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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글로벌 생명학: 함석헌의 생명진리 사상 - 생(生)은 선택을 불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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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1-28 ㅣ No.990

[글로벌 생명학] “생(生)은 선택을 불허한다” - 함석헌의 생명진리 사상


지난 9월 17일 서울 종로에서는 종교계를 대표하는 종교인 33인이 ‘사랑합니다. 함께 삽시다!’라는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다. OECD국가 가운데 자살률 1위라는 한국의 현실 앞에서 종교계가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한 자리였다.

8년째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은 다른 회원국들보다 2.6배나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종교인들은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마련한 대국민 호소문에서 “어린 학생들이, 노인들이,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고통과 절망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생명을 던져서라도 벗고자 했던 삶의 무게를 나눠지지 못한 것이 죄스럽고 미안하였습니다.”

“이제 죽음의 행렬을 멈추기 위해 국민들이 나서주십시오. 삶에 지치고 고단한 이웃들에게 ‘사랑합니다. 함께 삽시다!’라고 따뜻이 말 건네며, 손을 붙잡아 주십시오.” 하고 호소하면서 이제라도 함께 나누며 서로 살리는 생명평화의 길을 찾아나가자고 다짐하였다.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도록 사회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무한경쟁의 살벌한 싸움터로 내몰리는 현대인에게 ‘생명’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삶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생명은 “살라”는 하늘의 절대 명령

식민지 시절, 해방 후의 혼란기, 6·25 전쟁, 그 후의 긴 독재기간 등 일생 동안을 자유와 독립, 민주화와 평화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며 자신의 한 몸을 사른 함석헌 선생(1901-1989년)의 생명사상은 우리의 몸속에 아로새겨진 생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끔 한다.

함석헌이 일생 동안 추구한 화두는 ‘생명’, ‘평화’, ‘진리’ 세 가지로 요약된다. 함석헌은 생명(生命)을 한마디로 ‘살라는 하늘의 명령’으로 풀이한다. 생명체는 그러한 하늘의 명령[뜻]을 받고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개체들이다. 개개의 생명체들은 다 살라는 하늘의 뜻을 받아 자신의 개체 생명을 불살라[에너지로 태워] 우주 곧 생명의 역사를 돌리는 데 동참한다.

우주에서 생명체의 등장은 우주의 역사를 본래의 역사인 생명의 역사로 전환시키는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생명체의 본래적인 삶의 목적은 우주 역사의 전개에 참여하여 자신의 몫을 다하는 것이다. 생명체는 자기 안에 새겨진 하늘의 뜻을 읽고 그에 따라야 한다. 그것이 이 생명체가 추구하고 이행해야 하는 진리이다.

그런 진리는 인식의 진리가 아니고 삶의 진리이다. 삶이 온갖 난관에 부대끼며 온몸의 상처로 배우는 삶 속의 진리다. 그것은 곧 개개의 생명체가 자기 안에 하늘의 뜻인 씨알을 키워내는 ‘알음’의 진리, ‘앓음’의 진리이다. 이 아픔의 경험이 앎[지식과 지혜]이 된다. 진리는 삶을 아는 ‘삶앎’의 진리가 되고 그것은 곧 하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의 진리가 된다.

함석헌은 우리말에서 우리 겨레의 삶의 진리를 읽어내려고 노력하였다. 그 말은 양반과 지식인들이 백성들을 속여서 지도자로 군림하려고 다른 나라에서 빌려온 어려운 외국어[한문, 일본어, 영어]가 아니라 이 땅의 씨알들이 반만 년의 역사와 전통 속에 매일같이 사용해 온 우리말이다.

함석헌은 우리 삶에서 우리의 말과 글, 우리의 글월[문화(文化)]이 돋아 나온다고 하며, 우리말로 할 수 없는 종교 · 철학 · 예술 · 학문이 있다면 아무리 훌륭해도 그만두라고 외친다.


생명의 바탈[性]은 ‘자유’

함석헌에 따르면 우주 자체가 스스로 발전하려는 하나의 뜻을 가진 생명체다. 그것을 과학적으로 보면 생명의 진화이고, 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늘나라 또는 정토의 완성이다.

함석헌은 우주 전개의 역사를 생명의 진화 과정으로 볼 정도이다. 역사는 영원의 층계를 올라가는 운동이다. 영원의 미완성곡이다. 하느님도 죽은 완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영원의 미완성이라 하는 것이 참에 가깝다.

역사는 산 것이기 때문에 그 운동은 자람이다. 생명은 진화한다. 역사는 자라나는 생명이다. 이렇게 볼 때 우주는 생명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또한 생명으로 인해 더욱 본래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우주와 생명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생명은 우주의 꽃이며, 우주는 생명의 뿌리다. 그런즉 생명과 우주는 하나를 이루는 삶 그것이다. 우주는 삶 그것이다. 자라는 것이다.

함석헌에 따르면, 여기서의 생명은 자유하는 생명이다. 우주의 역사는 생명의 ‘스스로 함’이 온갖 시련을 견디어내며 자기주장을 펼쳐나가는 생명 ‘펴참’과 진화의 마당이라고 말한다.

고난과 시련이 없는 생명의 전개란 없다. 고난이 곧 생명의 원리이다. 온갖 부대낌과 충돌 속에서 물질은 자기 안에 생명의 틈새를 틔우고, 고난과 시련 속에서 생명체는 자기 안에 정신의 씨알을 영근다. 정신은 알이 드는 알음[앓음]을 통해 자기의 몸과 마음 속에 우주생명[하늘]의 뜻을 결과 무늬로 수놓는다.

따라서 생명의 역사는 생명이 맞춤[적응]과 대듦[거부] 그리고 지어냄[창조]을 통해 자기주장을 펼치면서 생명체 속에 하늘의 뜻을 씨알로 새겨 넣는 앓음의 역사이다. 세계역사는 씨알로서의 민초들이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하늘의 뜻을 깨달아 읽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하는 화답의 장이다.


삶이란 ‘참’을 찾아가는 여정

우주가 곧 자라나는 생명이라면 우주의 진리는 당연히 생명의 진리일 수밖에 없다. 우주의 전개와 더불어 우주생명의 날줄에 맞추어 개체생명들이 자신들의 씨줄을 엮어 우주의 역사를 짜나가는 것이 낱생명들의 구체적인 삶이다.

그렇다면 참[진리]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삶 바깥에 참이 있을 수 있는가? 자기의 삶을 사는 것보다 참되고 진실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볼 때 온갖 형태와 방식의 삶이 다 참이다. 함석헌은 이를 한마디로 “삶이 곧 참”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함석헌은 무슨 근거로 삶을 참이라고 주장하는가? 함석헌은 삶 뒤에는 언제나 절대의 명령이 서있다고 말한다. 우리 일상어 ‘생명(生命)’에는 ‘생(生)은 명(命)이다.’라는 뜻이 들어있다. 삶은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명령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갈 때 그것은 단순히 ‘살아있다’가 아니라 ‘너는 살아라!’ 하는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생(生)은 선택을 불허한다.” 살 수 있으면 살고 살 수 없으면 말자는 그런 삶이 아니다. 생명은 ‘살라’는 하늘의 절대 명령이다. 삶은 그 명령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사르는 것이다. 삶은 필연이고 절대다. 따라서 하늘의 명령에 따라 사는 온갖 형태의 삶이 다 참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무수한 생명체의 삶의 현상들과 행태들이 곧 참일까? 그것이 참의 한 면모를 드러내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참은 아니라고 함석헌은 대답한다. 삶이 참이라고 했을 때, 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방향을 가리킨 것이지 삶 그 자체가 모두 참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참’이란 무엇일까? 함석헌은 삶이 참인 것은 삶이 참을 찾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은 참을 찾아 참을 이루려는 노력이다.

인간은 ‘스스로 해나가는’ 우주의 정신을 이어받아 스스로 참을 찾아 그 참에 따라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하늘의 뜻인 참은 완성된 물건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가없는 하늘의 뜻을 말로도 글로도 생각으로도 잡을 수가 없다. 그저 인간은 참을 찾아 긴 인생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참 마음, 찬[萬] 마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참을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는가? 함석헌은 참 든 마음으로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는 이미 참이 와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마음, 참되지 못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마음은 참이다. 참이 벌써 우리 마음에 와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참이며 또한 그래서 참을 찾는다. 그리하여 참을 찾아 나섬이 곧 참이 된다.

참이 들지 않는 것은 마음이 아니다. 다시 말해 참을 찾지 않는 마음은 마음이 아니다. 마음은 참을 찾는 것이다. 함석헌은 선뿐 아니라 악도 그 밑은 참에 있다고 말한다. 돈을 모으자고 생각을 하는 것도, 살인과 강도를 하는 것도 참을 찾는 데서 나온 것이다. 참을 찾노라 한 것이 그리된 것이다. 길은 길인데 바로 가지 못하고 꼬부라진 것이다. 참 마음은 그것을 펴 꼿꼿이 하고 올바로 해야 하며 섞인 것을 없애고 순수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참 찾음이며 수양이고 믿음이요, 새로 남이다.

‘참’은 무엇보다 ‘충만함, 그득 들어 참’을 뜻한다. 어느 한구석 이지러진 데가 없는, 조금이라도 빈 곳과 틈, 흠집이라곤 없는 온전[완전]함을 의미한다. 삶이 참을 찾음이라 했을 때 이 경우 참은 바로 이러한 온전함이다.

그런데 그러한 온전함은 무한이고 절대이며 영원이다. 유한한 상대 세계의 시간을 사는 인간으로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그러한 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생명의 그물을 함께 짜자

생명의 현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 곧 통함이다. 힘, 열, 기, 에너지, 정보, 마음, 정신, 영혼이 통하지 못하면 생명은 멈추게 된다. 우주의 역사 150억 년의 끄트머리에 우주의 한구석 태양계에서 그 꽃을 피운 생명이 인간의 반생명적 처신으로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우주 진화의 참뜻을 읽어내지 못하고 생명의 의미를 물질에서, 황금에서, 쾌락중독에서 찾고 있다.

소통과 화합, 비움과 나눔, 공생[함께 살기]과 상생[서로 살림]속에 생명의 그물망은 탄탄해진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돈과 권력만이 살길이라는 자본의 논리를 유일한 삶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 경쟁에서 밀려 돈도 힘도 없는 우리 사회의 약자인 노인과 청소년들은 삶의 끈을 못 잡고 죽음의 유혹 속에 흔들리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생명경시의 풍조 속에 함석헌 선생의 생명 존엄성에 대한 말은 허공을 때리는 빈말처럼 들리지만 우리 모두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우주를 다 주어도 아니 바꾸려는 것이 생명이요, 천년을 살고도 하루같이 여기는 것이 마음이다. 우리는 백이나 천을 살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요, 영원을 살기 위해 있는 것이며, 수만금 수억금을 가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무한을 가지기 위해 사는 것이다.”

* 이기상 루카 -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우리사상연구소 소장이며, 대표 저서로는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 「글로벌 생명학」, 「지구촌 시대와 문화 콘텐츠」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2년 11월호, 이기상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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