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3일 (일)
(녹) 연중 제12주일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강론자료

2013-0310...사순4주일...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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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3-03-09 ㅣ No.1344

사순 제 4 주일 (다해)

여호수아 5,9.10-12             2코린 5,17-21           루카 15,1-3.11-32

2013. 3. 10. 등촌3

주제 : 우리가 대하는 하느님의 모습

우리는 사순절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몇 주간 전, 사순절을 시작하면서도 이와 비슷한 말로 시작하면서, 사순절의 의미를 먼저 말한 일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다음의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전례시기에 대한 말을 들으면, 우리는 무엇을 먼저 생각하겠습니까?

 

대부분의 경우, 전례시기는 우리의 실제 생활과 별로 관련이 없게 바라봅니다. 실제로 그 표현에서 의미를 찾는다고 해도, 삶에서 힘겨운 일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전례시기는 대림절부터 시작해서, 사순절을 거치고, 부활절을 지나 연중시기로 끝을 맺고, 다시 대림절로 연결됩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태어난 생명을 마치고 영광을 기대하는 것과 같은 순환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내는 이 사순시기가 인생의 중간쯤이라고 시간을 고정할 수는 없어도, 우리의 삶과 비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인생에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걸 가리켜,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진실을 얘기하면, 사람은 인생에서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는 일도 그렇고, 특정한 장소에서 자기만의 계획을 세우는 일도 그렇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서 성공을 추구하는 일도, 그리고 삶의 끝에 이르러 내가 세상에서 얻을 만큼, 할 만큼 모든 일을 다 했다고 안온(安穩)한 마음을 갖는 것도 내 생각과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것이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 것을 아는 사람의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대로 질문한다면 나는 그 안에 포함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은 올해 사순시기의 4번째 주일입니다. 이제 절반이 넘었습니다. 남은 시간이 절반도 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지내는 사순절은 내 인생에 어떤 모습으로 그 흔적을 남기겠습니까? 그리고 어느 날 내 삶을 돌아보았을 때, 그 모양이 만족한 것으로 보이게 하려면, 지금 이 순간 노력하고 실천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들은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보여주신다는 자비와 사랑을 얘기합니다. 히브리민족이 이집트 땅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과정을 전해주는 1독서말씀에서, ‘파스카축제 다음날, 그 땅의 소출을 먹으니 하늘의 만나가 멈췄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 이제는 사람을 떠났다는 것보다는 사람의 활동과 노력을 하느님께서 인정해주셨다(!)’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그리스 남쪽, 코린토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서 쓴 바오로사도의 편지내용은 사람이 하느님과 화해해야 한다는 소리를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과 화해한다는 소리는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알아들어야 옳은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사이에서, 사람끼리 이루는 화해의 의미를 그대로 적용해도 큰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내 눈에 보이는 대상인 다른 사람과 하느냐, 내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내가 세상에 존재하도록 해주신 대상인 하느님이냐의 차이뿐입니다. 요즘에는 이 화해라는 말을 신앙에서는 고해성사를 대신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복음에서는 유명한 탕자의 비유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용은 모두 아시는 이야기일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둘째 아들을 대했던 아버지처럼 활동하신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으로 느껴질까요?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참으로 자비로운 분으로 나왔습니다만, 이 이야기를 듣고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가 다시 썼다는 얘기를 들으면 사람이 바라보는 태도와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초등학생의 글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얘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작은아들은 집에서 살기 싫다면서, 어느 날 집안의 돈을 모조리 싸 가지고 집을 나가버렸다. 그러나 작은아들은 돈도 다 떨어지고 실컷 고생한 뒤, 집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었다. 그가 집에 당도하자, 아버지는 굵은 몽둥이를 들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길에서 큰 아들을 만났다. 어딜 그리도 급히 가십니까? 그것도 몽둥이를 들고서, 몹쓸 놈의 네 아우가 돌아왔다. 단단히 두들겨 맞아도 싸다’, 아버지, 저도 거들까요?’, 그래, 도와다오 그리하여 아버지와 큰아들은 작은아들을 두들겨 패주었다. 아들을 실컷 때린 아버지는 제일 살진 송아지를 잡아 큰잔치를 베풀었다. 못된 아들을 벌주리라고 벼르던 소원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이 쓴 글을 읽어드렸습니다만, 얼마나 긍정하시겠습니까? 만일 하느님께서 이런 분이시라면, 우리들 가운데 옳은 기준에 따라 살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기대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 기준에 맞출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드러내고 있는 내 삶의 모습이 그에 일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뭔가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말씀이기는 하지만, 복음서에 나오는 것처럼, 있는 재산 없는 재산을 모두 탕진한 다음에서야 정신을 차린 것으로 나오는 둘째아들의 모습으로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얻을 수 있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한번 깨진 신뢰는 컵과 같아서 다시 붙여도 깨진 컵과 같이 새 컵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이야기인, 탕자의 비유 이야기를 듣고 인간적으로 해석할 때 말할 수 있는 감정일 것입니다. 물론 이 소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바라보고 판단하시는 소리는 아닐 수도 있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에서는 진실이 될 수도 있는 판단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우리는 하느님을 과연 어떤 분으로 대해야 할까요? 사람은 상대방을 대하고 싶은 대로 규정해서, 그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대하는 하느님의 모습, 우리가 만나기를 기대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이겠습니까?

 

올해 사순절의 절반을 지낸 우리가 드러내야 할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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