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4일 (월)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사목자] 사제의 해를 마감하며: 지금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살아주세요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7-06 ㅣ No.540

[경향 돋보기 - 사제의 해를 마감하며] 지금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살아주세요

 

 

신록의 계절! 창문을 열어 푸름과 신선한 공기를 깊이깊이 호흡한다. 눈을 감아도 햇살과 바람 그리고 풀내음이 피부에 와닿는다. 저절로 하느님을 찬미하게 된다. 하느님을 생각하면 기쁘다. ‘창조의 하느님! 시작의 하느님!’ 두 마디만 해도 모든 만물과 역사 안에 나를 춤추게 하는 하느님의 영이 느껴진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로마 11,36).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

 

하느님은 언제나 누구든지,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하여 열려있다. 그런데 사제란? 교회란? 종교란? 이런 질문을 연속적으로 하다보면 벽돌 속에 갇히는 느낌이 든다. 왜 이것이 현실이고 나의 생활이었을까? 스스로 놀라며 자성할 기회를 찾는 마음으로 ‘사제의 해를 마감하며’를 대신한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사제

 

수도자의 가장 큰 재산은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수녀님들에게 “바람직한 사제란 어떤 사제인가?” 하고 물었다. 내심 현대신학의 특수한 문제, 성과 독신, 성직 권위, 세속화, 겸손한 사제 등의 답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어린이를 귀찮아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제”라거나 “눈높이를 맞추는 사제”란 답이 나왔다.

 

이런 생각을 가진 수녀님들이 좋다. 하나의 시작은 모든 것을 꿰뚫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갈망은 생명이 되고 강물이 되어 세상 곳곳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거창한 무슨 영성이나 신학적 논쟁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만을 원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8).

 

어떤 이유와 조건도 없이 누구도 배척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다. 수녀님들은 어린이를 좋아하는 사제를 좋은 사제로 확신했다. 어르신도 존경해야 하지만 예수님이 어린이들을 유난히 예뻐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수녀회 종신서원식에 참석한 한 외국인 노사제는 어떤 수녀에게 초등학교 4학년쯤으로 기억하는 주일학교 시절 신부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사진말 메모와 함께 봉투에 넣어 선물로 주셨다. 그 당시 어린이 레지오 마리애를 조직해 쉽지 않은 외국어(한국어) 훈화를 번번이 하셨고, 수영도 가르쳐주셨던, 어린이들과 함께 놀고 함께 청소하고 성당 마당을 가꾸셨다던 안동교구 신부님이시다. 또 아프리카 수단에서 “친구가 되어주실래요?” 하셨던 살레시오회의 고 이태석 신부님도 생각난다.

 

 

눈높이 사랑은 노력이 필요하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사제의 길을 걸으시는 성품을 받은 사제, 어린이들이 있는 곳에 몸과 마음을 모두 투신하는 사제, 상처 많은 우리 어린이들에게 다가가는 사제라면 몸은 아플지라도 자신의 외로움이 병이 되는 마음이 아픈 사제는 없을 것이다. 청소년들의 교육현장에서 사도직을 수행할 때 그들에게 형이나 삼촌, 누나나 이모 같은 인생의 가이드가 있었다면, 그들에게 벗이 되어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을 많이 느꼈다. 어린이를 사랑하려면 자연히 ‘눈높이’를 맞추어야만 한다.

 

전교주일 어린이 미사 때 어떤 사제가 물었다. “전교가 무엇인지 아는 친구?” 그때 어린 꼬마가 손을 번쩍 들고 “1학년부터 6학년까지요.”라고 힘주어 답했다. 그러자 이 사제는 “그거 말구, 다른 친구?” 하였다. 이 사제는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다.

 

한 꼬마가 성당 문 앞에서 기웃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사제에게 무언가 물었다. 치마 입은(?) 사제는 얼른 무릎을 굽혀 그 꼬마의 키에 맞춰 앉아 ‘이 세상에 너뿐이야.’ 하는 표정으로 그 꼬마의 말을 들었다. 눈높이 사랑으로….

 

사랑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눈높이 사랑은 더욱 그렇다.

 

 

비신자에게 편하게 다가가는 사제

 

오래 전 여자고등학교에 있을 때 비신자 학생들에게 가톨릭 사제와 만남의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사제들은 꼭 그 가운데 누가 신자이고, 어느 성당, 어느 신부님을 이야기하면서 꼭 우리 신자들만의 단절된 대화와 관심을 표현했다. 교사들과의 만남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자 아닌 사람을 만나는 것을 너무 불편해 했다. 예비신자를 소개하면 멋쩍어 한다.

 

왜 교회 신자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낯을 가리는 것일까?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 텐데. 고등학교 동창회에 다녀와서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며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한 사제도 만났다.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은 본당신부님이시다. 나는 특수학교 수녀님이 진짜 사랑해 주셔서 불교 집안에서 유일하게 영세를 하고 성당에 다니고 있는데 성당에 가면 아무도 아는 척 해주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신부님은 모든 사람들이 인사하고, 축일에 꽃다발도 주고 기도도 해주고 선물도 받는다. 그래서 신부님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다.”

 

언젠가 교육모임에서 지체 장애를 가진 어떤 청년이 한 말이다. 한 자리 차지하려는 사제는 없을 것이다. “중 벼슬 닭 벼슬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종교의 속성상 벼슬은 그 자체로 종교적 성찰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아주지 않는 세상, 우리의 종교나 신분을 거부한다 해도 세상은 하느님께 속한 곳이며 하느님의 사람들이라는 인식에 익숙하지 못한 것 같다. 더욱이 일반 사회행사나 프로그램에서 신자나 수녀는 사제의 보호자 역할을 자청하고 나선다. 거룩한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라면 사제가 더 앞서야 하지 않을까?

 

“성령께 마음을 열어라!” 세상 만물과 모든 이가 하느님에게 속한 것이다. 왜 두려워하는가? 어떤 청소년 담당 사제는 “요즘 청소년 하면 무조건 50% 이상은 불량으로 여겨진다.”고 말씀하셨다. 날마다 청소년과 출퇴근 버스를 함께 타며 엉기는 나는 청소년 사목을 하시는 사제들에게 권하고 싶다. 일주일만이라도 등하교 버스를 함께 타고 그들과 함께 움직여보시라.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어보시라. 청소년 문화를 담은 “완득이”라는 책을 읽어보시라. 그러면 그들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 교육을 전담하는 살레시오회 신부님 한 분은 성경을 읽으면서 ‘가난한 사람’이라는 대목이 나올 때마다 모두 ‘청소년’으로 바꾸어서 읽는다고 하셨다. 이렇게 ‘눈높이 사랑’은 반드시 고개를 숙이고 현장으로 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거룩한 사제에게 필수적으로 ‘눈높이 사랑을 위한’ 만행(萬行)을 요구한다.

 

 

‘눈높이 사랑’을 수행시켜 주는 아이들

 

며칠 전 사고뭉치였던 여학생이 졸업한 지 10년이나 지나 전화를 했다. 그런데 다짜고짜 나를 “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웬, 할머니?” 하고 묻자, 제자가 커서 시집가 자식을 낳았으니 어머니 같던 수녀님은 이제 할머니가 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너희가 아니면 누가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주랴!’ 고맙고 대견하다.

 

또 한 번은 종로 전철 안에서 붐비는 가운데 서있는데 아가씨 한 명이 다가와 갑자기 소리쳤다. “선생님, 아직도 그 재미없는 국사 가르치세요?” 한순간에 나는 그 악동 덕분에 전철 안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너희가 아니면 누가 나를 세상 한가운데로 데려가겠니?’ 정말 고마운 일이다.

 

내 스스로 못하는 만행을, 탁발을 너희들과 함께라면 언제 어디서나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과 함께한다는 것은 언제든지 자신을 다 내놓고 망신당할 준비를 해야 한다. 나 스스로 못하는 ‘눈높이 사랑’을 수행시켜 주는 아이들이 있어 좋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교사의 기도 가운데 “가르치면서 배우게 하소서.”라는 대목이 있다. 내 일생 하느님께 다하지 못하는 감사 가운데 하나는 좋은 교사, 좋은 학생들을 무수히 만났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모두가 훌륭한 스승이 되어주었고, 신앙이 무엇인지 늘 묻게 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모두가 학생이고 모두가 스승임을 늘 깨닫는다. 덕분에 나는 같은 종교생활을 해도 저마다 자신의 하느님을 만나고, ‘저마다’ 하느님의 사랑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창조의 하느님, 시작의 하느님의 새로운 사랑법이 나는 좋다.

 

 

자신의 목소리를 더 잘 듣는 사제

 

어느 수녀원에서 병고에 시달리던 수녀님 한 분이 임종을 맞이하고 있었다. 동생 신부님이 오셔서 마지막 손을 잡고 “누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아버지께 가세요.” 하고 위로했다. 그러자 그 수녀님은 “신부님, 꼭 지금 말씀하신 그대로 살아주세요.” 하고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설교를 하고 목사가 듣는다.” 이 시 구절이 가슴에 와닿는 이유는 먼저 자신을 위한 설교를 잘 들어야 하는 종교적 속성 때문일 것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수한 사제보다 신도들의 보호를 받는 거룩한 사제보다 자신의 목소리를 더 잘 듣는 성숙한 사제가 되기를 기도한다.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어린이를 태생적으로(?) 귀찮아 하는 분이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제라면 어린이를 소중히 사랑하고, 보배로운 대화를 나누고, 희망을 주고 예수님처럼 그들과 함께 “친구가 되어주실래요?”를 희망하는 사제가 되기를 수도자로서 기도한다.

 

세상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임을 배우면서 가르치는 사랑에 두려움이 없는 사제가 되시기를 기도한다. 산천을 깊이 호흡하며 성령께 마음을 열고, 날마다 새롭게 “저분은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하고 고백하는 사제가 되기를 기도한다. 세상과 하느님 사랑의 유쾌한 소통으로 행복한 사제, 착한 목자가 되기를 기도한다.

 

* 김현숙 마리효임 - 노틀담 수녀회 수녀. 오랫동안 인천박문여자고등학교에서 역사와 상담 교사를 지냈으며, 지금은 광주 가톨릭 대학교 평생교육원 피정 연수과에 있다.

 

[경향잡지, 2010년 6월호, 김현숙 마리효임]



1,32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