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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바보 또는 미친놈이라고 욕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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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42

[사서함 16호] “바보 또는 미친놈”이라고 욕한다면

 

 

……성서를 보면 형제를 보고 성을 내거나 바보 또는 미친놈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 또는 불붙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제아무리 성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순간적으로 이와 같은 악한 감정들을 가지게 됩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렵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위 성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며 삶의 순간순간에 가지는 악한 생각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마태오 복음 5장 21-24절의 말씀을 이해하자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위의 성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마태오 복음 5장 전체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5장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토막토막 해주신 교훈 말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12절은 참된 행복에 대한 가르침이고, 13-16절은 제자들이 세상에 참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17-20절에서는 율법의 완성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서로 다른 율법들을 설명하기 위한 전체적인 입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관심 있게 보아야 할 부분은 21-48절입니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구약의 가르침과는 다른 새로운 여섯 가지 교훈들을 열거하시며 제자들에게 권위 있게 가르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21-26절)는 첫 번째 교훈에 이어서 ‘간음하지 말라’(27-30), ‘이혼하지 말라’(31-32절), ‘맹세하지 말라’(33-37절), ‘복수하지 말라’(38-42절)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라’(43-48절)는 교훈 말씀들입니다.

 

 

5장 22절의 내용 묵상

 

‘성을 내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하고’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고’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이웃 형제를 거스르는 미움의 표현이 ‘성’ → ‘바보’ → ‘미친놈’이라고 점점 거칠게 강화되고, 여기에 따르는 처벌 또한 ‘재판’ → ‘중앙 법정’ → ‘지옥’이라는 무거운 형량의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 모든 표현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출애 20,13; 신명 5,17)의 율법보다 더 깊은 법 정신을 설명하기 위한 표현 방식입니다. 먼저 예수께서는 21-22절의 “살인하지 말라”는 시나이 산에서 주어진 율법에 새로운 해석을 내리십니다. 즉 동족 형제 또는 신앙 형제에게 분노하는 것조차 금하시고 이어서, 사람들이 분노하면 쉽게 내뱉는 두 가지 욕설도 금하십니다. 가령 형제를 ‘바보’라 해서는 안 되고, 다음 사례로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미친놈’이란 어리석은 자로 이해되며 이 ‘어리석은 놈’은 하느님을 업신여기는(시편 14,1; 94,8; 이사 32,5-6; 신명 32,6; 예레 5,21 참조),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보’로 번역된 희랍어 단어 ‘라카’(raka)는 아람어 ‘레까’(reqa)에서 왔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텅 빈’이라는 뜻인데 성서에서는 ‘건달패’(판관 9,4)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사람이 건전하지 못하고 ‘무가치한 놈’ 또는 ‘골이 빈 놈’이라고 욕을 먹는 부류를 가리키는 뜻입니다. ‘미친놈’으로 번역되는 희랍어 ‘모레’(more)는 히브리어 ‘모레’(morel)에서 온 것으로, '죄인’ ‘불경스러운 놈’ 또는 하느님을 ‘반역하는 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욕하는 대상을 최대한으로 모욕하는 것입니다.

 

‘불붙는 지옥’으로 번역되는 희랍어 ‘게헨나 투 푸로스’(gehenna tu puros)는 히브리어 ‘게힌놈’(gehinnom)에서 온 것으로 원래 의미는 ‘불의 게헨나’라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서남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이방인, ‘물록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산당이 있던 곳이었습니다(2열왕 23,10). 요시아 왕 때 예루살렘의 우상들과 신전을 파괴시켜 그 잔해들과 시체들을 이 골짜기에 내다 버렸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생각하는 것조차 혐오스러운 장소를 뜻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살인을 금하는 이 계명을 제대로 완전히 이해한다면 증오와 분노, 무례(‘바보’), 경멸(‘미친놈’) 같은 내적 태도들까지도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육신의 살인을 금하는 규정만으로 축소시킨 그 당시의 편협한 해석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살인을 유발시키는 동기를 사회 법정에서 다룬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살인을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반면, 예수님은 살인을 하는 행위뿐 아니라 살인으로 이어지는 가능성까지도 살인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화를 낸다는 것은 ‘마음의 노여움’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노여움은 구약의 살인과는 다르다 하더라도 이것이 살인의 동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넓게 살인의 범위로 보신 것입니다. 아울러 노여움의 표현으로 퍼붓는 여러 욕설과 악담 - 예를 들어 마태오는 ‘바보’ 또는 ‘미친놈’이라고 표현했는데 - 이러한 표현들은 살인으로 이어지는 죄악이 될 수 있다고 예수님은 강조하고 계십니다. 비록 실제로 생명을 끊는 살인을 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형제를 모욕하는 것은 이미 존엄성을 파괴하고 그 굴욕감으로 또 다른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더 큰 불행을 불러올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요약해 보면, 구약의 처벌은 현재 사회의 일반법과 동일하게, 결과로 나타나는 살인을 문제로 삼는 데 비해, 예수님의 가르침은 더 갚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살인의 동기까지도 포함시킵니다. 예수께서는 ‘재판’, ‘중앙 법정’이라는 당시 사회의 재판 형식을 들어 설명하시지만, 구약의 율법이나 사회법에서 다루지 않는 율법의 참다운 정신인 형제를 존중하고 보호한다는 입장을 두둔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역점은 처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화해’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경배인 제단 앞에서 예물을 바치는 중에라도, 화해하지 못한 형제가 있다면, 그 예물을 두고 먼저 가서 적의를 품은 형제를 친구로 만들라는 강한 표현을 쓰십니다. 거기다 덧붙여, 불가능한 예가 되겠지만, 원수지간의 사람과 재판을 받으러 가는 동안이라도 화해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본문의 결론식으로 화해가 되지 않는 상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겨운 감옥이나 지옥과 같은 불행한 사태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화해로 매듭을 짓는 것은 좋은 것으로 연결될 수 있지만, 증오는 우리 각자를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더 갚은 불행의 수렁으로 빠뜨린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현실적인 감옥보다 더 심각한 것은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람이 죽어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기 전에 화해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함을 시사하고 계십니다. 결국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불화를 남긴 채 하느님의 심판대까지 가야 한다면 불붙는 지옥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주십니다.

 

 

성서 묵상의 실천

 

예수께서 이와 같은 교훈을 하신 이면에는 악의 뿌리가 깊이 자리잡고 있는 인간 마음속의 감정까지도 다스려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가 속해 있던 믿음의 공동체에서도 신자끼리의 증오와 분열의 조짐들이 있었으리라 봅니다. ‘교회는 거룩하지만 죄인들의 모임이다.’라는 정의대로 부족한 인간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평화가 위협받을 수도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가 이런 상황에 토막으로 전해 오던 여섯 가지의 교훈들을 모아 놓고 교회의 지침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새로운 율법을 고집하시는 분이 아니라 법의 정신을 바로 심어 주시려는 의도에서 이 교훈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새로운 율법은 형식적이고 외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 친히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사랑의 실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이웃 사랑만이 화해와 일치의 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가 결론의 자리에 배열한 다음의 주님 말씀들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마태 6,40)와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마태 6,44)는 두 말씀만을 가지고도 주님의 공동체가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가를 설명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교회 내에서 서로 갈라져서 내가 옳고 네가 틀렸느니 하며 다투고 급기야는 중상 모략과 법적인 소송으로까지 몰고 간다면 그 자체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벗어나는 행위인 것입니다. 차라리 주님을 모르는 외인들보다 못한, 일반인들의 친목 단체보다 더 가치 없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은 주님의 가르침을 자기의 이익과 자기 변명에 이용하려는 꼴이 되는 것이고, 공동체 내에 많은 선한 신자들에게까지 고통과 혼란을 주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조소와 악표양을 주고, 교회의 품위를 격하시키며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할 공동체가 일치와 평화의 주님 대선 증오와 분열의 이기주의를 내세운다면 이는 교회를 매도하는 반역자, 주님을 배반하는 배반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분이 보여 주신 사랑과 일치, 평화 그리고 끊임없는 인내와 자기 희생의 삶이어야 합니다. 겸허와 순박 그리고 겸손의 바탕 속에 성서의 말씀은 살아 있는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경향잡지, 1993년 7월호, 정인준 바드리시오(원주 단구동본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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