

하루에도 수없이 만나는 무법적인 배달 오토바이를 보면서, 목숨을 담보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이들의 고통을 헤아리는 운전자가 얼마나 될까? 생계전선으로 내몰려 물불 안 가리는 이들에게 노동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느 누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내던지고 스스로를 밥벌이의 노예로 만들고 싶겠는가? 앞길이 창창한 한 청소년의 비장함이 서린 슬픈 노래는 피 끓는 절규로 다가온다.

“노동은 인간과 인간성을 나타내는 특별한 표시이며, 인격체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 움직이는 개개의 인격체를 나타내는 표시”(「노동하는 인간」, 서언)로서,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인간의 품위를 지키며 공동선에 이바지한다. 이뿐만 아니라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창조 행위와 예수님의 구원 행위에 참여하게 된다(「간추린 사회교리」, 263항 참조).

하지만 경제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인간은 살아있는 노동을 제공하는 경제의 한 요소로 전락하기 쉽고, 그의 노동 역시 경제적 의미 이상을 담아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노동하는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존엄성을 회복할 때에, 비로소 인간의 ‘노동’은 참된 의미와 가치를 회복할 수 있다.


노동은 자본보다 우위에 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주부가 등장한다. 주부는 멋진 디자인과 놀라운 기능을 자랑하는 세탁기를 돌리고 나서, 한가로이 독서를 즐긴다. 잠시 시간이 지나면 세탁을 마친 옷들이 개운하다는 듯 세탁기 밖으로 나온다.

옷에 찌든 때 때문에 울상이 된 주부가 등장한다. 물에 세제를 풀고 옷을 담근다. 주부는 콧노래를 부르며 여유를 즐긴다. 잠시 후 한 점 티 없는 깨끗한 옷들이 춤을 춘다.

구체적인 표현은 다를지라도 세탁기와 세제의 텔레비전 광고는 대개 이렇다. 주제는 ‘빨래’, 등장인물은 ‘주부, 세탁기, 세제’다. 과연 누가 빨래를 하는가? 광고는 슬그머니 주부를 엑스트라로 만든다.

과연 그런가? 빨래하는 주부가 없다면, 세탁기도 세제도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광고의 의도대로 세탁기와 세제에 머문다. 노동은 사라지고 노동이 이루어낸 기술만 남는다. 노동 없는 생산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신화가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널리 퍼져있다. 노동이 “단순한 상품이나 비인격적인 생산 도구로 간주될 수 없음”(「간추린 사회교리」, 271항)에도 거대한 생산 체계를 움직이는 부속품처럼 인식되고, 때때로 자본을 위해 희생되기도 한다.

분명 노동과 자본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상호 보완 관계가 존재하여야 한다. 하지만 “노동은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특징 때문에 생산성과 관련된 다른 모든 요소보다 우위에 있으며, 이러한 원칙은 특히 자본과 관련하여 적용”(「간추린 사회교리」, 276항)되어야만 한다.


노동하는 인간과 인간의 노동, 모두 존엄하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바라크 씨(35세)는 지난여름까지 경기도 양주의 플라스틱 사출공장에서 주야간 교대 근무로 하루 13시간 가까이 일했다. 일이 워낙 힘들어 한국인들은 하루 일하면 혀를 내두르고 돌아가는 공장에서 바라크 씨는 혼자 4개의 기계를 돌려야 했다.

최소한의 생활비를 남기고 다달이 고국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보내는 보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지만 이제는 다른 공장을 찾고 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사업주의 차별 탓이다.

바라크 씨는 “원래 한국인이면 서너 명이 필요한 일을 나한테는 ‘일! 일!’ 외쳐가며 혼자 하라고 시켰다.”면서 “힘들게 일하다 다쳤는데도 병원에 한 번 와보지도 않는 사장에 대해 섭섭한 기분도 든다.”고 토로했다.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로 회사가 바쁘면 반드시 일을 해야 되고 똑같이 일을 해도 한국 사람처럼 돈을 주는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사장은 큰 잘못이 없어도 그냥 마음에 안 들면 잘라버리거든요. 한국인 사장들이 우리를 일회용처럼 쓰는 거죠, 일회용.” 방글라데시에서 온 띠뚜 씨(37세)의 말이다(2010년 11월 12일자 ‘노컷뉴스’ 참조).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우리나라를 찾는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대부분 가난한 나라 출신인 이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꺼리는 힘겨운 노동에 자신을 내던지면서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소중한 희망을 가꾸고 있다.

이들은 결코 노동력이라는 경제적 가치에 의해서, 합법적 신분이냐 그렇지 않으냐는 법적 기준에 의해서, 배타적인 혈연적 가치에 의해서 판단될 수 없는 고유한 가치와 존엄성을 지닌 인격체이다. 그러기에 이들의 노동 역시 존엄하다.

과연 이땅의 이주노동자들은 온전히 사람다운 삶을 보장받고 있는가? “아무리 커다란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이민들 스스로 느끼는 절박한 처지를 착취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노동하는 인간」, 23항)는 교회의 준엄한 가르침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선한 포도밭 주인’이 필요하다

한 포도밭 주인이 일자리를 갖지 못한 이들을 찾아나선다. 수시로 사람들을 찾아 일을 맡긴다. 포도밭 주인은 그들의 됨됨이나 능력을 묻지 않는다. 다만 일하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그들을 구해내고픈 마음뿐이다. 포도원 주인 덕분에 생계가 막막하던 이들은 시름을 덜고, 일하지 못함으로써 자존감마저 흔들리던 이들은 자신의 가치를 깨닫는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노고에 대해 삯을 계산한다. 인간 경제의 논리를 따른다면, 한 시간 일한 사람은 열 시간 일한 사람이 받는 몫의 십분의 일만 받아야 한다. 하지만 포도밭 주인은 일자리를 찾다가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도 열 시간 일한 사람과 똑같이 대우한다. 노동의 양의 적고 많고를 떠나서, 인간다운 삶을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재화가 있기 때문이다.

포도밭 주인은 선하다. 자기 탓 없이 일하지 못하는 이들이 노동을 통하여 ‘온전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을 단지 경제적 능력과 가치로 평가하지 않고 ‘존엄한 한 사람’으로 받아들였기에, 포도밭 주인은 선하다(마태 20,1-16 참조).

냉혹한 경제 현실에서 인간 노동의 의미는 왜곡되고, 노동의 권리는 위협받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인간 노동’이라는 영역을 넘어서 ‘인간 자체’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오늘은 어느 때보다도 ‘선한 포도밭 주인’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1) ‘배달’을 지칭하는 청소년들의 은어.
2) ‘feel(느낌)’을 지칭하는 청소년들의 은어로서, ‘울 삘’은 ‘울 것 같은 표정, 느낌’을 뜻한다.

* 상지종 베르나르도 - 의정부교구 신부. 교구 성소국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5월호, 상지종 베르나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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